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사

[스크랩] LG그룹 이야기

곡산 2016. 6. 17. 08:05

◆구씨 - 허씨 `아름다운 동업` / (1) 계열분리 첫 관문 LG전선 분가◆

"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

사업하는 사람 열이면 열, 동업은 하지 말라고 말린다.

형제나 친구간이라 해 도 결국은 의를 상하고 갈라서게 되는 것이 동업의 한계로 알려져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LG그룹 구씨와 허씨 가문은 57년에 걸친 동업을 성공적으로 마무 리지음으로써 일반의 상식을 뒤엎었다.

양가가 일으켜 세운 LG는 내년 초 각각 (주)LG와 (주)GS홀딩스로 공식(법적) 분리된다.

1년도 어렵다는 동업을 57년 간이나 지속한 것도 대견하지만 헤어져 문패를 바꿔 다는 마당에까지 잡음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어떤 철칙과 불문율이 이 를 가능하게 했을까. 허씨와 구씨 가문의 동업 반세기를 집중 조명해본다.

 
"전선과 산전은 우리(허씨) 쪽에서 맡는 게 순리인 것 같습니다.

"

"그건…. 좀 곤란합니다.

"

LG그룹 계열분리를 앞두고 구씨 쪽 대표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씨 쪽 대표인 허준구 명예회장(작고)이 만난 2001년 어느 날의 대화 내용이다.

짧은 용건이 오간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 앞에 천 길도 넘는 낭떠러지가 가로 지르고 있음을 느꼈다.


반세기 동업사에 처음으로 맞는 `위기`였다.

때론 사소 하고 때론 제법 언짢은 이런 저런 불화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양측이 한 발씩 물러섬으로써 지속해 온 동업관계가 아니었던가. "이래선 안되는데…."

두 사람의 뇌리 속에 급하게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두 회장은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펴지 않고 회담을 끝냈다.

그것은 50여 년 동 업 인생에 유전자로 각인된 자제력이요, 화합의 정신이었다.

그렇지만 때는 결별을 앞둔 재산 분배의 장. 섣부른 양보는 자칫 두고두고 후 회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들 뒤에는 수많은 구씨와 허씨 측 주주들이 회담 결과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날 봉합된 갈등은 그대로 각각의 `가족회의`로 무대가 옮겨졌다.

장소는 허씨 쪽 회의장.

LG그룹 경영에 참여하는 모든 허씨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허준구 회장은 구 자경 회장과 회동한 내용을 설명하고 가문의 의견을 구했다.

일부 허씨들은 당 연히 격한 반응을 보였다.

"LG전선은 허준구 회장께서 직접 만들고 키우신 기업입니다.

기술을 주지 않겠 다는 일본 기업에 사정사정해서 제조업의 기반을 만들고 마침내 국내 최대 기 업으로 일궜는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LG그룹 분리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이날 가족회의까지 들여다본 허씨계 경영자가 전하는 그룹 분리 막전막후의 전말이다.

허준구 회장의 장남인 허창수 회장도 선친이 애써 키운 LG전선은 당연히 허씨 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 회장이 거절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허 회장도 처음에는 저쪽에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허씨 경영자)

아버지의 손때 묻은 LG전선에 대한 허창수 회장의 애착은 남달랐다.

실제 허창 수 회장은 92년 5월 LG산전 부사장으로 부임했고 95년 2월에는 LG전선 회장을 맡았다.

이후 그룹 분리의 밑그림이 완성돼 2002년 3월 LG건설 회장으로 부임 하기 전까지 10년 간을 허 회장은 `우리 몫이거니` 생각하며 LG전선ㆍ산전 경 영에 꿈을 키웠다.

그런 만큼 허 회장의 실망은 컸고 가슴앓이도 컸다는 게 허 씨쪽 사람들의 증언이다.

반세기 이상 담장 밖으로 큰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온 양가 사이 에 균열이 이는 듯이 보였다.

여차하면 동업사에 실패 사례를 하나 더 추가하 고 두 가문이 앙금을 남긴 채 돌아설 수 있는 형국이었다.

