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경제1팀] ‘샐러리맨 신화’주인공들이 잇따라 몰락하고 있다. 웅진의 윤석금이 무너졌고, STX를 이끌던 강덕수에 이어 팬택의 박병엽도 씁쓸한 퇴장을 맞았다. 이들은 한 때 샐러리맨의 전설이라 불린 3인방. 맨손으로 시작해 기업 성장을 이끌어냈지만 실적 악화 앞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반면 전통적인 재벌 패밀리의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바야흐로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시대다.
“바닥부터 그룹 키워냈는데…”. 팬택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박병엽 부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말단 샐러리맨에서 출발해 조 단위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기업 총수로 성장한 ‘샐러리맨 신화’가 결국 ‘비운의 신화’로 마감하게 된 셈이다.
젊은이들의 우상
쓸쓸한 최후
팬택은 국내 3위의 휴대전화기 생산업체다. 맥슨전자의 영업사원이던 박 부회장이 1991년 전세금 4000만원으로 창업한 무선호출기(삐삐) 회사가 그 시작이다. 이후 팬택은 1997년 휴대전화기 제조 사업으로 발을 넓혔고, 2001년 현대큐리텔을, 2005년 SK텔레택을 인수해 명실공히 휴대전화기 업계에 떠오르는 별이 됐다.
벤처신화를 쓰던 그는 한때 국내 30위 주식부자 반열에도 올랐다. 그러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 등과 경쟁하기에 팬택은 역부족이었다. 실적 악화로 2006년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 부회장이 워크아웃 기간 중 보유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백의종군해 2011년 말 겨우 워크아웃 딱지를 뗐지만, 이 상승세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 휴대폰 시장이 지각변동하면서 팬택의 사정은 다시 악화됐다.
삼성과 애플 등에 밀리며 지난해 3분기부터 계속 적자를 맞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연구개발을 이어가 올해 초 베가넘버6, 베가아이언, 베가LTE-A 등 신제품을 꾸준히 내놓으며 반등을 노렸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 부회장은 지난 24일 경영 무대에서 퇴장을 선언했다.
샐러리맨 신화의 몰락은 팬택뿐이 아니다. 강덕수 STX 회장은 최근 채권단에 경영권을 박탈당하며 역사의 뒷길로 쓸쓸히 사라지고 있다.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1973년 쌍용양회에서 평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강 회장은 20년 만인 1993년 쌍용중공업 이사로 승진했다. 2000년 말 회사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거쳐 외국계에 인수된 뒤엔 대표이사로 발탁됐다.
2001년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졌다. IMF 당시 외국 자본에 넘어갔던 쌍용중공업이 다시 매물로 나오면서 전 재산 20억원을 털어 경영권을 인수, STX그룹을 설립했다.
윤석금·강덕수 이어…박병엽까지 줄퇴진
무리한 사업확장·금융위기에 무대 밖으로
이후 강 회장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그룹 외형을 확장했다. STX팬오션과 STX조선해양의 근간인 범양상선, 대동조선을 잇따라 인수했다. 조선업을 근간으로 해상운송까지 사업 분야를 넓혔다. 산업단지관리공단을 인수해 STX에너지를 세우는 등 에너지, 건설업에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강 회장의 공격적 M&A 경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 속에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세계 교역 물동량이 줄면서 해운업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어 선박 발주량이 줄면서 극심한 수주 가뭄에 시달렸다.
그룹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가 넘던 해운 업황은 곤두박질쳤고, 후방 산업이자 그룹의 핵심인 조선업도 심각한 유동성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STX그룹은 지난해 매출이 18조8300여억원에 달했지만, STX조선해양(6300억원 손실)과 STX팬오션(4500억원 손실)이 막대한 적자를 기록해 그룹 전체로 1조4000억원이 넘는 순손실을 기록했다. 결국 유동성 위기가 심화되면서 올해 그룹이 해체됐다.
무리한 M&A
승자의 저주
백과사전 외판원 출신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도 같은 처지다. 윤 회장은 1980년 한국 브리태니커에 입사한 뒤 전 세계 54개국 세일즈맨 중 최고 실적을 내 ‘영업의 신’으로 불렸다.
당시 자본금 7000만원으로 웅진그룹의 모태인 도서출판 해임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이후 웅진식품, 웅진코웨이 등 생활가전으로 사업 군을 확장하다 태양광 사업, 건설, 금융(서울저축은행 등)등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지난 2010년 웅진그룹의 매출은 5조2000억원, 재계 순위 32위(공기업 제외)의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몰락의 시작이었다.
무리한 M&A는 외환위기와 경기침체 등이 겹치면서 유동성 위기로 번졌다. 결국 윤 회장은 지난해 10월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퇴진에 이르렀다.
과거 샐러리맨 신화를 쓴 또 다른 기업가로 신선호의 율산그룹과 김우중의 대우그룹, 정태수의 한보그룹, 임병석의 C&그룹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원조로는 단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꼽힌다.
