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인터뷰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인터뷰, “두 아들 중 후계자는...”

곡산 2017. 1. 19. 13:07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인터뷰, “두 아들 중 후계자는...”

마지막 남은 1세대 창업주의 ‘무한책임’ 경영

⊙ “욕심 많은 차남(신동빈 롯데 회장) 결국 추방될 것”
⊙ “롯데, 반은 한국 반은 일본 기업”
⊙ 일본 나카소네 총리 기다리게 할 정도의 영향력
⊙ “기업에 사회봉사는 실업자 안 만드는 것”
⊙ “내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에 상장(上場) 안 해”
⊙ “박정희 대통령은 ‘유능한’ 사람”
⊙ 은행 돈 빌리면 ‘용기’가 없어질 것 같아 무차입(無借入) 경영
⊙ “열심히 하고 기본을 지키면 ‘위기’가올 리 없다”
⊙ 신동주 SDJ 회장, 123층 롯데타워 자리에 ‘아파트’ 짓도록 건의
⊙ 롯데타워는 한국을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식민지 청년의 꿈

글 | 이정현

아버지만 한 아들 없다.
 
  지난해 12월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으로 국회 청문회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總帥)들은 주요 의혹에 “기억이 없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다”로 답변했다. 주로 면피(免避)성 답변이었다. 자연스럽게 1988년 현재 총수들의 아버지들이 참석한 5공 청문회가 오버랩됐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내는 게 편하게 산다는 생각으로 냈습니다”며 솔직하게 답변했다. 총수들은 최소한 “내가 결정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않았다. 거침없는 발언 역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이번 청문회를 보며 “아버지만 한 아들 없다”는 말을 떠올리는 이유다. 1988년 청문회에 참석했던 그룹 총수들은 대부분 ‘맨손으로 시작한 창업자’들이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1세대 경영인들이다. 거침없는 자신감의 배경이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기업을 이은 후계자들과는 급(級)과 격(格)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을까.
 
  기자는 작년 중순부터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대기업 창업주 신격호(辛格浩) 롯데그룹 총괄회장 인터뷰를 추진해 왔다. 신 총괄회장은 일본 식민지 시절 18세에 맨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 롯데그룹을 설립한 인간 신화다.
 
  2000년 12월 도쿄 일본 롯데 본사에서 본지 조갑제 편집장이 인터뷰한 이후 16년이 흘렀다. 당시 인터뷰는 외환위기를 간신히 극복해 나가고 있는 한국 경제의 희망을 묻기 위해서였다.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리더십 붕괴로 길을 잃고 헤매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가능이 없었던 창업자에게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국의 나아갈 길을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신 회장은 1922년 10월 4일(음력)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 둔기리 377번지에서 태어났으니 94세이다. 100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건강 또한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신격호 회장을 돌보고 있는 장남 신동주 SDJ 회장측에 “평생 총괄회장이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아, 그의 경영철학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며 “지금이라도 마지막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인터뷰 필요성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 기억력이 쇠퇴했고, 평생 언론 인터뷰를 본인이 싫어했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러던 중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동주·동빈 형제의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이 계속되고, 롯데그룹의 검찰 수사 역시 시작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롯데의 구심점인 신 총괄회장의 생각이 더욱 중요해졌다.
 
  신동주 회장측도 인터뷰의 필요성에 점차 공감했다. 이에 9월 중순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전해 왔다. 작년 10월 검찰 수사 발표가 나오자, 기왕이면 2017년 신년호에 인터뷰를 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조건 없는 인터뷰’가 가장 중요한 상호 조건이었다. 큰 뜻에 서로 동의하고, 롯데그룹을 만들어 낸 창업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하기로 했다.
 
  인터뷰는 12월 9일, 12일 두 차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격호 회장 회의실에서 각각 1시간가량 이뤄졌다. 양일 인터뷰에는 장남 신동주 SDJ 회장, 민유성 나무코프 회장, 조문현 변호사가 동석했다. 9일 인터뷰에는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이, 12일에는 신동주 회장의 부인 조은주씨가 동석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경상도 출생으로 특유의 어법과 사투리가 있었다. ‘~잖아’라며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는 표현이 대표적이었다. 또 고령의 나이로 인해 발음이 부정확했다. 손자뻘 기자에게 이야기하는 관계로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인터뷰의 경우, 표준어로 말을 순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 회장은 특유의 화법과 발음에 개성과 느낌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최대한 신 총괄회장이 말한 그대로 기사에 담으려 노력했다.
 