구씨 집안의 집사인 강유식 부회장은 허씨 가문과의 오랜 인연과 의리를 내세 워 전선을 넘기도록 구씨들을 설득하기도 했다(허씨측 인사).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구씨 쪽에도 허씨 주장을 들어주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구ㆍ허씨 양가만의 문 제라면 단답형으로 끝날 일이지만 LG전선은 구씨 가문의 다른 가계까지 얽혀 있었다.

구씨 내부에서 한 차례 더 핵분열을 일으켜 분가를 해야 하는데 거기 에 LG전선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분가 대상은 구인회 창업회장의 5명 형제 중 넷째(태회)ㆍ다섯째(평회)ㆍ여섯 째(두회) 동생들이었다.

이 때문에 구ㆍ허씨 양자 회담이 나중에는 3자 회담이 되고 나아가서는 다자회담으로 확대됐다.

마침내 허준구 회장은 허씨 가족회의에서 `포기`를 선언했다.

"간난을 무릅쓰고 키운 회사에 애착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미래를 끌고 갈 사 업`을 갖는 것이 더 낫다"고 허씨들을 설득하고 나선 것.

"허준구 회장이 깨끗이 양보하는 용단을 내리자 다들 깜짝 놀랐다"고 그날 회 의 분위기를 전해들은 허씨 쪽 전문경영인 한 사람은 회고했다.

구씨 쪽에서는 LG전선을 고집하는 논리로 `플래그십(flagship)` 이론을 내세웠 다.

플래그십(모함)이 있어야 거기에 몇 척을 묶어 선단을 구성하지 않겠느냐 는 것. 결국 LG전선계열은 구씨들 뜻대로 태회(LG전선 명예회장)ㆍ평회(E1 명예회장) ㆍ두회 씨(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 가계로 넘어갔다.

전선을 `모함`으로 하고 그 아래 LG산전, E1(옛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LG니꼬동제련 등 `몇 척 `이 선단을 이뤘다.

LG전선 대신 허씨 몫으로 양가가 합의한 것은 LG칼텍스정유와 LG유통, LG홈쇼 핑 등을 묶은 서비스업종이다.

건설이 허씨 쪽으로 넘어간 것도 그룹 분리의 분기점이 LG는 전자ㆍ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GS는 정유ㆍ유통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업종으로 엮다보니 나온 방안이었다.

"부모형제도 싸우는데 남남이 살다보면 언성 높일 일이 왜 없겠는가. 솔직히 가끔은 있다.

그렇지만 두 집안 다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구씨 쪽 경영자)

두 집안이 중요한 장면마다 자제력을 발휘해 면면히 동업관계를 이어온 배경에 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리가 버팀목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양가 인 사들은 한결같이 대답한다.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보아온 두 가문의 `신뢰와 의리`는 욕심에 제동을 걸고 먹을 것이 있으면 `저쪽`을 먼저 생각하는 미덕을 낳았다.

"돈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번 GS그룹 분리는 조단 위의 자산을 나누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몇백억 원 때문에 신뢰를 깨고 대세를 그르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가에 정해진 근수(몫)만 지켜지면 색깔(사업 내용)이 달라도 자기 고집만 피울 수는 없습니다.

"

허씨 몫으로 GS홀딩스 그룹 출범이 확정된 뒤 허씨 측 어느 경영자가 한 말이 다.

◆구씨-허씨 57년 `아름다운 동업` / (2) GS `서비스 그룹`되기까지◆

"두 가문이 운우(雲雨)의 관계를 이뤄 이만큼 살림을 키웠지만 이대로 자자손 손 가기는 어려운 일. 그렇다면 내 생전에 (분가의)틀을 잡아 놓는 게 순서 아 니겠나."

고 허준구 전 LG건설 명예회장은 "내가 죽고난 뒤 (양가)후손들이 재산분배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다투는 꼴을 보인다면 `우리 사이(허씨ㆍ구씨)`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LG 전문경영인에게 말했다.

이런 생각은 구자경 LG 명예회장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LG그룹 분리작업은 이 미 90년대 후반부터 양가 수뇌진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 남은 문제는 `어떤 업종을 떼줄 것인가`였다.

협상 초기단계부터 정유ㆍ유통ㆍ 홈쇼핑ㆍ건설을 주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양가는 세부 분리작업에 들어갔다.

구씨와 허씨가 굵은 선을 그려놓기는 했지 만 여기에는 구씨측 강유식 부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분리의 전 실무과정을 설계하고 감독했다.

