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웰빙

[편완식이 만난 ‘이 시대의 풍류’] 우리잡곡 살리기 운동본부 김규동 회

곡산 2008. 8. 15. 13:01
[편완식이 만난 ‘이 시대의 풍류’]
우리잡곡 살리기 운동본부 김규동 회장
  • ◇김규동씨가 조 수수 등이 심어져 있는 토종잡곡밭의 작황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여름 햇살에 이삭들이 영글어 가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분신인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듯 대견스럽다고 한다. 사진=안영상 사진작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남쪽 자락. 조 수수 동부 피 기장 등 잡곡류가 심어진 밭들이 옹기종기 누워 있다. 예전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겨운 풍경이다. 간혹 나이 든 이들이 길을 지나다 향수에 빠져 밭이랑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자녀들을 이끌고 와 일일이 잡곡 이름을 알려주며 옛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들도 있다. 잡곡 밭이 잊혀진 옛이야기가 돼버린 것이다. 최근 들어선 그래도 ‘잡곡이 약곡’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토종잡곡을 구하기 위한 도회지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한 남자가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 속에 익어가고 있는 조 이삭들을 대견스러운 듯 어루만지고 있다. 지난 세월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면 우리 토종잡곡을 지켜온 우리잡곡살리기운동본부 김규동(64) 회장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양봉으로 번 돈을 토종잡곡 보존에 쏟아부었다. 누구든 토종잡곡을 알기 위해 찾아온 이가 있으면 만사 제쳐 놓고 잡곡밭 현장강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잡곡씨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서슴없이 나눠준다. 그러면서 가져간 잡곡씨 종의 숫자만큼 새로운 토종을 찾아 올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토종잡곡도 있다.

    돈도 안 되는 일이니 주위 사람들이 이해할 리 만무다. “바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제 삶에 의미있는 일 하나를 찾은 것으로 이미 큰 것을 얻었습니다.”

    김 회장에겐 토종잡곡에 매달리게 한 사연이 있다. 삼척지방의 차조가 특이하다고 하여 종자를 구입하여 재배하던 중 서울에서 열린 직거래 장터에 가지고 나갔다. 강원도가 원산지인 잿빛 어른차조를 처음 보는 차조라 하여 수입산으로 몰아 판매를 못하게 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없이 울었습니다. 제가 토종을 지키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 스스로 우리 잡곡을 퇴출시키는 시대를 맞게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650종에 이르는 토종잡곡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조의 경우 80종 가운데 48종을 힘겹게 확보했다. 못 찾은 것은 멸종이 된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잡곡은 종류마다 성분이 다릅니다. 먹을거리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조그만 이삭의 잡곡까지 선조들이 왜 심었겠습니까.” 그는 그것들이 반드시 민간요법의 약재로 쓰였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조와 기장류는 위에 좋고 녹두와 동부는 해독과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염증과 어혈을 풀어주는 데 사용했다. 요즘엔 수수염색 옷이 아토피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기다.

    “일제 36년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잡곡민간요법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약이 되는 토종잡곡을 되찾아 보존해야 합니다.” 그는 우선 표본도감을 만들려고 한다. 개인으로선 방대한 작업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토종잡곡은 수천년 전부터 우리의 팔도강산 어느 곳에서나 농약과 비료 없이도 잘 자라, 우리 민족의 건강과 삶의 주체로 계승 보전되어 온 보물입니다.”

    게다가 세계 각국은 생물다양성협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생식물의 생태계보전과 작물재래종의 보전을 의무화하고 있다. 유용물질의 생산 수단뿐 아니라 품종개량에 토종의 역할이 중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 회장의 토종잡곡 종자 헌팅은 1990년도부터 시작됐다. 주말이면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았다. 가을엔 밭을 돌아다니면서 구했다. 밭 주인을 찾아 잡곡의 이름을 알아내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어떤 땐 주인을 못 찾아 이삭 몇 개를 우선 자르고 돈을 이웃에 맡기기도 했다. 후에 연락처를 알아내 잡곡 이름을 어렵게 알아낸 것도 많다.