 
  “롯데, 반은 일본 반은 한국 기업”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인터뷰를 위해 걸어서 접견실로 들어오고 있다.
  신격호 회장은 12월 9일, 12일 두 차례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접견실에 나타났다. 간병인이 옆에 서 있었지만, 가능하면 부축 없이 혼자서 걸으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신 회장의 ‘기억의 커튼’이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묻는 질문엔 답변을 어려워했다. 다만 ‘평가’를 묻는 질문에는 뚜렷하게 답변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억’을 묻는 질문은 최소화하고, 본인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집중했다.
 
  신 회장은 컨디션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았다. 질문을 이해 못하고, 기억력에 어려움을 호소하다가도 갑자기 총기(聰氣)를 회복해 날카로운 답변을 할 때가 있었다. 그 순간 5대그룹 총수의 위엄이 느껴졌다. 인터뷰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라고 질문했을 때이다.
 
  신 회장은 “반반(半半)이지. 한국 일본 반반.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에 왔잖아”라고 답변했다. 맞는 말이고 순리에 맞는 답변이지만, 지금껏 롯데그룹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기자로서 거인(巨人)으로 불리는 신 회장이 무슨 말을 할까 조바심이 났다.
 
  창립자로서 롯데의 정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된 부분은 롯데의 가치를 묻는 질문이었다. 롯데의 정신을 묻는 기자의 거창한 질문에 신 회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너무나 당연한 답변에 순간 당황해 ‘열심히 일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물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인가요.
 
  “(웃으며) 그걸 왜 물어? 열심히 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이지 ….”
 
 
  경험에서 나온 ‘열심히 일하는 삶’
 
신격호 회장에게 인사하는 필자.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자가 계속 궁금해하자 회장은 자신의 일화(逸話)로 설명했다.
 
  “120엔을 가지고 일본에 갔어. 처음에는 돈이 없잖아. 열심히 일했어.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짐을 내려 주는 트럭 조수도 2~3년 하고, 개인 전당포에 취업했어. 열심히 일했어. 전당포 주인에게 아들, 딸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나를 더 믿었어. 뭐든 열심히 하면 인재(본인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를 만나게 돼. 사람이란 열심히 하면 처음에는 안 믿지만 1년, 2년, 3년 지나면 완전히 믿게 된다고. 조그마한 전당포에서 일했지만 아들이 있는데도 나를 믿더라고.”
 
  전당포 사원 경험은 인터뷰 중간 중간 끝없이 반복됐다. 성공은 습관이다. 한번 성공하는 방법을 알면, 계속 성공할 수 있다. 눈덩이 굴리는 것처럼 커진다. 1등을 경험하면 계속 1등 하게 되는 이치다. 이는 책으로 알 수 없고, 몸으로 느꼈을 때 비로소 체화된다. 열심히 했더니, 사장이 자식보다 자신을 신임하는 달콤한 성공경험은 신 회장 성공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전당포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방법을 물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열심히 한 것 말고는 ….”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
 
  더 이상의 질문은 우문(愚問) 같아, ‘롯데는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하는지’ 롯데의 비전을 물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해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해. 더욱 발전시켜야지.”
 
  회장은 질문을 받던 중에,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에게 “롯데 임직원이 몇 명이야”라고 물었다. “20만명입니다”라는 답변을 듣자,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종업원이) 20만명이 넘잖아. 그 사람들 생활이 있잖아. 롯데가 없어지면 실업자 생기잖아. 그러면 안 되지. 책임이 있잖아. (그래서 롯데는) 열심히 하고 있잖아.”
 
  신 회장의 리더십은 ‘아버지 정신’으로 느껴졌다. ‘내가 모두 결정한다, 나를 따라라, 내가 책임져 준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을 강조하고 좋아했지만 싫어하는 것도 있었다. 신 회장은 유독 거짓말을 싫어했다. 설명에 거짓말이 계속 등장했다.
 