이렇게 해서 정유ㆍ유통ㆍ홈쇼핑ㆍ건설ㆍ스포츠(축구단)로 구성된 GS그룹이 결 정된 것이다.

그러나 확정된 분리 안을 보면 얼핏 허씨 쪽 사업구성이 구씨에 비해 너무 가 볍다는 생각이 든다.

전자ㆍ화학ㆍLCD 같은 굵직굵직한 첨단업종은 모두 구씨가 맡았다.

"허씨 기업 들은 정유를 비롯한 내수기반 업종을 차지해 그렇게 쌈박한 사업은 보이지 않 는다.

"(GS에 밝은 애널리스트)

여기서 그룹 분리를 지휘한 강유식 부회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룹 분리과정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GS의 사업구성은 허씨 가족회의에서 결정된 바탕 위에서 미세조정을 거쳐 확정된 것이다.

특기할 만한 위기나 분란은 결코 없었다.

-허씨들은 처음부터 화학이나 전자 같은 인기 업종을 요구하지 않았나.

� 허씨 경영자들은 `전선이냐, 정유ㆍ유통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냐`를 놓고 고심하다 스스로 후자를 택한 것일 뿐, 아무도 `이걸 가져라`고 강요하지 않았 다.

-허신구 LG유통 명예회장이 화학사업 초기(럭키화학)부터 열정을 갖고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화학은 협상대상이 아니었나.

� 당시는 모두가 달라붙어 뛸 때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사장을 하고, 구자경 명예회장이 공장장, 허신구 회장이 영업을 맡았다.

크림을 리어카에 싣고 영업 을 한 일화도 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하지만 가지고 갈 정도의 규모를 넘어 섰지 않았나 싶다.

-종합상사도 서비스업종인데 왜 그쪽으로 안 갔나.

� 그건 다르다.

상사는 서비스업종이지만 전자ㆍ화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 해외에 수요를 가진 LG 제품이나 장비들이 상사를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

해 외에 시장이 없으면 상사는 필요가 없다.

-금융업에 대해서도 허씨들이 하고 싶어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 금융은 허씨들이 경영에 간여한 일이 거의 없다.

맡아도 경영에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처음부터 금융은 협상대상이 아니었다.

이처럼 분리 과정에 큰 탈이 없었던 것은 양가의 재산배분에 `65대35`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LG그룹 재산의 65%를 구씨가, 35%를 허씨가 창업 당시부터 보유해왔다는 것이다.

강 부회장은 이에 대해 "양가 지분이 정확이 65대35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 로 그 언저리"라고 밝혀 허씨들 지분으로 전자나 화학 같은 기업을 가져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허씨들이 전자나 화학처럼 해외매출 비중이 높은 것을 가져가지 않은 데 대해 LG의 또 다른 경영자는 "구씨와 허씨는 반세기 이상을 2인3각으로 뛰었다.

긴 시간 동안 구씨와 `패어(pair)`로 행동하고 사고해왔는데 갑자기 어려운 업종 을 들고나갈 경우 `독자 경영의 위험`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정유 유통 홈쇼핑 건설 등은 모두 내수산업으로 국외는 큰 신경을 안 써도 된다.

지금까지 해외 부문은 주로 구씨들이 챙겨온 만큼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정유는 업계에서 완전히 기반을 닦아 안정적인 고수익 사업이다.

건설은 높은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고, 분리 후 LG그룹 일감까지 거의 다 맡아하게 돼 있다.

유통(백화점 포함)은 성장성이 기대될 뿐만 아니라 LG그룹에서 생산한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다.

이에 앞서 분리안이 거의 확정될 무렵인 올 6월쯤 허씨측에서도 강 부회장 같 은 전문경영인 출신 대리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물색 끝에 허씨측 의중을 가장 잘 알면서도 충성도가 높은 인물인 서경석 사장(현 GS홀딩스 대표)이 선 임됐다.

서 사장은 허씨들 회의에 참석하고 그 내용을 소화해 구씨들과의 협상 에서 안을 내놓기도 했다.

