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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아홉 번 덖음 차(茶)’ 명인 묘덕스님

곡산 2009. 8. 2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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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아홉 번 덖음 차(茶)’ 명인 묘덕스님

 

神仙이 즐긴 명차(名茶)는 어떤 맛?

▣ 글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2009-08-18 13:29:13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속은 마치 연록의 보석을 담갔다 뺀 듯 영롱한 빛깔을 자랑한다. 갓 지은 흰 햅쌀밥이 뜸들 때 나는 구수한 향기에 입안에 금세 침이 고인다. 뜨끈한 찻잔을 조심스레 입가에 가져가니 입안 가득 매력적인 첫 맛이 퍼졌다. ‘아홉 번 덖음’ 끝에 탄생한 차 한 잔은 탄산음료와 카페인에 길들여진 거친 입맛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거친 산새를 이기고 지리산 정기를 고스란히 품은 야생 찻잎만 골라 7~8시간에 달하는 고된 과정을 거친다. 아홉 번에 걸쳐 뜨거운 가마솥에 찻잎을 덖고 말리는 일련의 과정은 고되다. 연약한 여승(女僧)이 아담한 산채에서 밤새 온 몸의 땀과 기운을 쏙 빼며 완성한 차는 고작 작은 나무상자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양이 적다. 그러나 최근 이를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애호가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룬다. 수수하지만 여운이 남는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아홉 번 덖음 차’의 비밀을 간직한 묘덕스님과 특별한 만남을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은 차를 덖는 과정을 흔히 ‘찐다’ ‘볶는다’와 혼동합니다. 하지만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덖는 것과 찌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무쇠솥에 찻잎을 덖고 있는 묘덕스님.


배려의 미학, 차 덖음의 의미

‘덖는다’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대중은 많지 않다. ‘덖음’의 사전적 의미는 기름기가 없는 식물을 뜨거운 솥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뒤집어 익히는 것을 말한다. 언뜻 ‘볶음’과 비슷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묘덕스님은 ‘차 덖음’의 과정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찌거나 볶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원하는 만큼 대상을 익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덖는 과정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대상입니다. ‘차 덖음’은 주재료인 찻잎이 가장 이롭고 훌륭한 상태가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조절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찜과 볶음이 당장 먹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대상을 ‘이용’하는 작업이라면 ‘덖음’은 대상의 속성을 가장 이롭게 변화시키는 행위다. 다시 말해 ‘차 덖음’에는 배려의 미학이 숨어있는 것이다.

“싱싱한 생엽(생 찻잎)을 따서 뜨거운 불에 익히고 말리는 모든 절차가 맺거나 끊어짐 없이 하나의 과정으로 이뤄져야합니다. 몇 시간 동안 벌겋게 달아오른 솥단지에 손을 넣어 찻잎을 다루는 일 자체가 불가에서는 하나의 수행입니다.”

묘덕스님의 일과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스님의 차 맛에 반해 ‘차 덖음’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제자들과 5인 1조를 이뤄 지리산 일대를 돌며 야생 찻잎을 채집한다. 너른 밭에 사람 손으로 재배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제 힘으로 큰 찻잎을 고르고 따는 일은 쉽지 않다.

하루 평균 묘덕스님이 다루는 생엽의 양은 고작 15~20kg 정도. 이렇게 모은 생엽을 묘덕스님과 그 중 경험이 많은 제자 4명이 꼬박 7~8시간에 걸쳐 질 좋은 차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아홉 번 덖음 차’에 대한 불편한 오해

묘덕스님에 따르면 ‘아홉 번 덖음 차’의 전신은 전남 순천 서남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초차’(釜炒茶)다. 찻잎을 무쇠 솥에 덖어 만드는 부초차는 예부터 승려들이 즐겨 마시며 수행하던 일종의 고유문화였다. 묘덕스님은 20년 전 불교에 귀의해 서남사에 머물며 부초차 만드는 법을 익혔다.

