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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0호][600호 기획특집]초심 까먹은 총수들의 ‘이유있는 몰락’

곡산 2008. 10. 22. 08:27

[제600호][600호 기획특집]초심 까먹은 총수들의 ‘이유있는 몰락’
| 2007·07·10 01:52 |
사업가는 사업을 시작할 당시의 초심을 잃어서도, 버려서도 안 된다. 초심은 미래를 결정할 ‘원초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뜨거나 뜬 위치에 있다 해도 초심을 잃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는 1990년대 <일요시사>가 태동한 시기부터 이번 지령 600호까지 국내 재계의 순위 변동을 보면 알 수 있다.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옛말이 딱 맞아 떨어진다. 3대는커녕 아버지에 물려받은 지휘봉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수장들도 있다. 산업트렌드가 급변한 데다 IMF 파고를 넘지 못한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초심을 잃은 총수들의 비도덕한 행위로 기업이 몰락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망한 이유를 모른다. 그저 ‘남탓’만 할 뿐이다. <일요시사>는 지령 600호를 맞아 그동안 본지에 오르내린 문제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미 몰락한 총수들의 ‘초심 상실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처음처럼만 했어도 공룡처럼 멸종만은…

‘뜨는 별’이 있으면 분명 ‘지는 별’도 있기 마련이다. 부호 간 물고 물리는 ‘경제 정글’에서 이 원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이자 질서이기도 하다. 이름조차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재벌들이 6·25전쟁 이후 반세기를 넘기면서 몰락했고, 특히 1990년대 IMF 시련 등 극심한 격랑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실제 재계에 따르면 1991년 1백대 부호 기업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업은 20여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국내 유수의 재벌들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처절하게 쓰러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더들이 초심을 잃은 탓이다. 시대 상황상 정치적 배경 등도 대외적인 경영악화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비리 등 총수 개인적인 부도덕성으로 인한 자멸은 ‘초심과 성과의 함수관계’를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재계 관계자는 “재벌들의 흥망성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총수 개인의 부조리로 기업이 무너진 경우가 많다”며 “이는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서도 총수 자리에 오를 당시의 초심을 잃고 본분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이다. 국세청이 발표한 ‘1991년도 1백대 납세자 리스트’를 보면 당시 종합소득세 납부 1위는 안 전 회장이다. 그는 신고소득 47억원, 납세액 23억원으로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부호들을 제쳤다.
그러나 15여년이 지난 뒤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어디에서도 이제 안 전 회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독단적인 경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안 전 회장은 전남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10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지역명인 ‘나산’을 그대로 기업명에 사용했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18세 때 무작정 상경한 그는 공사장 잡부, 영화 엑스트라, 식당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자금을 모아 요식업을 시작한 안 전 회장은 우연히 패션사업을 접하게 됐고 1984년 나산그룹을 설립, 1990년대 신흥재벌로 등극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열정과 의지를 패션사업에 ‘올인’했다. 주변인들은 안 전 회장에 대해 “패션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진득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그는 1991년 나산종합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1994년엔 나산유통을 세워 유통업에도 손을 뻗쳤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안 전 회장은 1994∼2000년 부도난 ㈜나산의 자금 40억원을 차명계좌로 빼돌리는 등 회삿돈 2백90억원을 횡령하고 나산유통 등 계열사나 자신 명의로 시행하는 공사 등에 대여·미수금 형식으로 2천3백59억원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지난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상태다. 나산그룹 전 관계자는 “나산그룹의 몰락은 안 전 회장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며 “건설·유통업에만 뛰어들지 않았어도 현재 국내 최고의 패션기업이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과 김의철 전 뉴코아 회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 전 회장 역시 18세인 1962년 무작정 상경해 막노동, 야채행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1990년대 재벌로 등극했지만, 1998년 한남투신을 인수한 뒤 2천9백45억여원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구속, 1심에서 징역 2년6월이 선고됐으나 지병 때문에 법정구속은 면했다. 1995년 킴스클럽이라는 상호로 할인점사업에 진출한 김 전 회장은 1997년 18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전국적으로 백화점 15개, 킴스클럽 16개 등을 운영하는 중견재벌로 성장했지만, 1994∼1996년 뉴코아 가짜 회계장부로 2천8백65억원을 사기대출받고, 1992∼1998년 회삿돈 26억원을 횡령해 지난 5월 유죄가 확정됐다.
1980∼1990년대 삼성, 현대, LG, SK 등 ‘빅4’와 더불어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한보그룹도 총수의 야망 때문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다름 아닌 세무공무원 출신이다. 그만큼 경영일선에서 투명성과 신뢰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1969년 45세 때 서울 북부세무서 주사를 끝으로 23년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52세라는 적잖은 나이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점술가의 점괘에 따라 1973년 건설업체인 한보상사를 설립한 뒤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시작으로 급속히 사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정 전 회장은 1990년대 들어 ‘수서 사건’과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등 초대형 사건이 터질 때 마다 번번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특히 1997년 한보철강 부도는 국가경제를 뒤흔드는 초대형 핵폭풍으로 비화됐고, 수개월 뒤 IMF사태를 불러오는 전조로도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세무공무원 출신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3년째 국세 체납액(2천1백27억원) 1위를 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총수로 인해 기업의 흥망이 판가름 난 곳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대우그룹이다. 6·25 전쟁 중 신문팔이로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고학으로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를 나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31세 때인 1967년 5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대우실업을 세워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우그룹은 1980년대 기계·자동차·조선 등 중화학 공업뿐만 아니라 전자·통신 사업에 새로 진출함으로써 국내 최대재벌로 급성장했다. 나아가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세계경영’을 기치로 활발한 해외투자를 벌여 한때 재계 3위까지 올랐다.
문제는 김 회장의 ‘황제 경영’이었다. 대우그룹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총수 중심의 경영시스템이 꼽히고 있는 것. 대우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오직 김 전 회장의 몫이었다. 실무진에서 무모하다는 반대의견이 나와도 김 전 회장의 ‘OK 사인’하나면 모든 것이 통했다. 이자를 갚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차입금을 떠안고도 서슴없이 확장경영에 나선 것도 이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IMF 능선은 넘지 못했다. 1999년 대우그룹 부도 이후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등으로 검찰의 수사 압박을 받자 해외로 도피했고, ‘주인 없는 집’은 공중분해가 되다시피 뿔뿔이 흩어졌다. 김 전 회장이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고 외친 구호가 “세계는 넓고 숨을 곳도 많다”로 퇴색된 셈이다. 2005년 6월까지 5년8개월간의 해외 도피생활을 끝낸 그는 곧바로 구속돼 지난해 11월 징역 8년6개월에 추징금 17조9천여억원의 형이 확정됐다. 현재 김 전 회장은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심혈관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동아그룹도 총수로 인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케이스다. 1970년대 중동건설 붐을 일으키면서 고속성장한 동아건설은 1980년대 현대건설에 이어 도급 순위 2위의 ‘건설명가’ 반열에 올랐고, 1990년대 초엔 리비아 대수로 신화를 일궈내며 현대건설, 대우건설과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독단적 ‘황제 경영’실패 자초 “총수 개인 욕심이 부른 화근”
1990년대 1백대 부호 ‘생존’ 20여명 불과…나머지 ‘와르르