분리작업의 마무리 단계에서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들이 이런 대리인 역할을 맡은 것은 "수뇌부가 직접 부딪쳐 담판을 짓는 데 따른 `위험`을 없앨 뿐 아니 라 이해관계도 없고 감정이입이 될 우려도 없는 타인을 대표로 내세워야 분리 작업이 객관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허씨쪽 전 임원)


◆구씨-허씨 57년 `아름다운 동업` /(3) `LG소행성`의 분리◆

99년부터 추진된 허씨 분가작업은 구씨 가계의 분가도 촉진시켰다.

당시 LG는 구본무 그룹 회장 입장에서 보면 조부(구인회 창업회장)의 동기간에 서부터 3대에 걸쳐 소유지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구씨 측은 애초 허씨들을 먼저 분리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진행중 뜻밖의 변수가 생겨 99년 11월 LG화재가 먼저 살림을 차려 나갔다.

LG화재 분리가 앞당겨진 것은 98년부터 추진해온 김대중 정부의 재벌 빅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국내 4대 재벌(현대 삼성 LG 대우)간 중복 사업을 한 곳으 로 몰아 산업경쟁력을 제고한다는 취지의 빅딜은 LG가 애지중지하던 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빼앗기는`(LG 사람들은 빼앗겼다는 표현을 쓴다)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LG반도체 매각 대금이 들어오자 현금흐름에 여유가 생겼다.

구씨 들은 "이참에 미뤄온 계열분리를 추진하자는 생각에 이르렀다".(LG 전문경영인 )

강유식 부회장에게 계열분리 밑그림을 그려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도 이 무렵 이다.

99년이면 외환위기 직후지만 재벌간 덩치 키우기 경쟁은 여전했다.

LG도 그런 재계 분위기 속에서 대한생명 입찰에 참여했다.

LG는 여기서 입찰자 중 가장 많은 1조여 원을 써냈다.

그러면서도 결국 대생 인수에 실패한다.

입찰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날 느 닷없이 정부에서 `5대 그룹은 신규로 생보사업을 못한다`는 산업정책을 발표했 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보험에 주력할 생각이 있었지. 그런데 보험업은 생보가 아니면 돈이 안되거든? 결국 내부에서 갑론을박을 거듭하다 보험에 대한 꿈을 접기로 했지".(구씨 경영자)

구씨 팔자에 보험사업은 없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때 구인회 창업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철회 씨(작고) 가족들이 "우 리가 계열분리해서 보험을 하겠다"고 나섰다.

LG그룹으로서는 언젠가는 치러야 할 계열분리를 자연스럽게 하면서 방계기업 차원에서는 보험 사업을 하게 되는 기회였다.

이런 계산이 서자 분리작업은 일 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렇게 해서 LG화재해상보험은 철회 씨 손으로 넘어갔고 장남 자원 씨가 명예 회장, 3남 자훈 씨가 회장, 4남 자준 씨가 사장을 각각 맡게 됐다.

LG화재는 아래로 럭키생명과 럭키자동차보험손해사정을 거느리고 있다.

화재그룹은 업계 3위로 2003년 매출은 2조7000억원에 달했다.

이에 앞서 99년 5월 허준구 명예회장의 차남 정수 씨가 LG기공을 맡아 나갔고 2000년 3월에는 구인회 창업회장의 4남인 자두 씨가 LG벤처투자(회장)를 떼어 나갔다.

다음은 허씨와 구씨가 분리협상 과정에 잠시 `실랑이`를 벌였던 LG전선 차례. 전선과 산전을 묶은 LG전선그룹은 구인회 창업회장의 셋째(태회) 넷째(평회) 다섯째(두회) 동생들이 공동 경영하는 형태로 분리됐다.

해당 업종은 전선 산 전 니꼬동제련 E1(옛 LG칼텍스가스) 극동도시가스 가온전선 등.

그룹 회장은 과거 정계로 나가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태회 씨의 장남 자홍 씨로 추대됐다.

무역협회장을 역임한 평회 씨 장남 자열 씨는 전선 CEO를 맡았 다.

"LG그룹 창업공신 구태회 명예회장의 아들인 자홍 씨가 회장을 맡고 있지만 CE O는 자열 씨가 합니다.

