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인터뷰

일본 최고의 장인

곡산 2011. 10. 31. 12:42

일본 최고의 장인 

쓰카코시 히로시 이나식품공업 대표

기업 이익이 아닌 사원 행복이 목적인 장인 기업
염동호  호세이대 겸임연구원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사태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머리 좋은 도요타가 자신의 꾀에 넘어갔다는 평가다. ‘마른 수건도 짠다’는 도요타의 효율성을 극찬하며 앞 다퉈 배워야 한다던 언론과 학자들은 원가 절감의 상징이던 와타나베 전 사장을 주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나친 욕심이 부른 자승자박이라며 말 바꾸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여전히 ‘이익’을 뒷전으로 하고 노골적으로 ‘사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업이 있다. 1958년 창업 이래 50년간 ‘증수증익(增收增益)’을 실현한 ‘한천(寒天)’ 제조업체 이나식품공업(伊那食品工業)이다. 국내시장 점유율 80%(세계시장 20%)에 매출액 170억 엔, 사원 397명, 자기자본 73%, 1000종류의 상품을 가진 중견강소기업이다. 전형적인 레드오션 한천을 공업용・식품용・의약품・화장품・개호식품(고령자를 위해 연하고 걸쭉하게 만든 식품) 등 다양한 분야의 잠재수요 개발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며 블루오션으로 생환시킨 이가 바로 쓰카코시 히로시(塚本寶・74)회장.
 
  “이익은 건강한 경영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그는 창업 이래 수많은 ‘고성장’의 기회를 물리치고 일부러 ‘저성장’을 택했다. ‘사원의 행복’을 위해서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래도 매일같이 신제품이 쏟아지고 매년 증수증익을 실현한다. 더욱 신기한 것은 거꾸로 가는 이 경영자에게 일본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한천 제조의 과학화와 환경 친화적 제조기법으로 1995년 과학기술장관상을 수상한 데 이어 각종 경제단체로부터 우수경영자상, 환경경영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런가 하면 도요타, 로손, 니혼생명, 히타치전선, 리츠칼튼 호텔 등의 사찰단이 줄을 잇고 있다. 평균 경상이익률 10%, 창업 이래 연평균 성장률은 5~10%, 직원만족도 100%, 지역만족도 100%, 연구개발비 10%라는 경이적인 경영성과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비결을 ‘인간중심 나이테경영’라고 설명한다.
 
  “풍파를 견디고 해를 더해가면서 하나의 나이테가 생기듯 자연을 역행하지 않고 서서히 성장해갑니다. 무리한 성장은 사원이나 협력업체의 착취를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지요.”
 
  도쿄에서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5시간여 만에 도착한, 나가노현 이나시(伊那市)에 자리한 본사 공장은 산속인데도 바다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하다. 한천의 재료인 해조가 가득 쌓여 있어서일까. 10만㎡에 달하는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 이나식품공업 본사 부지는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연간 3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곳은 계절마다 피어나는 각종 꽃과 야생초로 가득하고, 곳곳에 마련된 휴식공간이 마치 커다란 자연공원을 방불케 한다.
 
  한천은 원래 추운지방에서 농한기인 겨울에 생산되는 계절성 상품으로 사양산업이었다. 원재료 조달이 어렵고 일기에 따른 작황 변동이 가격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시세상품이기 때문. 1960년대 40여 사에서 현재 6개 사로 감소한 상태다.
 
  “그런 한천을 블루오션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던 비결은 사원을 존중하고, 사원들과 소통하고자 한 노력에 있었습니다.”
 
다양한 한천 요리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식품회사를 강소기업으로
 
  집무실보다 식당에서 사원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사원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같은 기업이 이만한 경영성과를 만들어내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의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2학년 때 뜻하지 않은 폐결핵으로 3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투병생활 끝에 간신히 취직한 곳이 이나식품공업의 모회사인 목재회사였다. 입사 1년 6개월 후 ‘경영재건’이라는 특명을 받고 부임한 곳이 바로 거액의 부채를 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자회사 이나식품공업이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장대행으로 부임했지만 10여 명의 직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한천의 ‘한’자도 모르는 문외한의 말을 어느 장인이 들으려 했겠어요?”라며 웃는다.
 
  당시 생산설비는 조그만 모터가 달린 기계 네 대가 전부였다. 만성 적자에 인재도 없고, 기술도 없고, 돈도 없었다. 마이너스에서 시작된 재건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화학서적, 다른 한 손에는 회계장부를 들고 낮에는 영업, 밤에는 한천과 설비연구에 혼신을 다했다. 수면 부족 때문에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다. 어린 사장의 헌신적인 노력은 무뚝뚝한 장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장인들과 의기투합하면서 분말 한천의 상용화에 성공했다. 제때에 사원들의 월급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경영상태가 회복됐다. 그는 다음 단계로 한천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에 나섰다. 해외로 눈을 돌려 가깝게는 한국의 제주도, 멀리는 남미, 지중해 등 세계 3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원료를 들여올 곳을 개척했다.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 이루어지자 그의 눈길은 사원들에게로 돌려졌다. 매서운 나가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해준 사원들이 고마웠다. 이들의 노동을 덜고 손발을 덜 시리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기계화에 착수했다.
 
  “한천제조 특성상 냉기 속에서 작업하는 게 많은데, 그것을 사람의 손으로 하면 겨울철에도 내내 찬물 속에 손과 발을 담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기계화를 추진하기로 한 건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당시 연간 매출액의 절반을 들여야 했거든요.”
 
  그의 사원 사랑은 남다르다. 아무리 주문이 밀려도 야간근무를 시키지 않았고, 모든 사원들을 정사원으로 채용했다.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 근무를 활용하면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지만, 사내 위화감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 1998년부터는 경상이익이 전기 대비 5% 이상 신장할 경우 3분의 1을 사원에게 환원하고 있다. 사원 복지제도는 사내 예금제도와 무이자 융자제도 등 항목만 적어도 3~4페이지가 꽉 찬다. 어린이나 취학 아동이 있는 사원은 전근을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필자에게 회사의 보물 1호를 보여주겠노라며 금고 앞으로 안내했다. 특이한 원천기술이나 비밀장부이겠거니 했다. 아니었다. 두꺼운 금고를 열더니 여러 권의 앨범을 펼쳐 보이며 사원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원들의 모습을 담은 앨범이었다. 이 회사는 종신고용이기 때문에 65세 정년이 되어도 희망자는 자회사인 ‘파파나 농원’에 재취직할 수 있다.
 
  “최대한 일터를 제공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기업의 사명이기 때문이지요. 기업들이 인건비를 고정비라 생각하는데, 인건비는 비용이 아니라 기업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법인 이익을 낮춰 법인세를 줄이고 월급을 많이 줘서 소득세를 더 많이 내도록 노력합니다.”
 
  그의 나이테 경영에는 몇 가지 룰이 있다. 먼저 연구 개발인력을 사원의 10% 이상으로 유지한다. 다음으로 분수경영을 한다. 즉 품질을 중시하고 급성장을 멀리한다. 한 예로 1981년 80℃의 물만 부으면 제품이 완성되는 ‘컵 젤리 80℃’라는 제품을 내놨을 때 거대 슈퍼 체인에서 전국 판매를 제안해왔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급성장은 안정 성장을 저해하고 품질 저하와 노동력 착취를 낳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글쓴이 염동호 님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호이세대 겸임 연구원으로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시스템 개혁》 (일본서적・편저), 《괴짜 경제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