그러나 동아그룹은 IMF를 맞아 무리한 차입경영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채 부도를 냈다. 1995년 최원석 전 회장이 지배력 확대를 위해 자본잠식 상태였던 계열사 동아생명에 대한 유상증자로 회사에 손실을 입힌 게 치명타였다. 최 전 회장은 1998년 그룹이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경영권을 포기했지만, 부도 직후인 1998년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과거 분식회계를 통한 불법 사기대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1996년 계열사인 대한통운에 동아생명 실권주 1백여만주 인수대금 4백90억여원을 지급케 한 사건과 1988∼1997년 동아그룹 계열사에 9천2백억여원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사건이 병합돼 200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으나 대법원에서 일부 배임혐의가 파기환송돼 서울고법에 계류 중 보석석방됐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최성모 전 회장에 이어 1976년 부임한 최 전 회장은 초기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의욕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보유계약액 1조원 달성(1979년), 63빌딩 건설(1985년), 총자산 1조 달성(1986년) 등이 그 성과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신동아그룹에 서서히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최 전 회장이 저지른 수천억원의 계열사에 대한 부당대출과 외화 밀반출 등이 탄로난 것. 이같은 혐의로 최 전 회장은 구속됐고, 1999년 그룹은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해체됐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경영을 잘못 해서 망한 게 아니라, ‘정치탄압’으로 망했다”는 항변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밖에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등도 횡령이나 배임·분식회계 등으로 기업이 주저앉은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이 장수하기 위해선 성공에 대한 초심을 지키고 자만심은 버려야 한다”며 “‘CEO 한 명이 수만명이 소속된 대기업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대로 대기업 오너와 임직원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끊임없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초심을 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때 재계를 호령하다 초심을 잃어 일장춘몽으로 강제퇴장당한 재계의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같이 여전히 사업에 대한 열정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근황만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여기저기서 꿈틀대고 있는 이들이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김성수 기자/kimss@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