전선 3형제 중 자홍 씨가 서열이 가장 높고 자열 부회 장한테는 4촌형뻘이 되지만 최대주주는 자열 씨라고 봐야죠".(구씨계 전문경영 인)

이에 대해 LG전선측은 "태회씨와 평회 씨 집안간에 지분은 대등하다"며 "이 때 문에 자홍 회장과 자열 부회장이 각각 이사회 의장과 전선 CEO 역할을 맡아 경 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깨끗이 마무리됐지만 LG전선은 분가되기 직전 해프닝이 있었다.

LG그룹 전자사업에 강한 애착이 있던 구자홍 당시 LG전자 회장이 그대로 `회장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구자홍 회장은 당시 LG전자의 글로벌기업 이미지에 걸맞은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룹의 대표적인 CEO였기도 하고…. 한마디로 `상품성`이 있 었죠. 전자도 잘 키웠고요".(LG전자 고위 관계자)

하지만 뜻밖에도 공정거래법이 걸림돌이 됐다.

`계열분리된 회사주주가 계속 L G전자 경영을 맡게 되면 계열분리가 안 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이 일로 LG는 공정위에 유권해석까지 요청했다.

회신은 `구자홍 회장이 LG전선 의결권을 포기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조항을 만족할 만한 방안을 찾다가 결국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며 구자홍 회장은 아쉬운 걸음으로 LG를 떠났다.

◆구씨-허씨 57년 `아름다운 동업` /(4) 두 집안 `관습헌법`◆

"우리 아들을 맡아서 사람 좀 만들어 주지 않겠소. 교육도 하고 훈련도 시키고 …."

구인회 창업회장이 무역업(조선흥업사)을 시작할 무렵 허만정 씨가 동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의 경영수업을 부탁했다.

이렇게 구씨가에 `맡겨진` 사람은 허준 구 LG건설 명예회장(2002년 작고).

때는 1940년대. `돈이 가는 길을 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장사에 밝았던 구인회 씨는 이렇게 해서 허씨가와 손을 잡고 LG그룹을 일으키고 키웠다.

"사업이 잘 되자 허씨 쪽에서 자꾸 논을 팔아 증자를 했어요. 그쪽 형제들도 많이 들어오고. 우리 집안에서는 전부 받아 주었지요(구자경 명예회장).

허씨 쪽 자본을 받아들여 어느 정도 사업의 모양새가 갖춰지자 양가는 서로가 낸 원금의 크기에 따라 비율을 정했다.

이것이 양가의 동업을 지탱한 뼈대인 ` 65(구씨)대 35(허씨)`의 지분율이다.

창업초기부터 지켜져온 지분 비율은 허씨 들이 GS홀딩스로 독립할 때도 재산분배의 잣대가 돼 아무런 말썽 없이 살림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사업상 중대한 결정사항이 있으면 지금도 지분 가진 사람끼리 가족회 의를 열고 토론을 합니다.

 
결론은 허창수 회장이 내리죠. 여기서 나온 결론은 구씨 측에 전하고 협의를 합니다.

구씨들이 반대하면 그 이유를 들어 양보할 것은 하고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수용하고 따릅니다.

"(허씨 경영자)

구씨와 허씨가문 사람들은 각각 65%와 35%에 대한 지분만 충실히 관리하면 됐 다.

65%와 35% 속에도 지분이 나눠져 있지만 이 또한 철저히 관리된다.

구본 무 회장과 허창수 회장은 각각의 가문에서 장자이기도 하지만 지분도 많기 때 문에 LG 회장, GS 회장이 됐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가에서 지분은 상식이고 룰이다.

구씨와 허씨 사이는 물론, 각각의 집안 내에서도 일체 돈으로 인한 구설수가 없는 것은 이처럼 철저한 지분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분율만 가지고 양가의 긴 동업여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LG 사 람들은 `인화`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살아 생전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 는 교훈을 후계자에게 남겼다.

LG가 퇴직 임원들을 후하게 예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두 가문의 성공 뒤에는 `의리와 신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요즘 세태에서는 이미 `케케묵은` 가치관이 돼버린 의리나 신뢰 그 자체보다 그런 덕목들을 금과옥조로 삼는 유교적 가풍이 더 기여하고 있다.

두 가문의 자손들은 엄격한 유교적 가풍 아래서 교육을 받아 위계질서가 확실 히 서있다.

어른들이 결정을 내리면 아무도 거역을 못한다.

