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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떡집 ‥4代 김승모씨 "전통 맛 名品 브랜드로 키울 것"

곡산 2008. 10. 16. 19:33

[代를 잇는 家嶪]

(25) 낙원떡집 ‥4代 김승모씨 "전통 맛 名品 브랜드로 키울 것"

"낙원떡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떡집이 수도권에만 400곳이 넘습니다. 우리나라 떡집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것이지요. 이 같은 브랜드 가치를 어떻게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효과적일까를 놓고 고민이 많습니다. "

낙원떡집의 4대째 경영 승계를 준비 중인 김승모씨는 향후 브랜드 경영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1996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씨는 5~6년 전부터 어머니를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김씨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낙원떡집의 로고를 만들고 쇼핑백 등 포장용 봉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그때만 해도 낙원떡집은 검정 비닐봉투에 떡을 담아 팔았다. 낙원떡집의 홈페이지(www.nakwonfood.co.kr)도 이 무렵에 만들었다. 인사동에 분점을 낸 것도 김씨의 아이디어다. 인사동 낙원떡집에서는 젊은 소비층이나 외국인들이 먹기 편하도록 테이크아웃 형태로 떡을 포장해 판매하고 있다.

대부분의 가업 승계자가 그렇듯 김씨 역시 낙원떡집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떡집 운영은 말 그대로 중노동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떡을 만드는 과정이 떠올라 가까운 지인들에게조차 함부로 떡을 나눠주지 않을 정도다. 무용과 미술을 각각 전공한 누나와 여동생도 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일찌감치 가업 승계를 포기했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씨가 결국 가업을 이으려고 결심한 것도 부모님이 피땀 흘려 투자한 세월이 아까워서였다. 떡이라는 음식이 맛이나 품질 면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데도 외식 브랜드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기나긴 세월 동안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것.떡 소비층이 줄면서 가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듯한 위기감도 가업 승계를 결심하게 된 이유다.

 

김씨는 "어머니는 전통을 잇는다는 생각에 앞서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한 생존 본능으로 가업을 유지해 왔지만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됐다"며 "떡의 상품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효과적인 브랜드 경영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 대형 식품업체가 떡 판매에 뛰어든 것과 관련,김씨는 쓴소리를 했다. 김씨는 "일부 대기업들은 큰 시장에 도전하지 못하고 손쉽게 진출할 수 있는 중소업체들의 영역만 넘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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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낙원떡집 ‥ 이승만 대통령부터 청와대 `60년 단골`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1번지에 있는 낙원떡집에서 아들 김승모씨(왼쪽)가 어머니 이광순 사장에게 방금 나온 떡을 권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youngwoo@hankyung.com

남주북병(南酒北餠). 예로부터 청계천을 경계로 세도가들이 모여 살던 삼청동 일대 북촌마을 등 서울의 북쪽은 음식 사치가 대단했던 탓에 떡을,별반 권력이 없던 문ㆍ무반들이 주로 살았던 남산골 부근 등 남쪽은 불쾌한 일을 잊으려는 취객들이 많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술을 으뜸으로 쳤다.

북촌마을과 가까운 낙원상가 일대에는 이같은 전통이 남아있어 떡집 10여곳이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떡집이 바로 낙원떡집.

9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떡집은 1대 고이뻐씨(작고)의 뒤를 이어 셋째딸 김인동씨(85)가 물려받은 뒤 김인동씨의 맏딸 이광순 사장(65)이 3대째 운영하고 있다. 4대는 이광순 사장의 장남 김승모씨(38)가 이을 예정이다.

낙원떡집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순 사장의 외할머니인 고이뻐씨가 요즘으로 치면 창업주인 셈.당시에도 이 일대는 떡집 골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일합방 이후 창덕궁에 있던 궁인(宮人)들이 호구지책으로 이곳에 터를 잡고 궁중 떡을 빚어 팔면서 떡집 거리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근처 원서동에 상궁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어요. 우리 할머니도 그 중 한 분을 알게 돼 궁중 떡을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지요. "(이광순 사장)

해방을 맞은 이후 김인동씨가 떡집을 물려받았으나 곧 6ㆍ25 전쟁이 터졌다. 김씨는 충남까지 내려간 피난 길에서도 틈틈이 떡을 만들어 팔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휴전 이후 다시 낙원동에 올라 온 김씨는 별다른 이름도 없던 점포에 '낙원떡집'이라는 상호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떡집 경영에 나섰다.

궁중 떡의 비결을 전수받은 탓일까. 맛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60여년간 청와대에서 주문하는 떡은 대부분 낙원떡집에서 도맡았다. 특히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추석 명절이면 으레 청와대에서 달동네였던 봉천동 등의 저소득층에 떡을 돌리기 위해 1.5t 트럭 5~6대분의 떡을 주문해 며칠 동안 밤샘 작업을 하기 일쑤였다. 이광순 사장은 "어머니는 청와대에서 주문하는 떡이라고 특별히 다르게 만든 적은 없었다"며 "청와대 직원이 와도 가판대에 놓인 떡이나 썰고 있는 떡을 내놓을 정도로 항상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도 이곳을 가끔 들르는 고객이다. 청와대뿐 아니라 정ㆍ관계나 재계에도 단골이 많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그 중 한 명.송해,황정순 등 원로 연예인들도 낙원떡집을 찾는다. 지난해 작고한 변중석 여사(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인)는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면 낙원떡집의 떡을 챙겨 갔다. 여의도 LG 쌍둥이빌딩 기공식 때도 이곳에서 만든 고사떡이 쓰였다. 최근에는 건설업체에서도 낙원떡집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삼성건설이나 SK건설 등의 경우 재개발ㆍ재건축 시공사업을 따내기 위해 이곳에서 떡을 사간다는 것.이 사장은 "수주전을 앞두고 노인들에게 돌린다면서 떡을 주문해가곤 하는데 우리 떡을 사가면 꼭 붙는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김인동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1980년부터는 이광순 사장이 29년째 낙원떡집의 가업을 잇고 있다. 이 사장은 "1980년대만 해도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2시 넘어서까지 일을 했다"며 "집에 갈 때면 졸면서 걸어갈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밝혔다.

"아이들 돌볼 틈도 없었지요. 그래도 3남매가 모두 좋은 대학(서울대,이화여대,일본 청산대)을 나왔어요. 떡장사를 하면서 자식교육 잘 시켰다고 내가 '한석봉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하."(이광순 사장의 남편 김정귀씨)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이 사장은 어머니가 그랬듯 품질 만큼은 철두철미하게 관리했다. 지금도 이 사장은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반드시 국산 쌀과 참기름을 쓴다. "식구들이 먹는 것처럼 만들어야 떡 맛이 변치 않는다"는 것이 이 사장의 고집이다. 백화점 등 유통업체의 납품 제의도 거절했다. 매출액의 28%에 이르는 매장 수수료를 내고 나면 품질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서다. 이런 이 사장도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칠순 잔치에 그만 돌잔치용 떡을 보낸 것.가족들이 노발대발했지만,칠순 노인이 앞으로 더 살라는 뜻이라며 좋아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낙원떡집에서 만드는 떡의 종류는 대략 40~50여 가지.요즘 가장 인기 있는 떡은 아이들 주먹만한 크기의 '쑥 인절미'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자라는 쑥을 넣어 만든다. 100년 가까이 전통을 이어온 낙원떡집은 요즘 고민이 많다. 패스트푸드 음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떡을 찾는 소비층도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4대를 준비 중인 김승모씨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떡의 상품성과 경쟁력을 회복시키는 일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