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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은 ‘체납왕’“머리카락만 보인다”
교비 횡령 등의 혐의로 발목이 묶여 있던 정태수 씨가 법원에 출국을 요청한 것은 지난해 3월. 항소심 재판을 받던 정씨는 지난해 1월 내려진 출국금지 연장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법무부를 상대로 출금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외국에 가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법무부는 “정씨가 2천여억원의 세금이 밀려 있다”는 국세청의 요청에 따라 2004년 7월 정씨의 출금 조치를 내렸다. 출입국관리법과 출금업무 처리규칙은 5천만원 이상의 국세나 관세, 지방세를 정당한 사유 없이 체납한 경우 법무부장관이 출국을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997년 ‘한보비리’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정씨의 출금 기간은 지난해 7월까지였다. 그는 2005년 8월에 이어 2006년 4월과 8월에도 출금 취소 소송을 제기한 바 있지만 법원은 이를 묵살했었다.
정씨 측은 “30년 전부터 고혈압, 당뇨병, 협심증 등을 앓아 온 정씨가 증상이 악화되고 있어 치료 목적으로 출국하려 했으나 출금 초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며 “치료 목적의 출국은 헌법상 보장된 자유인 만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일본 등에서 지병 치료를 받아 왔다는 게 정씨 측의 전언. 2002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1∼3개월에 한 번씩 일본 병원에 들러 정기검진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정씨가 교비횡령 등의 혐의로 항소심 재판을 받던 중에 출금 취소 신청을 한 점이다. 정씨는 2003년 9월∼2005년 4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단지 내 은마상가를 강릉 영동대 간호학과 학생들의 임상 실습 숙소로 임대한다는 허위계약을 체결한 뒤, 보증금 등의 명목으로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 교비 60여억원을 횡령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2006년 2월 횡령금 변제를 시도하고 있다는 법원의 선처로 법정구속을 면했다.
그러나 2심 재판이 진행 중인 지난해 4월 법원은 정씨의 출금 취소 요청을 받아들였다. 단 출국 기간을 4월23일∼5월22일 한달로 정했다.
5월 초 한국을 떠난 정씨는 이후 행적을 감췄다. 무려 1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정씨는 지난해 6월과 8월 등 모든 공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씨의 최측근들도 “정씨가 머무는 정확한 거주지나 병원을 알지 못한다”며 딱 잡아뗐다.
재판 중 지병 치료차 출국 18개월째 ‘감감무소식’
목적지 일본 아닌 말레이시아행…카자흐 체류 파악
지난해 10월 재판부는 “정씨가 병을 이유로 일본에 머물고 있다지만, 출국 후 카자흐스탄 등을 여행한 것을 보면 위중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정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지만 소용없었다. 검찰 역시 법무부와 함께 정씨의 신병 확보를 위해 국제 사법 공조까지 구했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국세청도 정씨의 재산 해외은닉을 의심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정씨는 2004년 이후 3년째 국세체납 최고액을 기록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그는 증여세 등 6개 세목에 걸쳐 2천1백27억원의 세금이 밀려 있지만, 호화 주택에서 버젓이 생활하는가 하면 고급 외제 승용차를 끌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돼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법원·검찰·국세청이 모두 정씨의 행방 추적에 실패한 이유는 그가 당초 출국 예정지였던 일본에 체류하지 않은 탓이다. 실제 검찰이 뒤늦게 파악한 정황에 따르면 정씨는 지병 치료 목적으로 일본에 간다고 밝힌 것과 달리 일본이 아닌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출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지난해 6월엔 카자흐스탄 알마티 키멥대학에서 열린 행사에도 이 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참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정씨가 현재 카자흐스탄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 법무부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건의한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정씨가 자진 귀국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 인도 청구를 통해 강제 송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담당 변호인 측도 정씨가 카자흐스탄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변호사 측은 지난 9일 정씨 없이 재개된 2심 재판에서 “정씨가 어디 있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가족들로부터 피고인이 현재 카자흐스탄에 있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이어 “이미 다른 사건으로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한 정씨가 또다시 실형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해 입국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달 17일 만기 인 정씨의 구속영장 유효기한을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정씨의 다음 공판은 오는 12월4일. 올해 85세인 그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낼지 주목된다.
한보일가 ‘은닉 본능’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태수(전 한보그룹 회장)씨의 일가가 은닉한 3백20억원대의 비자금이 드러났다.
지난달 25일 검찰은 정씨가 1996년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 등을 목적으로 설립한 동아시아가스(EAGC)의 돈 3백20억원을 횡령한 정씨의 4남 한근 씨를 재산 국외도피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정씨는 1998년 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해 10년 동안 도피중이다. 검찰은 지난달 27일로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료되는 점을 감안해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는 1997년 11월 한보그룹과 한보건설 등이 부도가 나면서 국세청과 채권단이 정씨 일가의 재산을 압류하려 하자 동아시아가스가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의 석유회사(루시아 석유) 주식 매각을 시도했다. 정씨는 루시아 석유 주식을 5천7백90만달러에 또 다른 석유회사인 시단코에 매각했지만 이 사실을 숨기고 서류 상으로는 키프로스 공화국의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에 2천5백20만달러에 판 것처럼 당국에 허위신고한 뒤 나머지 금액 3천2백70만달러를 빼돌린 혐의다. 검찰은 정씨가 횡령한 돈이 스위스 로펌이 개설한 은행계좌를 거쳐 스위스의 비밀계좌 2곳에 입금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한보 일가는 체납순위 상위권에 나란히 이름이 올라있다. 정태수씨(2천1백27억원), 3남 보근씨(6백45억원), 4남 한근씨(2백94억원) 등 한보 일가의 체납액은 모두 3천66억원에 이른다.
김성수 기자 /kimss@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