자손이 많아 연상 의 조카, 연하의 삼촌이 많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조카를 젊은 숙부들은 주저 없이 `자네`라고 부른다.

집안 어른들이 참석하는 가족모임 때면 `능성 구씨` 수십명이 줄을 서는데, 회 사에서 가장 윗자리에 앉는 구본무 회장도 여기서는 앞에 나서지 못한다.

이런 전통이 살아 있기에 두 가문은 그 많은 동생과 조카들을 일사불란하게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문화가 강하다 보니 양가에서는 여자들의 발언권이 거의 없다.

양가 며느 리는 물론 딸들조차도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한다.

구씨ㆍ허씨 양가 통틀어 서 회사 경영 전면에 나선 경우도 없다.

그룹에서 운영하는 문화사업에도 다른 그룹과는 달리 여자들이 간여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가풍 때문에 삼성 이병철 씨 딸로 구씨가의 자학 회장(아워홈 회장)에게 시집온 이숙희 씨(이재용 씨 고모)도 조용히 내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LG는 양가 오너계열이라도 혹독한 경영훈련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경영 자로 세우는 전통이 있다.

그 많은 양가 사람들을 다 `권좌`에 앉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사장이 되었는데 왜 나는 사장을 안 시켜 주느냐고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 부족하면 앉힐 수가 없습니다.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경 명예회장도 회장직에 오를때까지 18년간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았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이에 대해 "대장간에서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없이 담금질해 쇠를 단련한다"고 말한 바 있다.

후일 구본무 LG회장도 과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 부회장 등을 20년에 걸쳐 차곡차곡 밟아 올라갔다.

이런 사례는 국내 다른 기업에서 찾아보기 어렵 다.

구ㆍ허씨간 성공은 `역할분담의 미학`이라고 경영학자들이 치켜세우기도 한다.

"경영은 구씨 집안이 할테니 돕는 일에만 충실해라."

허만정 씨가 후손에게 당부하고 간 이 말은 적어도 LG에서는 이날까지 `관습헌 법`이 돼 있다.

"서로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죽도 밥도 안됩니다.

분가하기 전 허창수 회장은 늘 구본무 회장의 그림자처럼 한발 뒤에 서 있었습니다(허씨 경 영자)."

 

◆구씨-허씨 57년 `아름다운 동업` / (5) 미래구도는◆

구본무 회장은 아들이 없다.

하나 있는 아들을 10여 년 전 여의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고통이야 오죽하랴. 그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구 회 장은 나이 쉰에 아이를 얻었다.

그 애가 지금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이다 . "엄청 예뻐하십니다.

지금은 집에 가서 그 애 보는 맛에 사신다고 해도 될 겁 니다.

"(구씨가 며느리)

큰 딸은 미국 유학중이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아들이 없다고 그룹 대가 끊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구인회-구자경-구본무 로 이어져 온 가계에서 그룹 총수 자리는 본무 회장이 `마지막 황제`가 될 가 능성이 높다.

구 회장 자신도 그런 소견을 피력한 바 있다.

그렇다면 LG그룹의 향후 지배구조는 어떻게 바뀔까.

먼 훗날 일이지만 일부에서는 금호그룹 박씨들처럼 구 회장의 셋째 동생인 본 준 LG필립스LCD 부회장이 이어받을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LG 사람들은 무게를 두지 않는다.

대신 `전문경영인이라도 탁월한 리더가 있으면 그룹 회장이 될 것`으로 보는 LG 경영자가 많다.

"LG는 구씨주주 50여 명의 공동경영 형태로 가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구씨들이 경영을 맡는다는 것은 아니고…. 전문경영인들을 일선에 앉혀 이들이 좋은 경 영을 펼치도록 뒤에서 독려하는 형태가 되겠지요".(강유식 부회장)

구ㆍ허씨가 대거 경영에 참여해온 탓에 LG그룹 경영문화는 오래전부터 느슨한 연방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삼성처럼 타이트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씨족간에 경영을 하다 보니 그룹 각사에 모질게 간섭하지 못하는 측면이 이런 문화를 낳 지 않았을까요".(LG 전문경영인)

LG는 앞으로도 전자ㆍ화학을 투톱 체제로 끌고 간다.

미래 구조를 `트라이앵글 ` 형으로 간다는 구상에 따라 통신에도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강유식 부회장에게 그룹 비전을 물어봤다.

