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에 교향곡을, 열두 살에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해 불과 서른다섯 해를 살면서 626개의 번호 붙은 작품을 비롯해 거의 1000여곡을 남긴 천재. 기악과 성악, 종교음악과 오페라를 불문하고 클래식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이룩한 빛나는 성과.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 산골 마을 잘츠부르크를 1920년 제1회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현대음악 축제의 발상지로 만들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람객과 최정상의 아티스트를 불러모으는 매력. 심지어는 ‘모차르트 효과’ 학설까지 만들어낸 작곡가.
과연 모차르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유목민 정신’과 ‘블루오션의 개척’이다. 그는 당시에 쉽지 않던 순회 연주여행을 통해 어릴 때부터 유럽의 음악적인 특징과 성과를 한몸에 익힐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개발하고 다져놓았다. 모차르트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인 것만은 아니며, 18세기 후반 유럽에 만연한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계몽의 물결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 장차 도래할 독일 낭만주의의 시대를 개척한 준비된 음악가였다.
교회나 절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향후 작곡가들이 일하는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빈에 자리잡았던 만년(1781~1791)에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고, 사적·공적 ‘아카데미’(예약 음악회)와 위촉에 의한 것이거나 흥행을 위한 작곡 등에 의해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적절한 관용을 통해 피지배 세력의 반감을 완화시키려 했던 지배계급은 증가하는 오락과 문화 수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곧 프리랜서 작곡가가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시켰고, 모차르트는 그 초기에 가능성을 시험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 첫 수혜자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노마드(nomad)’ 모차르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의 유목민 정신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교육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선배인 바흐가 평생 독일 중부의 안할트 작센 지방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나, 헨델이 주군(主君)의 명을 어기고 영국에 머물다가 뒷날 그가 영국의 조지 1세가 되자 화(禍)를 면하기 위해 ‘수상 음악’을 작곡했다는 등의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 이들은 온 유럽의 수도를 자신의 안방처럼 드나들던 이탈리아 음악가들과는 사뭇 다른 처지였다.
그러나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시골에서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한 레오폴트의 신념과 음악을 좋아하고 너그러운 성품이던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백작의 배려로 어린 볼프강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연주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에 시작된 여행은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요즘이라도 좀처럼 꿈꿀 수 없는 다채롭고 강도 높은 것이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영혼을 깨운 이탈리아 여행
부자(父子)는 1762년 뮌헨과 빈을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3년 간의 장정(長征)을 시작한다. 이때 지나간 도시는 다음과 같다.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슈베칭겐, 프랑크푸르트(괴테와의 유일한 만남), 브뤼셀, 파리, 런던(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교류), 겐트, 로테르담, 리옹,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어, 울름 등.
이 초기여행은 흔히 곡마단 원숭이의 공연에 비유되며 뒷날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들의 돈벌이 행각을 잇따르게 했다.(그 최대 희생자는 곧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다.) 단순히 베르사유나 쇤부른과 같은 유럽 최고의 궁전과 드높고 웅장한 교회를 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이동 중에 마차 창 밖으로 보았을 천혜의 자연과 계절의 변화, 기착지마다 겪었을 다양한 서민의 인생사는 음악 이면(裏面)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의 성과가 어린 모차르트의 감수성에 얼마나 심대하게 작용했을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하물며 각국의 언어 습득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모차르트의 진정한 음악교육은 괴테가 그랬듯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1768년 빈을 방문해 첫 오페라인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을 작곡했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잠시 머문 모차르트 부자는 첫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밀라노에서 만난 작곡가 잠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神父)에게 최첨단 음악을 전수받는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어린 모차르트는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K87), ‘알바의 아스카니오’(K111), ‘루치오 실라’(K135)를 차례로 작곡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오페라의 종주국에서 배운 것을 체화(體化)한다.