  — 고객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른 것이 아니야. 거짓말을 않고 열심히 하면 돼. 거짓말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믿는다고 …. 사람이 거짓말을 잘하잖아, 한 번 하면 그 다음은 안 믿는다고 ….”
 
  이 부분에서 신 회장의 유머를 느낄 수 있는 답변이 있었다.
 
  — 회장님은 거짓말을 안 하셨겠네요?
 
  “(웃으며) 할 때도 있겠지 ….”
 
 
  롯데타워, “한국이 자랑할 것 만든 것”
 
2016년 2월 29일 서울 잠실 롯데타워의 모습. 3·1절을 맞아 ‘대한민국 만세!’ 메시지가 부착됐다.
  이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잠실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숱한 논란을 낳았다. 안보상의 이유로 불가능했지만 로비로 허가를 얻었다는 의혹은 두고두고 롯데 경영에 발목을 잡았다. 왜 이렇게 초고층 건물에 집착했을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국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는 식민지 청년의 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 회장은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몸관리를 철저히 하는 성격이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빈틈이 없었고, 입고 있는 옷도 주름 하나 없었다. 나아가 땀이 나거나 하면 인터뷰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종이 수건을 꺼내 닦았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생활하기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행동해야 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식민지 청년으로 일본에 가서 긴장하며 생활한 습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신 회장은 일본에서 한국을 자랑할 것이 부족한 것이 마음의 한으로 남은 것 같았다. 신 회장은 롯데타워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 과거 롯데월드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에 그런 시설이 없었어. 그래서 만들었어. 애들 좋아하는 시설 만들고 토요일 일요일 되면 갈 데가 없잖아. 그래서 만들었어.”
 
  — 123층 롯데타워를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짓고 있지. 대부분 끝났을 거야. 한국에는 고층이 없잖아. 한국에 외국 사람들이 오면 구경할 것이 없지. 좋은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 만들었지.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잖아. 한국에 볼 만한 것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무언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고층은 모든 경비가 3배로 들어. 수지(收支)가 안 맞아서 못 짓는다고. 고층건물(롯데타워)이 세계에서 가장 높잖아. 선전이 될 것이고.”
 
  — 많은 돈을 들여 롯데타워를 짓는 이유는요.
 
  “한국에 볼 만한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한국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 이거라도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 회장에게 롯데타워 건설은 애국(愛國)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신 회장이 경험했고 느끼고 있는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없어도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로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신 회장 입장에서 롯데타워 건설은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것이 없는 현실에서 세계 최고층 건물을 지어 자랑하고 싶은 한(恨)풀이 같은 것이었다.
 
 
  선의를 몰라준 안타까움
 
  다른 질문과 달리 롯데타워 부분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담당자가 아주 까다롭게 했어. 다른 나라는 이런 것 지어 주면 좋아하는데”라며 불만도 많이 토로했다. 본인이 한국을 위해 무언가 만들어 놓고 싶은데, 이를 몰라주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왜 롯데타워에 집착했을까. 기자는 롯데타워 준공 이후 무엇을 희망하는지 물었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들으면서 그 답을 얻었다.
 
  — 롯데타워의 희망은 무엇인가요.
 
  “관광객이 많이 올 것이다. 한국을 인정할 것이다.”
 
  이 정도이니, 롯데 내에서 롯데타워 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이런 일까지 있었다.
 
  — 혹시 롯데타워와 관련해 경영진이나 장남과 차남이 반대한 적은 없나요.
 
  “(목소리가 높아지며) 반대한다고?”
 
  만일 누가 반대한다고 말하면, 즉각 호출할 기세였다. 총괄회장의 의지가 이토록 확고하니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옆에 앉아 있던 장남 신동주 회장에게 질문을 했다.
 
  — 혹시 롯데타워와 관련해 리스크가 있다고 보고 드린 적은 없나요.
 