-작년 카드사태 때 포기한 금융업의재진입 가능성은.

금융사업 재진입은 결코 없다.

-고전을 거듭해온 통신사업은 안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LG텔레콤이 자립 생존의 최소 기반이라는 600만 가입자(점유율 18%)를 돌파하 면서 활기를 찾고 있다.

13일 응찰 예정인 두루넷 인수가 성공하면 유ㆍ무선과 인터넷이 결합된 종합통신회사로 시너지 창출이 기대된다.

-미래의 그룹 모습은 어떻게 그리고 있나.

LG의 양대 축인 전자ㆍ정보통신, 화학 분야에서 유망 신규사업에 집중할 계획 이다.

통신도 집중 육성한다.

-GS와 분리하면서 맺은 신사협정 내용은.

"상대방이 영위하는 업종에는 진출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분리 후 두 회사간 협력은.

각각 사업에 충실하면서도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에서는 협력을 확대 할 것이다.

LG상사와 LG건설이 최근 러시아 정유ㆍ석유화학 플랜트를 공동수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구씨-허씨 57년 `아름다운 동업` / (5) 미래구도는◆

"덩치를 키워야지. 그룹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금 사업만으로는 곤란하지 않겠어. 서경석 사장이 인수ㆍ합병(M&A) 3~4건을 검토하고 있기는 한데 기존 업종과 시너지를 내면 좋겠지"(허씨 집안 관계자)

GS그룹 분리 이후 허씨 고위층의 최대 관심사는 재계 7위에 걸맞은 그룹 규모 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경석 GS홀딩스 사장이 허창수 회장과 주 2~3회 꼭 만나 그룹 전체 비전에 대 한 밑그림을 짜며 분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어차피 분가하기로 한 것인데 속도를 내야지. 시간을 끌면 혼란만 가중될 뿐 이야"(허씨 집안 관계자)

이 같은 생각은 최근 양가에서 합의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내년 초 또는 상반기 얘기가 나왔지만 분리를 선언하고도 GS 계열은 아직 도 LG 브랜드를 쓰는 등 어정쩡한 관계가 이어지자 양가가 연내 마무리로 선회 했다는 것.

GS의 장래 비전의 핵심은 지속적인 M&A를 통한 덩치 키우기와 계열사의 1등전 략이다.

서 사장은 M&A는 장기ㆍ지속적 과제라고 설명했다.

그는"언제 좋은 매물이 나 올지 모르니까 기회가 왔을 때 확 잡을 수 있도록 M&A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GS홀딩스는 부채 비율과 자회사 편입 요건 등을 따져보면 산술적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3조~4조원 규모 매물까지도 사들일 수 있는 여력이 있다.

M&A 전략에는 합작하는 방식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 예로 든 것이 최근 `GS 왓슨스` 합작사 설립이다.

LG유통이 아시아 최대 건강ㆍ뷰티 기업인 AS왓슨과 합작해 새로운 유통산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M&A 진출 업종이 LG와 겹치면 어떻게 될까?

그것에 대해서 서 사장은 기우라고 말한다.

"그런 것은 협정을 맺지 않아도 서 로에 대한 신의와 믿음으로 각자 사업을 영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주력 업종인 LG칼텍스정유는 주유소 특성상 LG유통과 LG홈쇼핑 등 고객을 기반 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유통 네트워크를 강화해 석유에 치우친 구조를 탈피하 는 것을 전략으로 잡았다.

편의점 슈퍼마켓 할인점 백화점 등을 운영하고 있는 LG유통도 홈쇼핑을 중심으 로 하는 사이버쇼핑몰과 연계해 고객을 공유하는 사업구조로 간다는 것이다.

서 사장은 "출범 때 표방한 것처럼 사업구조는 `에너지ㆍ유통 서비스` 부문 중 심, 지배구조는 각 계열사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경영"이라고 말했다.

서 사장은 전 계열사 브랜드를 GS로 변경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내년 3월 계열사별 주주총회를 거쳐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CI 작업과 함께 역삼동 강남타워를 국제적 비즈니스 콤플렉스로 만들기 위한 리뉴얼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출처 : 타잔보이의 인터넷 세상
글쓴이 : 타잔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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