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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2008 재계인물 김승연 한화 회장

곡산 2008. 12. 5. 23:50

[인물탐구] 2008 재계인물 김승연 한화 회장

일요신문 | 기사입력 2008.12.05 16:30



벌써 12월, 2008년이 해넘이를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폭탄'을 맞아 그 어느 해보다 어수선한 재계에서 올해의 인물을 뽑으라면 누가 될까. 단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아닐까. 그룹의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최약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 김승연 회장

이명박 대통령과 만난 김승연 회장. 아래는 지난 연말 꽃동네에서 봉사하는 모습.

여기엔 김 회장의 강력한 인수 의지가 원동력이었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 때문에 최근 김 회장은 그 어떤 대기업 총수보다도 자주 언론에 등장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보복폭행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홍역을 치렀던 김 회장으로서는 기분 좋은 스포트라이트가 아닐 수 없다. 허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2008년 마지막 달을 맞으며 김승연 회장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의 향후 행보를 전망했다.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온 힘을 다하겠다."
지난 4월 김승연 회장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전 참여를 공식 발표하면서 던진 출사표다. 김 회장의 결정에 대한 재계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못해 냉소적이었다. 오랜 기간 인수를 준비해 온 포스코 GS 등 경쟁사에 비해 '절대 열세'라는 평가였기 때문. 하지만 김 회장은 6개월에 걸친 인수전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올해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온 매물 중 최대어로 꼽혔던 대우조선해양을 거머쥐었다.

김 회장에게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대어를 먹었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지난해 보복폭행 사건의 치욕을 털고 일어나 화려하게 부활했기 때문이다. 차남 동원 씨가 북창동 유흥주점 종업원에게 폭행을 당하자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보복했던 이 사건으로 김 회장은 계열사 이사직에서 물러나고 외유 길에 오르는 등 절치부심해왔기 때문이다.

한화가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제치고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김 회장 특유의 M&A 전략 때문'이라는 평가가 대세다. 사실 김 회장은 그동안 출사표를 던진 M&A에서 한 차례도 실패한 적이 없다.

M&A에서 보여준 김 회장의 '승부사 기질'은 지난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인수할 때부터 발휘됐다. 당시 김 회장은 부친(고 김종희 창업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0대 그룹 사상 최연소 나이인 29세에 회장직에 취임한 지 불과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김 회장의 한양화학 인수를 재계에서는 '젊은 총수의 호기'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오일쇼크로 인해 석유화학 경기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룹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 일색이었다. 이러한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은 인수를 밀어붙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재 한화석유화학은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했다.

한양화학 인수 후에도 김 회장은 경인에너지(현 SK에너지)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정아그룹(현 한화리조트)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그룹의 덩치를 키워나갔다. 김 회장 취임 당시 7300억 원가량이던 매출액은 1984년 2조 원을 돌파했고 그 규모는 매년 늘어났다. 많은 재벌2세들이 수성에 급급한 나머지 도태됐던 것과는 달리 적극적인 사업 확장으로 재계 지형을 바꿔놓은 것이다. 자연스레 '20대 젊은 총수'를 바라보는 근심 어린 시선도 사라졌다. 김 회장은 취임 10주년이던 1992년 그룹 이름을 한국화약에서 한화로 바꾸며 세대교체를 마무리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았음에도 김 회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재계 일각에서는 한화가의 '혼맥'에서 찾기도 한다. 김 회장은 1982년, 5공 시절 중앙정보부 차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서정화 전 의원의 딸 서영민 씨와 결혼했다. 당시 중매는 백두진 국회의장의 부인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의 누나 김영혜 씨는 5공 실세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인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과 결혼했다. 또한 김 회장 선친도 정권 실세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이러한 인맥이 김 회장에게 몰아친 외풍을 막아 주는 병풍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도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고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기업인수 등으로 인해 부채가 많았던 한화는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한화의 자산 규모는 12조 원이었는데 부채는 8조 원에 달했다. 그러자 금융기관들은 앞 다퉈 여신을 회수해갔고 그룹은 부도위기로 몰렸다.