  “아버지에게 직접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정책본부를 통해, 거기에 상업시설을 짓는 것보다는 아파트를 짓는 것이 낫다고 말한 적은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파트를 지으면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이를 건의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롯데타워 건설은 비즈니스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롯데타워는 신 회장의 마지막 꿈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인정할 것이다”라는 말에, 식민지 청년이 맨손으로 시작한, 신 회장의 꿈이 응축되어 있었다. 세계 최고 빌딩을 지어서 한국을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상장을 하지 않은 이유
 
   롯데그룹은 회사의 상장(上場)을 거의 하지 않았다. 상장은 가장 쉽게 돈을 모으는 방법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이자 부담이 크다. 어찌 보면 가장 쉽게 돈을 모으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장을 하면 기업의 모든 것을 주주와 나눠야 한다. 간섭도 받아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비싸게 돈을 빌려오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재 롯데그룹은 일본 롯데와의 분리 등을 목적으로 상장을 추진 중에 있다. 신격호 회장이 상장을 싫어했던 이유는 ‘아버지 정신’과 관련이 있었다.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의지였다. 왜 롯데는 상장을 하지 않았는지 묻자, 신 회장의 답변은 이러했다.
 
  “(상장이) 좋지만도 … 안하는 것은 주주들이 잔소리가 많더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가지 말이 나오면 그 말 싫어서 안했다고. 여러 이견(異見)이 많이 나오고 시끄러워서 일을 못할 수가 있다고(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장을 안했어.”
 
  경상도 사투리가 중간 중간 리듬감을 타면서 전해졌다. 어감(語感)에서 신 회장의 신념이 느껴졌다. “내가 결정하겠다”는 의지였다. 요즈음 기업철학으로 보면 독재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철학이 있었다. 내가 결정하지만 책임은 꼭 내가 진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신 회장은 본인의 의지를 이렇게 말했다. “(상장을 하지 않고) 내가 책임을 지겠다. 내가 회장을 하면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지.”
 
  신 회장은 롯데와 거의 한몸이었다. 본인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 회사 주식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실 건가요.
 
  “회사에 넘길 거야. 회사가 돈이 필요하잖아. 내가 가져가 봐야 필요가 없잖아. 회사에 줄 거야.”
 
 
  차입금을 쓰지 않은 이유
 
회의실 회장 자리에 놓인 롯데껌. 신격호 회장 사무실에는 롯데 그린껌이 항상 준비돼 있다.
  요즈음 ‘롯데’ 하면 사람들이 위기를 떠올린다. 2016년 롯데는 악몽의 시기를 보냈다. 외환위기의 거센 파고에도 끄떡없었던 롯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23층 롯데월드타워 추진 과정에서의 로비 의혹, 배임·횡령 의혹으로 시작된 검찰 수사, 경영권 분쟁 등 악재가 끝없이 이어졌다.
 
  신 회장에게 롯데의 위기에 대해 물어봤다.
 
  — 롯데의 위기는 무엇인가요.
 
  “열심히 하고 기본을 지키면 위기가 올 리가 없잖아. 롯데는 차입금이 하나도 없잖아.”
 
  — 은행 차입금을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차입금을 쓰면 (활동에) 제한이 온다고. 그러면 용기가 없어진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야겠다고(생각해서).”
 
  — 97년 외환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정부가 사업을 많이 해 달라고 했어. 실업자가 많으니 사업을 해 달라고 해서, (사업을) 했어.”
 
  신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본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기본만 지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단순한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다소 동문서답처럼 느껴졌지만, 신 회장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롯데를 맡고 있는 한 롯데에 위기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롯데는 대기업 가운데 입사 후 정년을 바라볼 수 있는 회사로 유명하다. 고용보장이 튼튼한 것이 롯데의 사풍이다. 이는 책임을 강조하는 신 회장의 생각 때문으로 보였다.
 
  — 기업이 사회에 봉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사회봉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회사를 많이 발전시켜서 종업원들이 많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실업자(失業者)가 안 되도록(하는 것이 봉사야).”
 
  이러한 생각은 고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 롯데에 고객은 무슨 의미인가요.
 
  “롯데가 쓰러지면 그 사람들(종업원들) 실업자 되잖아. 그 책임도 있고, 제품도 책임감이 있잖아. 만드는 사람은 신의(信義)가 있어야 돼. 롯데가 잘 만들어야 사람 사이에 (고객에게) 신의가 있게 돼. 거짓말을 하면 결국은 안 믿는다고.”
 