유목민 모차르트의 청년기를 결산하는 마지막 수업 여행은 1777년에 이루어진다. 이때는 그 전까지 남편과 아이들(볼프강과 그의 누이 난네를)을 떠나보내고 ‘기러기 엄마’ 처지로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던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가 동행한다. 어머니와 함께 떠난 모차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보유한 독일 만하임 궁전을 방문해 그곳 음악가들과 교류한다. 이어 파리를 찾은 모차르트는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심대한 시련인 모친의 사망을 맞게 된다.
상심하여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음악에 대한 이해도, 인정머리도 없는 새 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임명장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하고 하인처럼 부린다. 예속 예술가로서 겪게 되는 모멸감의 시작이었다.
모차르트를 ‘한때 잘츠부르크에 살던 반짝한 작곡가’가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클래식 음악의 아이콘’으로 만든 계기는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K366)의 작곡이다. 뮌헨의 사육제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한 이 작품은 그곳을 방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귀족 판 스비텐 남작의 눈에 띈다.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남작의 추천과 주교를 견제하려는 계몽군주 요제프 2세의 뜻이 맞아떨어져 모차르트는 마침내 고향을 떠나 빈에 정착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은 이 1781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791년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영구(永久)한 음악의 수도로 발돋움하게 된다.
유랑의 연속, 유럽음악의 총결산
이토록 모차르트의 인생은 잠시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유랑의 연속이었고, 그의 작품은 당대 유럽이 이룩한 다양한 시도의 총결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재가 시대의 반영이라 해도 ‘그때 그곳’에 모차르트가 없었더라면 베토벤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모습도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통합자로서 모차르트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모차르트가 진입한 ‘블루오션’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왜 현대 작곡가는 모차르트처럼 곡을 쓰지 않는 거야?”라고 말할 만큼 그의 작품은 동서양 연령층을 불문하고 쉽고 기분좋게 이해된다. 그러나 오늘날 귀를 즐겁게만 하는 모차르트의 곡들도 작곡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18세기 무렵 독일 대부분 궁정악단의 요직은 이탈리아 음악가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알프스산맥 이남(以南)의 것이 진정 선구적인 것이고 귀감으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심지어 레오폴트 모차르트조차 그토록 꿈꾸던 악장직(職)을 평생 이탈리아 연주자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어쩌면 그가 신동인 아들을 데리고 평생 떠돌았던 것도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좌절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토록 유럽 전역을 주름잡은 이탈리아 작곡가들도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모차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차르트의 유랑 정신이 진정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수업여행을 통해 얻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의 앞선 양식과 형식에 독일 정신을 접목했다는 점이다. 독일은 오랜 세월 문화지체에 빠져있었지만, 18세기 중반에 들어 문예사조 전반에 걸쳐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레싱과 헤르더에 이어 젊은 괴테가 눈을 뜨던 시기다. 모차르트는 유럽 음악계에서 미개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독일의 정신과 가치를 부각시킨 진정한 유목민인 것이다. 그러면 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모차르트는 자신이 배워온 신문물을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장르 자체에 혁신을 꾀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교향곡은 연주회나 오페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보조수단이 아닌 진정한 예술적 실체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바겐자일, 반할 등이 시도했던 바로크 양식과 소나타 형식의 결합을 적극 받아들여, 교향곡의 3악장 미뉴에트(minuet, 4분의3 박자의 춤곡)에 트리오를 삽입한 4악장으로 구성을 확립했고, 오보에와 호른 외에 플루트와 바순, 트럼펫과 팀파니를 편성에 추가했다. 무엇보다 하이든의 단조 교향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모차르트의 표현의 깊이를 말할 수 없이 깊게 만들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작곡한 교향곡은 모두 여섯 편으로, 피날레를 향해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건축적이고 조화로운 양식은 진정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 덕분에 향후 독일의 교향곡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어느 작곡가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루지 못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모차르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각 가정과 살롱, 음악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기를 살았다. 이전의 쳄발로에 비해 풍부한 셈여림의 표현이 가능해졌고, 소나타 양식을 구현하고 명인기(名人技)를 가진 연주자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악기가 곧 피아노이며, 모차르트는 평생 이 악기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그가 남긴 30여편(다른 사람 곡의 편곡 포함)의 피아노 협주곡은 독주 피아노와 관현악이 긴장과 융합을 거듭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대 교향악적인 협주곡의 모태가 된다. 바로크 시대 빠른 두 악장 사이의 경과구 역할에 그쳤던 느린 악장을 중요시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2악장 ‘로망스’나 영화 ‘엘비라 마디간’으로 유명한 21번의 2악장 등은 가깝게는 베토벤, 멀리는 말러의 느린 악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피아노 협주곡에 등장하는 관악 합주(하르모니무지크)는 당시 빈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의 오페라 속 등장인물들이 엮어 내는 앙상블과 같이 아기자기하다.
