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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현대 ‥ 2代박정순 사장의 꿈

곡산 2008. 10. 16. 19:35

[代를 잇는 家嶪]

(31) 신현대 ‥ 2代박정순 사장의 꿈 " 일본 `골판지 옷걸이` 처럼 고부가 종이제품 만들 것"

"주변 사람들은 저보고 사업이 아니라 면사무소 서기하면 딱 맞을 성격이라고 하더군요. "

박정순 사장은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데다 말주변도 없어 가업만 아니었어도 사업은 쳐다도 안봤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박 사장은 앞으로 신현대가 나아갈 방향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한 목소리로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는 종이 박스도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을 적용하면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고급화에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소품종 대량 생산은 진입장벽이 낮아 너도나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지만 약간의 변화를 줘 특이하면서도 미각적으로 뛰어난 종이박스를 만든다면 개당 10만원 이상을 받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실제로 이 회사가 만든 수출용 반도체 포장 종이박스는 개당 14만원에 팔린다. 이 박스는 튼튼한 3중 골판지를 외벽에 사용한 데다 바닥에는 종이로 만든 팔렛을 장착,목재 포장보다 더 안전하게 제품을 보호할 수 있다. 여기에 신현대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 박 사장의 지론이다.

그는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단순하지만 뛰어난 디자인의 종이 제품으로 특허도 많이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골판지로 만든 옷걸이를 보여주며 예를 들었다. 그는 "골판지로 만든 옷걸이는 가벼우면서도 튼튼하고 다양한 디자인이 가능하다"며 "골판지 옷걸이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이 같은 옷걸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다"고 밝혔다. 골판지를 모양대로 자르기 위해 압착하는 과정에서 골판지의 골들이 원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박 사장은 "앞으로 레이저 등을 활용한 첨단 가공기술을 적용해 종이박스 외의 고부가가치 종이 제품 개발에도 힘쓰겠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제조업체를 경영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인력 부족을 꼽았다. 종이박스 제조업도 대부분의 중소 제조업체와 마찬가지로 납기를 맞추기 위한 잔업이 많고 작업장 환경도 좋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이다. 그래서 그는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 회사에는 총 33명의 직원 중 베트남,우즈베키스탄,태국에서 온 11명의 직원들이 생산직에서 뛰고 있다.

박 사장은 현재 대학교 1학년인 둘째아들이 졸업 후 가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일찍이 아버지 사업에 관심을 보여왔고 전공도 산업디자인 학과를 선택해 전부터 유심히 지켜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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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현대 ‥ 43년전 야전천막서 종이박스 시작

종이상자 제조회사인 신현대의 창업주 박성근씨(왼쪽)가 아들 정순씨와 함께 천안산업단지 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천안=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지금은 KT&G 등 60개 기업 '단골'

종이상자 제조업은 다른 포장재 제조업들과 같이 부침이 심하다. 상품 수요 변화에 따라 거래처에서 발주하는 박스 물량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이익도 박해 수지를 맞추기도 쉽지 않다. 원자재 가격이 단기간에 폭등하더라도 거래처에서 납품가를 조정받지 못해 부도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미군용 야전천막에서 창업

이 같은 어려움을 반영하듯 그동안 수많은 종이박스 업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소유주도 바뀌어 왔지만 ㈜신현대(대표 박정순)는 대를 이어 40년 넘게 종이상자 생산만을 고집해온 천안 토박이 기업이다. KT&G를 비롯해 LG생활건강,자동차 배터리로 잘 알려진 아트라스비엑스,부탄가스를 생산하는 태양산업 등이 대표적인 납품처이다. 현재 60여개 기업에 연간 500만개가 넘는 종이박스를 공급 중이다.

창업주인 박성근 옹(93)은 젊은 시절 돈을 모으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해방 이후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65년 농사를 접고 천안시내로 이사하면서 이화지기라는 이름의 종이박스 공장을 세웠다. 문방구를 운영하던 처남이 "장래가 유망하다"고 권유한 것이 계기였다.

그는 "처음에는 초가집 앞마당에 미군용 야전천막을 쳐놓고 양복,구두,케이크를 담는 종이박스를 만들었다"며 "종이를 물에 풀고 접착제를 넣은 뒤 다시 이를 압축시켜 말리는 작업을 끝없이 반복했다"고 회상했다. 1967년 골판지가 국내에 알려진 뒤에는 골판지 원단을 구입,재단을 거쳐 박스로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국내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포장재의 수요도 급증했다. 천안지역에서 가장 큰 제과업체인 대신제과에 호두과자 포장박스를 매일 6000개씩 납품하면서 연 3000만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주변에 제조업체와 수출업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종이박스 납품 문의가 줄을 잇자 창업주는 공장도 새로 짓고 거래처를 점점 늘려갔다. 당시 천안의 유일한 박스 생산 업체였기 때문에 매출액의 50%가 순이익으로 남았다.

2대인 박정순 사장(52)이 가업을 이은 것은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인 1980년.3남3매 중 장남인 박 사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장 일을 도왔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방한복을 입고 천막공장에서 밤새도록 일한 아버지 코밑에 고드름이 달린 것을 보고 집안 일을 돕겠다고 마음 먹었다.

천안에서 조치원까지 자전거로 물건을 싣고 배달을 나갔던 날이 있을 정도로 숱한 고생을 겪었다. 박 사장은 "천안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니 이미 아버님 연세가 환갑을 훌쩍 넘으셨다"며 "천직이라고 여기고 24세란 나이에 사업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했다.



◆신뢰로 잇단 위기 극복

박 사장은 경영을 책임진 뒤 가내수공업 형태의 회사를 현대적인 기업 형태로 탈바꿈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1985년 사명을 현대포장산업사로 바꾸고 5000만원을 들여 최신 기계설비를 도입,생산량을 확대했다. 하지만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985년 큰 홍수로 공장 옆 하천이 범람해 공장이 물에 잠긴 것.기계,제품,원단을 모두 버려 매출 3억원짜리 회사에 3000만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1986년에는 가장 큰 거래처 두 곳이 부도나면서 1억5000만원의 어음이 휴지조각이 됐다.

박 사장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직원들이 용기를 북돋우며 모두 밤샘 작업에 나서 끝내 납기일을 맞췄다"며 "오랫동안 거래해온 대기업 관계자들도 현장에 직접 와본 후 모든 거래를 현금 결제로 전환해줘 회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같은 경험으로 직원들과의 신뢰,거래 업체와의 신뢰가 사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박 사장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공정을 개발해왔다. 대표적으로 골판지 두 장의 양 끝을 붙이는 공정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이압접착기'를 개발,이전보다 시간당 10배가 넘는 상자를 생산했다. 이 같은 장비를 가진 박스 제조 업체는 신현대가 유일하다고 박 사장은 자랑했다. 2003년에는 4500평의 부지로 공장을 확장,이전하면서 '컬러 오프셋기'를 도입했다. 이제껏 외주를 주던 컬러 인쇄 공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해 주문에서 납기까지 10일 정도 걸리던 것을 5일 이내로 단축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올해는 지난해보다 20억원 이상 증가한 70억원의 매출 달성이 무난할 전망이다.

박 사장은 "최근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골판지 가격이 50%가량 올라 이윤이 많이 떨어졌다"며 "그렇지만 생산성을 더욱 높이고 꾸준히 기술개발을 한다면 국내 최고의 종이박스 회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안=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