    봄과 겨울엔 전국 5일장을 누볐다. 대부분 할머니들이 손수 농사를 지어 시장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팔고 있는 희귀 잡곡들이 타깃이었다. 한번은 ‘갓끈 동부’가 TV에서 소개되는 것을 보고 즉시 달려가 한 알에 500원씩 600알을 사온 경우도 있다.

    ◇김규동씨가 그를 찾아온 사찰음식전문가 정산 스님(오른쪽)과 잡곡섭생연구가 한명준씨(가운데)와 잡곡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치악산 남쪽 자락은 중앙선 철도와 맞닿아 있어 한국전쟁 이후 서울지역 가옥 복구를 위한 주요 목재 공급지였다. 자연히 나무가 베어진 산자락엔 잡곡재배 화전농이 번성했다. 서울로의 운송도 용이해 전형적인 잡곡재배 주산지가 됐다. 1970년대 초 국가의 화전민 정리 정책 이후 잡곡재배면적이 급감돼 왔다.

    “토종자원은 이제 유전자원 확보라는 차원에서 다뤄져야 합니다.” 김 회장은 여름 휴가철과 가을 들녘에 60∼70대의 노인들이 조 율무 기장 등의 이랑에 들어가 향수에 젖어 만져보고 먹어보며 넋을 놓고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기성세대에겐 어린 시절 고향의 유전자를 불러다 주고 있는 셈이다.

    토종잡곡 씨앗은 땅위에 그냥 뿌려놔도 자연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발아하여 살아남는다. 더구나 다음 생의 자기 후손이 잘 자랄 수 있게 흙을 만들어 놓고 죽는다고 한다. “3년이 지나면 아무리 우거진 잡초 밭이라도 모두 이기고 자기 무리의 땅으로 만들지요. 원래 곡식은 잡초보다 강했지만 개량, 교배되면서 잡초를 이기지 못하게 됐습니다.”

    김 회장은 토종잡곡의 여러 성분과 성질에 근거해 하나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잡곡을 어린나이부터 먹으면 체질이 개선되고 1대를 이어서 더 먹으면 나쁜 유전자까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혈압 가계인 자신의 집안에서 본인과 자녀의 모습이 실증적 자료가 되고 있다.

    관계 전문가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면 한다는 김 회장은 전통 토종잡곡의 약재 사용뿐 아니라 친근한 건강 먹을거리로서 ‘잡곡피자’를 제안한다. “잡곡의 종에 따라 각기 다른 영양과 맛, 향이 있음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우리 몸에 맞게 개발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전통의학에서도 잡곡에 대한 관심은 예로부터 있었다. ‘황제내경’에도 곡식만으로 병을 치료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문구가 있다. 곡식은 사계절의 정기가 맺어진 열매로, 다음해에 싹이 틀 수 있는 생명력이 그대로 살아 저장돼 있어 식품으로서는 가장 좋은 것이라 했다. 황제내경의 오운육기 편을 보면 ‘어떠한 병의 있으면 맛에 의해 처방하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통의학을 하는 이들은 잡곡을 맛으로 분류하여 민간요법에 쓰게 했다.

    “전통의학에서 원초적인 기본 맛으로는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에 떫은맛을 하나 더해 육미(六味)로 꼽으면서, 이 다섯가지 맛을 오장과 연관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맛을 가진 팥은 간에, 쓴맛을 가진 수수는 심장에, 단맛을 가진 기장은 비장에, 매운맛을 가진 현미는 폐에, 짠맛을 가진 검정콩은 신장에 좋다는 식이다. 떫은맛을 가진 녹두는 영양과 성장 호르몬의 요소가 풍부해 성장기의 어린이나 청소년 그리고 노약자 환자에게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람의 오장 육부가 균형이 안 맞으면 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오장육부에 대응하는 6가지 맛과 기능을 가진 대표적인 육곡을 동비율로 쌀과 혼합해서 잡곡밥을 지으면 건강에 좋을 수밖에 없지요.”