미지의 시장 ‘국민 오페라’ 개척
무엇보다 모차르트가 개척한 새로운 블루오션은 ‘국민 오페라’라는 미지의 시장이었다. 그는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 음악이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진정 새로운 독일의 양식을 심고자 노력했다. 과거 신화와 영웅이 대부분이던 오페라의 소재는 그에 의해 시민사회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장황한 아리아와 형식적인 레치타티보(오페라에서 대사로 이뤄진 부분)가 주(主)를 이루던 음악은 중창으로 된 앙상블의 확대로 재편되었다.
실내악에 남긴 업적 또한 괄목할 만하다. 모차르트는 드물게 현악 5중주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여섯 편의 현악 5중주는 1번을 제외한 모두가 빈 시절에 씌어졌다. 모차르트는 이 영역에서 125개의 현악 5중주를 남긴 보케리니를 모델로 삼았다. 그와 다른 점은 편성에 있어 첼로가 아닌 비올라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악 4중주에서 시도된 선율의 응집력과 유연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 장르의 가치는 베토벤도 아닌 슈베르트의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다시 평가되니 모차르트의 앞선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남긴 스물세 편의 현악 4중주 중 빈에 정착한 뒤 남긴 열 곡은 궁핍한 생활 속에 씌어진 보석 같은 예술이다. 특히 하이든의 Op33을 듣고 감동해 작곡했고, 그에게 헌정된 ‘하이든 사중주’ 전6곡은 고전주의 소나타 양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하이든은 이 곡을 들은 뒤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전한다.
“성실한 인간으로 신 앞에서 맹세코 말하지만 당신의 자식은 제가 직접, 또는 평판으로만 알고 있는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훌륭한 감각과 매우 뛰어난 작곡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뻘되는 하이든과 나눈 우정은 모차르트의 인생 속에서 무척 예외적인 요인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의 자신감은 당대 많은 평범한 예술가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공(公)의 악장으로 매여 있었던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모차르트는 그가 간 길이 대부분 처음이 되었던 프리랜서 예술가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무시한 철부지 어린애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당시 유럽 상류층에 파고들었던 프리메이슨 결사의 일원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세 석공(石工)들의 모임에서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모임이 일설처럼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독립 등의 산파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모차르트가 이 결사에 가입해 승격을 위한 관문을 거쳤음은 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직인(職人, Gesell)’의 모임인 ‘사회(Gesellschaft)’라는 오케스트라 속에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만년의 오페라인 ‘마술피리’에 잘 녹아 있다.
통과의례를 통해 성숙한 시민이 되고자 했던 모차르트에게 시대는 너무 가혹했던가? 궁핍한 프리랜서의 삶으로 일관하다 비참하게 가버린 천재. 빈에서의 10년이 조금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기대감은 훗날 베토벤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1792~1868)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위장한 모차르트가 뒤에서 조종한 꼭두각시였을지 모른다는 그럴 듯한 픽션을 낳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토록 모차르트는 19세기에 만개할 모든 음악 장르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또한 전속의 개념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예술적 충동에 생계를 맡긴 최초의 예술가였다. 모차르트는 그의 듣기 편한 음악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가도 그 예술의 가치가 마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이다. 2006년 그의 탄생 250주년이 가고 나면, 오래지 않아 2020년 잘츠부르크 축제 100주년이 또 한번 그를 기리고 찬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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