  신 회장은 “롯데가 쓰러지면 그 사람들 실업자 되잖아”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이, 회사가 망해서 직원을 실업자로 만드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답변을 듣다 보니, 경영인의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렇듯 롯데는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는 신 회장의 무한책임 철학으로 창립된 회사였다. 평생고용이 사라진 시대다. 이제는 흔치 않은 책임을 강조하는 경영이다.
 
  신 회장의 무한책임 경영은 본인이 겪었던 치열한 삶에서 나왔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 봤다.
 
 
  신격호의 인생역정
 
젊은 시절의 신격호 총괄회장.
  젊은 시절 신 회장은 문학청년이었다.
 
  가장 유명한 롯데(LOTTE) 사명을 만든 일화에 드러난다. 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따온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일화지만, 다시 물었다. 소설을 좋아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답했다.
 
  “일본에서 책, 잡지를 많이 봤는데, 그때 롯데 이름이 나오더라고. 소설에 나오는데, 그 책(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미있게 봤어. 그래서 관심이 많아져서, 롯데라는 이름을 지었잖아.”
 
  자연스럽게 문학청년에서 사업가로 방향을 바꾼 신 회장의 인생역정이 궁금했다.
 
  신 회장이 120엔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난 것이 1941년 봄이다. 요즈음 표현으로 부모님 허락을 받지 못한 가출(家出)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순간으로 그해 12월 8일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했다.
 
  왜 신 회장은 집을 떠났을까. 식민 소년으로 일본을 동경했던 것 같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가치관이 생기고 목표가 생긴다. 올림픽 스타 김연아의 경우 롯데월드 아이스링크 스케이트 공연을 본 경험이 인생의 전환이 되었다. 별것 아닌 경험이 삶의 목표를 만드는 것이다. 거인 신 회장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으로 넘어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초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어. 경찰서장도 일본 사람이었고. 이야기를 하면 잘 들어줬어. 일본 사람은 친절했어. 서장에게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서장이 좋은 생각이라고 이야기하며 도와준다고 허가를 내줬어. 일본 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거든.”
 
  10대 신격호에게 가장 고마웠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신 회장이 만난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줬고, 나아가 도움까지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 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했다.
 
  집 떠나는 아들을 가만히 볼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신 회장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신 회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님 몰래 (일본) 갔어. 일본 간다고 하니 ‘바보야 죽으러 가냐’고 하셔서, 말도 못하게 했어.”
 
장남 신동주 회장 인터뷰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63·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동생 신동빈 롯데 회장(62)과 경영권 분쟁 중이다. 현재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신동주 회장은 소송을 통해 경영권을 되찾겠다는 입장이다. 신동주 회장에게 주요 쟁점에 대해 물었다.
 
  — 왜 본인이 롯데 총수가 되어야 하나요.
 
  “신동빈 회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은 2.4%에 불과합니다. 제가 컨트롤하고 있는 주식은 30%이기 때문에 본인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 것이죠.”
 
  — 지분 구성보다, 롯데 총수로서의 비전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롯데그룹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현재 창업주이신 아버지의 기업이념과 다르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총괄회장은 사원과 거래선을 중요시하고 특히 고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신동빈 회장의 경영은 아버지의 철학과 맞지 않습니다.”
 
  — 롯데는 한국 기업인가요, 아니면 일본 기업인가요.
 
  “롯데는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시작한 기업으로서 이제 한국에서 (일본보다) 더 비약적으로 발전한 글로벌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신동빈 회장은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였다고 주장합니다.
 
  “중국 투자와 관련해, 보고된 손실만 2조원입니다. 무조건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 ‘롯데가 위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동빈 회장과 일본 경영진들의 야합으로 롯데 경영권을 빼앗겼습니다. 일본으로 국부 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 롯데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나요.
 
  “(웃으며) 롯데 임직원들이 저에게 연락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 동생(신동빈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은 있나요.
 
  “최근 한 번 통화했습니다. 근래에 거의 연락이 없습니다.”
 
  — 동생과 계열분리를 통해 정리할 의사는 있나요.
 
  “생각해 볼 의견입니다.
 