김 회장은 위기의 돌파구로 강력한 구조조정을 선택했다. 계열사의 매각과 분리를 통해 체질을 개선하며 중구 장교동 그룹 본사 빌딩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김 회장은 경영권 포기각서를 쓰고 집문서를 담보로 돈을 빌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김 회장은 "수천억 원짜리 회사를 팔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하고 발에 물집이 터질 정도로 뛰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결과 1000%를 넘겼던 부채는 200%로 내려갔고 그룹의 자금줄은 숨통이 트였다. 이로 인해 김 회장은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또 다른 애칭을 얻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를 두고 '가슴 아픈 별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주관한 구조조정 모범 기업인 초청모임에서도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을 지키지 못해 고통스러웠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후 한동안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던 김 회장은 2000년부터 다시 사업 확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화기술금융대덕테크노벨리를 설립하며 몸을 푼 김 회장은 2002년에 그의 '전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M&A에 뛰어들었다. 대상은 다름 아닌 대한생명. 이번에도 반대 여론은 빗발쳤다. 적자에 허덕이며 부실덩어리로 낙인찍힌 대한생명을 인수할 경우 제2의 IMF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 회장은 오히려 입찰의향서를 직접 금융감독원에 제출하는 등 인수를 서둘렀고 대한생명을 품에 안았다. 김 회장은 누적 적자가 2조 3000억 원이던 대한생명을 3년 만에 흑자로 바꾸는 데 성공, 금융업을 그룹의 성장 축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현실화했다. 현재 한화에서 대한생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50%가 넘는다.

하지만 김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의 후유증을 톡톡히 치렀다. 인수전에서 불거진 로비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해외로 도피하기도 했고, 한화의 승소로 끝나기는 했지만 예금보험공사와 법정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이밖에도 김 회장은 여러 차례 수사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아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1993년에는 외화를 빼돌려 미국에 호화주택을 구입했다가 구속됐는가 하면 2003년에는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불법 정치자금 10억 원을 건넨 혐의가 드러나 불구속 기소돼 벌금 3000만 원을 물었다. 지난해 김 회장은 보복폭행 사건으로 재벌 회장들 중 최초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 보복폭행 사건으로 김 회장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선고받았다. 올해 들어 김 회장은 사임했던 이사직에 복귀하고 지난 광복절에는 사면도 받았다.

김 회장의 경영 활동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도 엇갈린다. '의리경영'이라는 독특한 경영 신념이 오늘날 한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권위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의리경영과 관련한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는 '야구 명장' 김인식 한화야구단 감독 관련 일화 한 토막. 김 감독이 건강 악화로 해임 위기에 몰리자 김 회장은 "김 감독이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 약속했고, 김 감독은 그 해 팀을 4강에 올려놨을 뿐 아니라 WBC에서도 4강에 오르며 김 회장의 기대에 부응했다.

반면 권위적인 모습의 대표적인 것이 경호다. 전경련 행사에서 가장 많은 경호원을 데리고 오는 대기업 총수는 다름 아닌 김 회장이라고 한다. 김 회장의 경호에 대한 논란이 일자 회사의 한 관계자는 "그룹 내에서 자리를 걸지 않고서는 경호에 대해 말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김 회장은 아랫사람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 대해 '황제 경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회장이 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어린 나이에 총수에 오른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젊은 회장이 나이 많은 임원들을 상대로 그룹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카리스마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 임원이 김 회장 앞에서 무심코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어디서 담배를 피우느냐"는 김 회장의 호통을 듣고 다음날 사표를 썼다는 일화도 세간에 떠돌고 있다. 김 회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올백' 헤어스타일도 실제보다 나이를 들어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극과 극의 평가 속에서 어찌됐건 김 회장은 한화를 재계서열 10위(공기업 및 민영화된 공기업 제외)의 대기업 반열에 올려놨다. 하지만 여기에 김 회장이 만족할 것 같지는 않다. 대한생명을 인수할 당시만 해도 재계 순위가 5위까지 치솟았으나 한동안 사업 확장을 자제하면서 다른 기업들에 순위가 밀린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김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성공하면서 재계서열을 8위로 끌어올린 상태다.

재계에서는 과거 김 회장이 보여준 M&A 실력을 감안했을 때 앞으로 한화의 재계 순위는 더욱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우조선해양 인수의 성공적인 마무리가 전제돼야 한다. 본계약을 앞두고 있는 지금 한화는 대우조선해양노동조합(위원장 최창식)의 반대에 부딪혀 정밀실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금융위기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돈을 빌려주기로 했던 투자자들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올해 박삼구 회장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겪었던 M&A 후유증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정치권 일각에서 대한생명 인수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는 것도 김 회장으로서는 근심거리다. 김 회장도 이러한 우려들을 알고 있는 듯 임직원들에게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절박한 심정으로 위기에 대한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래된 미국통으로 공화·민주 양 정치세력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김 회장은 최근 '오바마 라인'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김 회장은 오바마 당선의 일등공신 중 한 명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다수의 민주당 유력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 당선자와의 채널 찾기에 분주한 가운데 양국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할 인물로 김 회장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도 '오바마 시대'를 맞이한 미국과의 경제 교류에 김 회장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올 한 해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사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김 회장의 향후 행보에 더욱 시선이 쏠리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