“원래 각 절에 전해지는 차 제조법은 소속 승려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일반인이 산사의 차를 맛보거나 만드는 법을 배워가는 것도 불가능했죠. 최근 불교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이런 금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불가의 차 문화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건 20년이 채 못 됩니다.”

서남사 부초차는 국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명품이다. 질 좋은 덖음 차가 내는 부드러운 향과 맛이 일품이라는 것. 묘덕스님은 “부초차의 맛 비결은 바로 뜨거운 가마솥에 찻잎을 덖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서남사를 떠난 묘덕스님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본격적으로 ‘아홉 번 덖음 차’ 제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묘덕스님의 차는 이른바 ‘차 전문가’를 자처하는 기성 업자들과 학자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이들은 “‘아홉 번 덖음’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며 “찻잎은 세 번만 덖어도 부스러지고 타서 못쓰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미 국내 녹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업체들을 중심으로 ‘아홉 번 덖음 차’가 엉터리라는 말이 퍼지고 있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차 덖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면 그만이었지만 누구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묘덕스님에 따르면 ‘아홉 번 덖음 차’의 비밀은 바로 ‘첫 덖음’에 있다. 먼저 싱싱한 생엽을 400℃ 이상 고온으로 달군 무쇠 솥에 정성껏 덖는다. 제대로 덖은 찻잎은 아무리 세게 비벼도 잎이 찢어지거나 상하지 않는다.

“찻잎은 귀소본능이 무척 강합니다. 섣불리 덖거나 서둘러 식히면 생엽 속의 수분이 고스란히 남아 금방 파릇파릇하게 살아나죠. 워낙 차가운 기운(냉성)이 세서 제대로 열전달을 하지 못하면 안팎의 수분 함량이 달라져 제대로 된 차가 되지 않습니다.”

묘덕스님은 ‘겨우 2~3번 덖어서는 차의 진정한 맛을 낼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덖는 과정이 깊어질수록 차가 갖고 있는 본연의 향이 우러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급이라 부르는 용정차나 오룡차의 경우 찻잎을 5~6번 정도 덖으면 그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2~3번 정도만 덖어도 흔히 맛볼 수 있는 대부분의 차 맛은 모두 낼 수 있지요.”

묘덕스님은 ‘아홉 번 덖음 차는 엉터리’라고 몰아세우는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차 제조법의 비밀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오해를 털고 싶다고 밝혔다. 아홉 번 덖음 과정을 통해 묘덕스님이 발견한 ‘명차’(名茶)의 비결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신선들의 차, 마음 속 울화를 다스린다

‘아홉 번 덖음 차’는 제조과정에서 생엽이 갖고 있는 고유의 독성이 대부분 중화되거나 사라진다. 오로지 찻잎이 품은 깨끗한 기운만 남겨 이른바 ‘신선들의 차’라고 불릴 만 한 것이다. 보통 한의학에서 녹차는 기운이 찬 음식으로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몸의 기혈이 막히는 등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아홉 번 덖음 차’는 생엽의 냉기를 완전히 제거해 오히려 몸의 기를 뚫어주는 작용을 한다는 게 묘덕스님의 설명이다.

“차는 마음 속 울화를 다스리는 데 특별한 효능이 있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한방에서는 차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탈이 난다고 하지만 ‘아홉 번 덖음 차’는 부작용을 완전히 제거해 모든 장기들이 순기능을 하도록 돕는 작용을 합니다.”

묘덕스님이 만드는 ‘아홉 번 덖음 차’는 1년에 고작 500통 정도밖에 생산되지 않는다. 일일이 맨손으로 만드는 과정이 고된 까닭이다. 하지만 한 잔의 차로 사람들에게 여유와 행복을 주고 싶은 스님의 소박한 소망을 위해 오늘도 산채의 무쇠 솥은 뜨거운 열기를 식힐 틈이 없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