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상권에서 30년간 자리를 지켜온 한 베이커리 매장이 더 좋은 조건으로 유명 커피전문점과 계약을 했다는 건물주의 통보로 문을 닫자 대형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불똥이 튀는 등 수많은 쟁점들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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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 홍대점 철수를 알리는 홈페이지 팝업창 | 리치몬드 과자점 권상범 대표는 지난달 31일 밤 11시 홍대점 영업을 중단하고 문고리라도 간직하기 위해 직접 문고리를 뜯어내며 1983년부터 30년간 일궈온 매장에 대해 진한 아쉬움 드러냈다.
그로부터 3일 전, 이 매장에는 폐점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고 폐점 당일에는 단골고객들과 일부 취재진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곳 홍대점은 롯데리아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커피가 들어설 예정이다.
권 대표는 국내 8명밖에 배출되지 않은 대한민국 제과명장이자 베이커리 업계 대표단체인 대한제과협회의 제21대(1998년 5월~2000년 10월) 회장(현, 고문)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리치몬드 홍대점 철수는 동종업계에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예상치 못한 논란에 휩싸인 권 대표는 본사 직원들에게 언론매체에 함구하라는 지시를 내린 채 현재 서교동 자택에 칩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본사 관계자는 "홍대점은 철수하지만 성산본점과 이대점의 영업은 계속 이어갈 것"이라며 "그러나 향후 추가 오픈 계획은 없다"고 귀띔했다.
3일 아침 찾은 이 매장은 용역업체 직원들이 주요 물품들을 밖으로 이동시키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먼지 속에서 만난 권형준 리치몬드 생산팀장(권 대표의 아들)은 현장을 지키며 직원들과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커피머신을 뜯어내기 전 마지막으로 추출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권 팀장의 표정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내일(4일)까지 철수를 완료해야 한다"는 권 팀장은 "30년간 이어져온 매장 철수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이렇게까지 클 줄을 몰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다수 언론에 보도된 '자금난에 의한 철수'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설명에 따르면 리치몬드 매장 세 곳 중 이곳 홍대점은 하루 객수 인원만 500~600명으로 영업이 가장 활발했다. 그는 "하루 500~600명씩 30년을 단순 계산해도 1억 명이 다녀갔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자금난에 의한 철수가 아니라 건물주가 더 좋은 조건에 유명 프랜차이즈 브랜드와 계약했으니 나가달라는 요청을 벌써 2번이나 해왔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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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 홍대점 내부 물품들이 밖으로 이송되고 있다. |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불똥 리치몬드 측에 따르면 홍대점은 5년 전 건물주가 파리바게뜨 매장을 입점시키려 해 당시 철수 위기를 맞은 바 있다. 그러나 "동종업계에게는 자리를 내줄 수 없다"며 권 대표가 자존심을 걸고 권리금과 월 임대료 조건을 2배 넘게 맞춰줬다는 것.
그러나 2010년 10월 3억여 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마친 지 6개월 만인 지난해 4월, 엔제리너스커피가 입점하기로 했으니 2012년 1월 31일까지 방을 빼달라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았다고.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트위터 및 인터넷 게시글에는 "결국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동네빵집이 밀린 것 아니냐"며 불만 섞인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리치몬드 홍대점 인근을 포함한 홍대상권은 현재 국내외 유명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총출동해 있다. 엔제리너스커피가 들어설 이 매장 바로 맞은편에는 카페베네와 커핀그루나루가 들어서 있으며 도보 1분 이내 거리에 스타벅스와 할리스커피가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리치몬드 홍대점 뒷쪽 건물에서는 CJ푸드빌 빕스가 근처 롯데시네마로 이전했고 해당 건물에는 롯데리아 T.G.I.프라이데이스가 최근 들어섰을 정도로 대기업 브랜드 간 자리싸움은 치열하다.
홍대 일대는 클럽문화의 발달로 젊은 층 유입이 많아지면서 상권전문가들은 신촌보다 홍대지역이 점차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주요 외식 브랜드들의 입점 경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대형 프랜차이즈에 밀린 것” 동정론 확산 “연매출 35억 기업이 무슨 동네 빵집?”
●대기업 베이커리 사업 철수에도… 최근 정부의 중소기업 적합품목 선정 이후 대기업들의 사업 자진 철수가 점차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베이커리 업계에서도 대기업들의 잇단 포기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삼성계열사인 호텔신라는 지난달 26일 경영위원회 회의를 거쳐 자회사 보나비가 운영하는 브랜드 아띠제의 커피·베이커리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어 31일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 장선윤 블리스 대표 역시 베이커리 사업을 전면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띠제는 삼성사옥과 삼성서울병원 등 삼성가에만 입점해 있고 블리스가 운영하는 포숑은 롯데백화점에만 고작 7군데 들어서 있는 게 전부. 이에 김서중 대한제과협회장(빵굼터 대표)은 "3000여 개점의 파리바게뜨와 1400여 점의 뚜레쥬르가 아닌 이상 이들(아띠제·포숑) 대기업의 베이커리 브랜드 철수는 동네빵집 살리는 것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기존 동네빵집을 찾아가 브랜드 변경을 강요, 협박하거나 매장을 우후죽순으로 확대하는 등 횡포를 일삼는 이상 리치몬드와 같은 동네빵집은 계속해서 무너질 것"이라고 비난했다.