  먹고살려고 사업 시작
 
신격호 회장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는 롯데 제품과 롯데타워 모형.
  직업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즈음은 자아실현을 위해 일을 한다. 대기업 입사는 어려워도, 중소기업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소연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먹고사는 것이 급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신 회장은 일본 와세다공업고등학교(지금의 와세다대학 이학부)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 지금까지는 화학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인터뷰에서 신 회장은 응용화학과라고 정정했다.
 
  화학을 전공한 이유를 묻자, “사회가 발전하면 화학도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해 화학을 전공했다고 설명했다. 화학 지식은 그 이후 껌 개발이 가능하게 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사업을 목표로 했던 것도 아니었다.
 
  —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살 도리가 없잖아. 먹고살고 학교 다니고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만 했지. 일본 갈 때 100엔 한 개와 10엔 두 개 120엔만 가져갔어. 사업을 시작해 키웠지 사업이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하고 거짓말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이야. 그러면 믿는다고.”
 
  — 껌 사업을 시작하신 이유는요.
 
  “사업은 혼자 시작했어. 원료가 전부 배급이었어. 껌은 배급제가 아니어서 시중에서 원료를 구할 수가 있었어. 그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해 껌을 시작했어.”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2015년 12월 2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의 꼭대기층 123층에 대들보를 얹는 상량식이 열렸다. H빔 대들보에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다.
  신 회장이 한국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찾으면 신격호 회장을 만났다. 신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신격호 회장의 일본 내 영향력이 한국 사회 전체보다 컸던 적이 있었어요. 한국 정부에서 일본 사업가, 정치가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이 많이 왔어요. 총괄회장이 성심껏 도왔지만 누구에게 알리지는 말라고 했어요.”
 
  산사스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나카소네 총리와 점심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회장(신격호)이 전화로 나카소네에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하라고 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신격호 회장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일관계에 큰 역할을 했던 신 회장에게, 박 대통령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었다.
 
  — 박정희 대통령을 기억하세요?
 
  “알지. 아주 유능한 사람이잖아. 내가 일본에 살고 있을 때 일본에 많이 왔어.”
 
  신 회장은 ‘능력’을 매우 중요시했다. 최고의 극찬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일도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잘했잖아. 돌아간 지 몇 년 됐나?”
 
  — 36년 전입니다.
 
  “그렇게 오래되었나?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면 일본에 많이 오잖아. 일본 (기업인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어. 아주 옛날이야기야.”
 
  — 딸이 대통령 하는 것을 아시나요.
 
  “박(정희) 대통령은 돌아갔지. 여자가 대통령을 하는 것이 세상을 봐도 거의 없잖아.”
 
  — 여자보다 남자가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이 잘하는 사람이(해야). 여자라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고 남자고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보셨나요.
 
  “옛날에 만나 보았을 거야. 기억에는 없지만.”
 
 
  롯데 경영권 분쟁
 
2016년 9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동주(오른쪽)·동빈 형제가 피의자 신분으로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롯데는 장남과 차남 사이에 경영권 분쟁 중이다. 현재 경영권은 차남 신동빈 회장이 장악했다. 자연스럽게 후계자 문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신 회장은 아직도 자신이 총괄회장으로 롯데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남 신동주와 차남 신동빈 사이의 경영권 분쟁은 일단 신동빈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신격호 회장은 인터뷰 중간에 기억력 부족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롯데 경영권과 관련해 신 총괄회장의 생각은 이러했다.
 
  — 롯데 회장의 자격은 무엇인가요.
 
  “지금 내가 회장 하고 있잖아.”
 
  — 돌아가시면 누가 롯데 회장이 되어야 하나요.
 
  “아들 둘이 있잖아. 둘이 같이 하고 있잖아.”
 
  — 후계자는 누군가요.
 
  “둘이 같이 하게 되겠지.”
 
  — 아들 사이에 경영권 분쟁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장남이 해야지. 차남은 도와주고.”
 
  — 둘의 능력은 어떤가요.
 
  “똑같아. 별 차이가 없다고.”
 
  롯데 후계자와 관련해, 신 회장은 장자(長子) 상속의 뜻이 확고했다. 이틀 동안 수차례에 걸쳐 장자 상속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 롯데의 후계자는 누구로 해야 하나요.
 
  “장남이 해야지. 차남이 하면 사회가 이상하게 본다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그런 거라고.”
 