    잡곡은 소박한 밥상도 가능케 해준다. “육미잡곡밥 한 공기면 영양면에서나 생리기능면에서 균형과 조화가 맞는 만족할 만한 식사가 됩니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는 1년 중 2개월만 노동을 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음을 체험으로 입증한 바 있다. 아마도 우리에겐 잡곡 같은 먹을거리가 그 같은 삶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잡곡은 식품가공수출의 아이템에도 기반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분식장려 운동이나 혼식장려 운동을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잡곡(약곡)밥 먹기 운동을 하면 농촌경제 살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맛은 어쩌면 본능적이며 순리적인 것이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면 정신도 맑고 맛 감각도 좋다. 그러나 오장육부가 건강하지 못하면 정신도 흐려지고 맛도 잘 모르며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이 없다고 느낀다. 맛을 읽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건강을 잃은 것이고 더 나아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음식의 맛을 잘 모르겠다면서 미각 장애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온갖 약품과 보약 또는 방부제로 몸이 이미 오염돼 있거나 조미료나 기타 식품 첨가물로 입맛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맛의 회복이 건강의 단초라는 얘기다.

    한 예로 수박에는 단맛 외에 이뇨작용을 돕는 짠맛인 지린내 나는 맛이 들어 있다. 사탕을 먹은 후에 수박을 먹으면 이 지린내 나는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입에 대자마자 아무 맛도 없는 맹탕 맛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사탕의 단맛 때문에 입맛이 마비되어 수박의 진짜 맛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는 환자에게 식초에 담근 콩이 건강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먹게 하는 사람들도 맣다. 하지만 위장이 허약하여 생긴 위암에는 신맛이 극약이라, 환자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싫어서 진저리가 나는데도 누가 좋다고 하니까 억지로 먹는 바람에 위장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귀리의 경우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여 고혈압에 좋은 잡곡으로 추천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벼룩기장이 만약에 당뇨에 좋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면 5조원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그는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 잡곡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 서려 있습니다. 이 땅의 햇살과 이 땅의 물과 바람으로 키워 낸 먹을거리는 우리들의 생명이자 자존심이지요.” 수천종에 달하는 토종잡곡은 개방화의 바람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농산물에 밀려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굶어죽어도 종자는 머리에 베고 죽었다는 선조들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 회장이 관리하고 있는 토종 잡곡밭에 식구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두과류는 메주콩 11종, 밥밑콩 15종, 나물콩 15종 덩굴콩 19종, 팥은 적두 그루적두 등 9종을, 동부는 각씨동부 등 6종을, 그리고 녹두는 올녹두 그루녹두 등 8종이 자라고 있다. 깨과는 참깨가 8종, 들깨는 1종이 보존되어 있다. 박과는 호박 오이 수세미 박 등 6종이 보존·전시되고 있다. 가지과는 긴자주감자 등근자주감자 등 4종, 아욱이과는 각각 목화 1종, 메밀 1종을, 그리고 약료작물은 율무 결명자 등 4종을 보유하고 있다. 화본과는 보리 밀 각각 1종, 조는 올조를 비롯하여 26종, 수수는 찰수수 등 25종, 기장은 찰기장 등 5종, 옥수수는 황옥 백옥 등 16종을 재배하고 있다

    “웰빙도 참살이도 결국엔 먹을거리에서 비롯됩니다. 토종잡곡은 약곡으로 그 중심에 있습니다.” 김 회장에겐 죽는 날까지 잡곡 밭에서 오래도록 일하는 것이 희망이자 행복이다. 잡곡밭은 이제 그의 인생무대나 마찬가지다. 잡곡 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무대인생같이 한 가지 자신만의 길을 찾은 이의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문화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