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카카오 생산지의 변천과 확대-초콜릿의 발전과 역사②

곡산 2008. 2. 5. 21:32
카카오 생산지의 변천과 확대-초콜릿의 발전과 역사②



국제제과협회(International Confectionery Association)에 의하면 2002-2003년 기준으로 연간 1인당 초콜릿 소비량은 우리나라가 약 0.9kg, 일본이 2.1kg이며, 미국은 5.3kg이다.

반면, 유럽 각국은 최소 미국 수준 이상이며, 벨기에와 스위스는 각각 10. 1kg 및 11.3kg이나 된다. 이는 유럽인들에게 ‘신들의 음식’인 초콜릿이 사회, 종교, 문화, 의학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언제부터 초콜릿을 알게 되었을까?

서기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다시 1502년에는 세 번째 항해를 하였는데, 이 때 유카탄 반도 부근에서 큰 갤리선 크기(약 40~50m)의 마야 상인의 대형카누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카누 안에는 카카오 열매가 가득 있었고, 이를 스페인에 가져왔는데, 이것이 카카오가 유럽에 전래된 최초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초콜릿을 먹어보지 못했으며, 그 용도나 가치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금전적 가치와 이의 이용은 그 후 스페인 귀족 코르테스(Hernando Cortez)에 의해서 였다. 그는 1519년 유카탄 반도로부터 내륙 아스텍을 공략하고 아스텍의 당시 수장 몬테수마(Montezuma) 2세와 교섭에 들어 갔으며, 결국 1521년에 아스텍을 정복한다.

이 때, 많은 재산이 스페인 왕 칼 5세에게 보내졌는데, 이 중에는 카카오 열매도 들어 있었다. 특히, 코르테스는 이 카카오 음료에 감미를 가해서 전파한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카카오 콩이 스페인에 도입된 16세기 당시는 스페인의 왕족, 귀족, 부호 간에만 이용되어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상류사회에서만 독점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이외의 유럽 각국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 후 네덜란드의 해적선이 스페인의 화물을 탈취해 자국으로 가져가 네덜란드에 카카오 콩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 1606년에는 이탈리아의 카를레티(Antonio Carletti)가 카카오 콩을 이탈리아 본국에 소개하게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 왕실의 정략 결혼에 의해 프랑스에도 도입되는 등 약 100년의 사이에 전 유럽에 유행되었다.

한편, 카카오 열매의 가치와 이용 및 소비증대에 따라 1521년 이전까지는 중남미 이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카카오 나무가 점차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1660년에 프랑스가 서인도제도의 한 섬에 재배한 것을 계기로 중남미 각지에 이식되었다. 동양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앞서 1560년에 스페인 인에 의해서 세레베스 섬에 이식, 재배되었고 남서태평양제도에서의 대대적인 카카오 재배도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이루어 졌다.

또,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어서의 대규모 재배는 1878년에 현재의 가나 해안에 카카오 열매 1개를 이식한 것이 최초이다. 이 후 카메룬, 아이보리코스트, 나이지리아, 토고 등에 확산되어 아프리카 전역에 확장되었다.

현재는 동서에 관계없이 적도의 남·북위 20° 이내의 고온다습한 전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실정이며 커피, 설탕 다음으로 세계 3대 농산 수출물의 하나로서 세계총생산량은 2004/2005년도 기준으로 약328만 M/T에 이른다.

[제공=(사)한국카카오·초코릿기술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