 
  장자 상속 뜻 명확히 밝혀
 
  신 회장은 기억력이 떨어져 롯데 경영권 분쟁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상황 설명을 하면 이해했다. 이와 관련한 답변은 이렇다.
 
  — 롯데 경영권을 차남이 장악한 것을 알고 있나요.
 
  “아키오(동빈)가 후임이라고? 히로유키(동주)를 추방했다고? 그것은 욕심이 많아서 추방했겠지. 아키오가 무슨 회장을 하고 있는 거야? (동빈은) 바보야. 내가 회장 시킨 적이 없는데, 지멋대로 하는 거야. 그거는(동빈은) 추방해야 돼. 자기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잖아. 욕심이 많은 거야.”
 
  — 신동빈 회장의 경영능력은 어떤가요.
 
  “욕심이 많아. 능력은 없다고. 내가 봐서 알아. 히로유키와 아키오를 보면 능력의 차이 없고 똑같아. 자기가 장남이 아닌데 후계자라고 하는데 그건 안 돼. 장남이 결함이 있으면 그때는 몰라도, 내가 볼 때는 둘의 능력이 똑같다고. (차남은) 욕심만 많아. (차남은) 결국 추방당한다고.”
 
  신 회장은 차남에 대한 비판 강도는 거셌다. 이런 말도 했다.
 
  “회사 (직원이) 20만명이잖아. 그 사람들 생각해 열심히 해야지, 욕심을 내면 안 돼. 나는 용납을 안 한다고. 아키오(신동빈 회장)가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장남이 후계자여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능력 차이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질문했다.
 
  — 장남과 차남의 경영능력 차이는 어떤가요.
 
  “내가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이 똑같이 보인다고. 차남이 욕심이 많은데. 될 도리가 없다고. 일본이고 한국이고 다 그래. 순서가 있잖아. 같이 하면 좋잖아. 지가(자기가) 하려 하면 도리가 없다고. 내가 볼 때는 바보야. 욕심 내는 것이 바보야. 욕심 내서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있어. 내가 장남으로 (후계자 선정) 안하고 차남 시키면 세상 사람들이 롯데 이상하게 보잖아.”
 
 
  질문 받은 ‘기자’
 
롯데타워 건설 현장에서 공사추진 상황을 보고 받고 있는 신격호 회장.
  신 회장은 질문을 받다가 간간이 기자에게 질문도 던졌다. 기억에 남는 질문은 두 가지였다. 우선 롯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신 회장은 자신이 창조한 롯데그룹에 대한 평가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인터뷰 진행 중에, 신 회장은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롯데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요? 좋게 보고 있나, 나쁘게 보고 있나?”
 
  질문에 기자는 “어린 시절 롯데월드에서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답변에 신 회장은 안심하는 것 같아 보였고, 편하게 웃었다.
 
  두 번째 기억나는 질문으로 인터뷰가 끝나려 하자, 신 회장은 기자에게 물었다.
 
  — 한국 국민소득이 얼마지?
 
  “2만7000불입니다.”
 
  — (2만7000불이라는 답변을 듣고) 한국이 많이 발전했잖아. 일본은?
 
  “4만 불입니다.”
 
  — 중국은?
 
  “6000불입니다.”
 
  이렇게 3국의 국민소득을 묻고 나서, 신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도 경제가 발전해야지.”
 
  일본, 중국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당부로 느꼈다.
 
  신 회장은 아직도 자신이 현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롯데의 중요 결정은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비서에게 하루에도 수차례 롯데의 매출, 국내 그룹 순위 등을 묻고 있었다. 신 회장은 롯데 경영은 자신이 모두 책임을 져야 하기에,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920년대 힘 없는 식민지에 태어난 이들은 역사상 고생을 가장 많이 한 세대로 알려져 있다. 식민지 시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근대화 과정에서 휴식을 취할 조금의 시간도 없었다.
 
  인터뷰 도중에 신 회장에게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신 회장은 “18살부터 사업했잖아. 내가 제일 잘 알아”라며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평생 쉴 수 없었던 1920년생 총괄회장의 확고한 의지였다.⊙
 
[월간조선 2017년 1월호 / 글=이정현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