김 전 회장은 24살이던 1960년에 한성실업에 입사해 6년여간 실무 경험을 쌓은 뒤, 31살 나이에 자본금 500만원과 직원 5명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대우그룹의 전신인 대우실업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건설·전자·자동차 등 사업 영역을 넓힌 대우는 한때 41개 계열사, 400개가량의 해외법인을 보유한 재계 2위 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대우 신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채비율 600%가 넘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99년 8월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에 들어섰다.
김 전 회장은 그해 10월 중국으로 떠난 뒤 그길로 장기 해외 도피에 들어갔다. 이후 2005년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는 결국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253억원 형을 선고받았다. 특별사면 이후 다시 해외행을 택한 김 전 회장은 최근 전격 귀국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재기를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지만 건강 문제, 추징금 회수 문제 등 걸리는 부분이 많아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김우중·신선호·임병석 비운 오너 꼬리표
재벌가문 고속 성장…출총제내 68% 장악
이 외 70년대에 명성을 떨쳤던 율산그룹도 빼놓을 수 없다. 창업주인 신선호 회장은 1976년 남대문 인근 그랜드호텔 506호를 임대해 무역업체인 율산실업주식회사를 차렸다.
율산은 창업 첫해인 76년에 무려 4300만달러를 수출하며 무역업계를 술렁거리게 하더니 77년 말에는 율산알미늄, 율산해운, 율산건설 등 11개 계열사에 7000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중견재벌로 거듭났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확장과 부동산개발로 인해 자금난에 부닥쳤고, 1979년 2월 채권은행단이 율산그룹에 대한 공동감리에 돌입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같은 해 4월 신 회장이 외국환관리법 위반 및 업무상 횡령혐의로 전격 구속되면서 율산그룹은 공중 분해됐다.
이들은 모두 내실을 기하지 못한 채 과도한 인수합병과 차입경영 등으로 몸집을 불리다 위기에서 날개가 꺾였다. 전문가들 역시 잇따른 샐러리맨 신화 몰락의 원인을 취약한 리스크 관리에서 찾는다.
재벌 기업들이 고도 성장한 산업화시대와 달리 기업 경쟁 자체가 글로벌화되면서 리스크 관리 중요성이 더 커졌지만, 샐러리맨 기업은 재벌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고 인적·물적 자원이 취약해 위기 상황을 타개할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현재 자수성가한 샐러리맨 신화에는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박성수 이랜드 회장 정도만 남아 있다.
월급쟁이 출신
회장님 잔혹사
반면 재벌 가문 기업들은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추세다. 기업경영 분석업체 CEO스코어가 2007∼2012년 출자총액제한을 받는 그룹을 분석한 결과, 범삼성(삼성·CJ·신세계·한솔), 범현대(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현대·현대백화점·KCC·한라·현대산업개발그룹), 범LG(LG·GS·LS그룹), SK, 롯데, 범효성(효성그룹·한국타이어) 등 6대 재벌 자산 총액이 525조원에서 1054조원으로 101% 늘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34개 그룹 자산은 41%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6대 가문의 순익 증가율은 자산 증가율보다 더 가팔랐다. 6대 가문 기업집단의 순익은 2007년 37조원에서 작년 말 60조원으로 63.3% 늘었으며 그 비중도 65.6%에서 91%로 25.4%포인트나 뛰어올랐다.
이들 6대가의 비중은 2011년말 대기업집단내 순위 31위였던 웅진과 작년 말 기준 13위였던 STX그룹이 구조조정 과정을 겪으면서 올해 말에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6대 가문중 자산총액 비중이 가장 높은 그룹은 범삼성가로 삼성, 신세계, CJ, 한솔을 합쳐 작년 말 기준 자산이 358조원으로 출총제에 속한 일반기업 총 자산의 23%에 달했다. 2007년 19.1%에서 3.9% 포인트나 높아졌다.
이어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 현대백화점, 현대산업개발, KCC가 속한 범현대가가 자산 273조원으로 17.5%를 차지했다.
범삼성가와 범현대가의 자산총액 비중 차이는 2000년 이후 4∼5%포인트 대를 계속 유지하다 2011년 말 한때 2.7%포인트로 좁혀지기도 했지만, 작년 말 5.5%포인트로 벌어졌다. LG, GS, LS로 분화된 범LG가는 178조원으로 단일 그룹인 SK(141조원)를 제쳤다.
SK와 롯데는 자산이 141조원과 88조원으로 비중은 각각 9%, 5.6%였다. SK, 롯데 모두 2007년 대비 0.8%포인트가량 상승했다.
효성과 한국타이어가 속한 범효성가의 자산총액은 17조원, 출총제 비중은 1.1%로 2007년(1.0%)대비 큰 변화가 없었다.
5개년간 6대가 기업의 자산총액 증가율은 범삼성가가 112.5%로 가장 높았고 이어 범현대가 103.0%, 범효성가 102.2%, 롯데 100.4%, SK 95.3%, 범LG가 81.8%의 순이었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경제구조가 고도화되며 몸집 불리기식 전략보다는 적절한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커졌다”며 “지난 5년간 중도 탈락한 그룹들은 모두 리스크 관리와 지속가능경영 체제 구축에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