서민 운영 파리바게뜨락 진짜 동네 빵집 세계적 거부 버핏의 제과점은 국내 상륙 채비
●동네빵집 정의 놓고 옥신각신 이에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리치몬드 홍대점의 철수는 동네빵집이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횡포에 밀려난 것이라기보다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추구하는 젊은 층이 많은 홍대상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계속 값비싼 제품만으로 소비자들을 기다렸기 때문"이라며 "프랜차이즈는 시장동향을 파악해 신제품을 연구개발하고 매일 신선한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시대적 대세가 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또 "좋은 상권에 자사 브랜드를 내고 싶은 건 당연한데 파리바게뜨에서 기존 개인 빵집 운영주에 브랜드 변경을 권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며 "동네빵집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연매출 35억 원을 올리며 100억 원대 본사 건물을 갖고 있는 리치몬드 과자점은 전설적인 명장의 성공한 기업인데 동네빵집이라고 주장한다면 일반 서민들이 운영하고 있는 전국 동네에서 영업 중인 파리바게뜨 가맹점들도 동네빵집 아니겠느냐"고 주장했다.
리치몬드 측은 "동네빵집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재료부터 점주가 직접 선정해 조달하고 생지 등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그 매장만의 독특한 맛을 낼 수 있는 매장이라고 단언한다"며 "전국 어딜 가도 똑같은 맛에 소비자들의 입맛을 길들이는 대형 프랜차이즈는 동네빵집이 될 수가 없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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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범 리치몬드 대표가 떼어간 문고리 흔적이 남겨진 매장 입구 | ●치솟는 임대료 건물주만 신나 리치몬드 홍대점 자리에 입점할 롯데리아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커피와 생황용품 전문점 다이소는 졸지에 30년지기 기존 단골 고객들에게 만큼은 본의 아니게 '미운털'이 박히게 됐다. 엔제리너스커피 측은 고의로 리치몬드를 밀어낸 게 아니라는 해명아닌 해명까지 하게 됐다.
이 같은 논란 속 결국 건물주가 이득을 보는 것은 자명하다. 통상 핵심 상권이 떠오르면 업계의 치열한 입점 경쟁 속 임대료가 치솟고 입점에 낙찰된 업계는 매장을 차리면서도 찝찝할 수밖에 없다. 어마어마한 임대료 이상의 수익을 내야 적자를 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대형 직영점이 아니고서야 일반 서민이 운영하는 가맹점은 입점을 꿈꿀 수도 없다. 이곳 홍대상권 일대는 수천 억 원대의 자산가들이 건물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기업 철수 속속 vs 해외 브랜드 입점 한편 골목상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정부의 권고에 따라 대기업들의 사업 철수도 속속 이어지고 있다.
범LG가의 아워홈은 브랜드 손수의 즉석식품인 순대 및 청국장 제품군을 철수하겠다고 26일 밝혔다. 이 제품군은 연매출 각 5000만 원선으로 그 동안 투자해온 최신 설비 및 영업에 대한 손실이 불가피하지만 아워홈 전체 매출(1조3000억 원)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을 공략한 가정편의식(HMR) 시장이 점차 큰 규모로 커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아쉬움도 크다. 현대차그룹도 계열사인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가 운영하던 ‘오젠’사업을 그만둔다고 지난달 27일 밝혔다.
이에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달 26일 성명을 내고 "삼성과 LG의 골목상권 철수는 대·중소기업간 실질적인 동반성장에 모범이 되는 의미 있는 사례가 될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며 "이번 철수가 골목상권을 잠식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에게도 귀감이 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분야로 확대돼 소상공인 및 서민의 생활 안정과 양극화 해소에 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환영했다.
반면 세계적 갑부 워렌 버핏이 운영하는 제과 전문점이 국내 입점해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버핏이 운영하는 버크셔해서웨이가 지분 100%를 가진 '시스 캔디즈(See‘s Candies)' 제과점이 최근 인천 송도 호텔 1층에 테스트 매장을 연 것. 초콜릿과 사탕을 판매하는 이 매장은 미국 내 230개점이 구축돼 있으며 연 8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한스텝은 3월 이후부터 국내 대도시 및 백화점에 매장을 오픈해갈 예정이며 커피를 함께 취급하는 카페형 매장으로 국내 시장을 개척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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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달차가 대기 중인 리치몬드 홍대점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이 얼음을 버리러 밖으로 나오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