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주년 창간기획] 지갑을 여는 기준이 '필요→가치'로 이동했다

1988년, 한국 여성의 지갑이 처음 '나'를 향해 열리던 해
[우먼센스] 1988년은 한국 여성의 소비가 처음으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나를 위한 소비'로 확장되기 시작한 원년이다. 그해 서울에서는 제24회 서울올림픽(이하 88올림픽)이 열렸다. 이를 계기로 맥도날드, 피자헛, 나이키 등 해외 브랜드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유입됐다. 서구식 외식문화와 제품 자체보다 브랜드를 보고 사는 '과시적 소비' 등 이전에는 낯설었던 소비 문화도 등장했다. 같은 해 관광 여권 규제도 완화됐다. 40세 이상 관광 자유화가 시행됐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다. 여성지 뒷장을 채우던 여행사 광고가 점차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거리의 풍경도 달라졌다. 압구정에는 로데오거리가 들어섰고, 백화점 문화가 여성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몇 해 뒤 등장한 '오렌지족(1990년대 초 압구정을 중심으로 소비를 즐기던 강남 부유층 자녀들)'의 주 무대가 된 곳도 이 일대였다. 근검절약이 미덕이던 시대의 끝자락에서 소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만 그 과도기에 있는 만큼 당시 여성의 소비는 여전히 '우리 가족과 살림을 위한 소비'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자신을 표현하거나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한 소비와는 거리가 있었다. 같은 해 창간한 <우먼센스>는 이러한 변화를 기록해왔다. 여성의 소비는 무엇을 사는지를 넘어 왜, 어떻게 소비하는지가 더욱 중요해졌다. 창간 38주년을 맞아 1988년과 2026년을 마주 보며 한국 여성 소비의 변화를 들여다봤다.

"1988 vs 2026 소비하는 이유가 바뀌었다"
'가정 안의 나'에서 '그냥 나'로 결정의 주체가 달라졌다. 1988년의 여성의 소비는 아내·엄마·딸이라는 관계 안에서 결정됐다. 남편의 월급봉투가 소비의 출발점이었고, 장바구니안에는 '우리 가족'이 먹고 쓰기 위한 물건이 담겼다. 2026년에는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보편화되면서 소비를 결정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자신의 수입을 바탕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으며 1인 가구와 비혼, 딩크 등 가정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소비의 주어는 관계 속의 역할이 아닌 '나'가 됐다.
실용·내구성에서 가치·취향·윤리로 기준이 다양해졌다. 과거의 기준은 단순했다. '오래 쓸 수 있는가, 살림에 보탬이 되는가'였다. 지금은 다르다. 경제 발전으로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생계 이외의 소비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삶의 여유가 생기니 단순히 가성비만 따지기 보다는 이 제품이 만들어진 경위나 파장을 고려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제품을 구매하려 노력한다. 비건 화장품, 리사이클 소재의 옷, 물건을 사는 동시에 기부가 되는 사회공헌형 브랜드처럼, 이제는 물건보다 그 뒤에 붙은 가치를 산다.
'국민템'이 사라지고 '무유행'이 유행이 되었다. 1988년엔 모두가 같은 걸 사는 '국민템'이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에는 선택지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콜릿 하면 롯데 '가나 초콜릿', TV하면 럭키 금성, 밥솥하면 린나이 이런 식이었다. 2026년엔 나의 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졌고 소비의 목적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제품들도 다양해졌다. 지금은 수천 개의 취향 이 각자의 유행을 만드는 시대다. 그래서 국민템이 만들어지기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지·백화점 카탈로그에서 나노 커뮤니티로 정보의 경로가 이동했다. 1988년에는 <우먼센스>, <여원>, <주부생활>, <여성동아> 같은 여성지와 백화점 카탈로그가 거의 유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였다. 지금은 커뮤니티·SNS(인스타그램, 틱톡 등)·유튜브·블로그 등 경로도 다양해지고 온라인 상의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다. 특히 세분화된 취향이 잘 맞는 사람이 모인 '나노 커뮤니티'에서는 정보의 신뢰도와 접근성은 물론, 실사용 후기까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여러 관점을 비교·검증하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웰니스와 정신건강을 챙기는 '나를 지키는 소비'가 대세다. 정신건강을 위해 소비한다는 점은 1988년과 가장 크게 달라진 변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며 생존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소비가 늘었고, 치열한 경쟁과 디지털 피로 속에서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건강의 의미도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서 예방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운동을 등록하고, 명상 앱을 구독하고, 워케이션을 떠난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웰니스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일상의 필수 소비로 자리 잡았다.


1988 소비키워드 "내구성·개성·가공식품"
소비의 기준은 '얼마나 오래 쓰는가'였다. 아직은 풍족하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첫번째 기준은 '내구성'이었다. 따라서 어떤 게 가장 오래 쓰느냐, 튼튼해서 잘 안 망가지느냐가 관건이었다. 특히 거금을 들여서 장만하는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고를 때는 더 그랬다. 당시 브랜드들도 이러한 소비 심리를 겨냥해 "오래 쓴다·튼튼하다"를 강조하는 광고 카피를 써냈다. 지금까지도 한국 광고의 명카피로 회자되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는 금성사(현LG)에서 냉장고·TV 등 가전 광고에 반복 사용한 문구다.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세탁기' 역시 내구성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마케팅 사례로 꼽힌다.
패션 트렌드의 소비 핵심은 자신감이었다. 여성들이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어깨에 패드가 들어간 '파워숄더' 재킷과 원피스를 미디어와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당시 패션 테마는 복고풍으로 1950년대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이 주류였다. 이때는 색상 활용도 과감했다. 또한 캐주얼한 분위기의 옷도 유행했다. 상ㆍ하의를 청으로 맞춰입는 청청 패션도 인기였다. 특히 캘빈클라인, 게스 등은 당시 부의 상징이었다.
가공식품이 식탁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스팸·백설햄·분홍 소시지가 도시락 반찬으로 등장했고, 미원·다시다가 국물의 기본이 됐다. 가공식품은 식사뿐 아니라 아이들의 간식 문화에도 스며들었다. 가나초콜릿, 오란씨, 새우깡 같은 제품은 '특별한 날의 간식',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런 식품, 조미료들은 손수 하는 요리 안에 편의를 살짝 더한 정도의 가족의 식탁과 간식 시간을 보완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1988년 주부들의 지갑은 여전히 재료를 사는 데 열렸지, 완성된 음식을 사는 데 열리지 않았다. 가공식품은 늘었지만, 식탁의 중심은 여전히 '직접 요리'였다.


2026 소비키워드 "건강·편리성·개성"
2026년 소비의 기준은 웰니스, '내 몸이 회복되는가'에 있다. 이제 소비자는 물건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넘어, 그것이 나를 얼마나 회복시키고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침대나 베개를 고를 때도, 안마의자, 실내용 운동기구처럼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제품에도 건강을 위한 투자라는 인식으로 기꺼이 지갑을 연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소비보다 건강, 행복, 경험처럼 삶의 질을 높이는 가치에 더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쟁적인 업무 환경과 디지털 피로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려는 욕구도 커졌다. 팬데믹 이후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소비 이유가 됐다.
'내 시간을 얼마나 확보해주는가'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음식물처리기 등 가전에 집안일을 맡긴다. 장보기도 마찬가지다. 신선한 식재료도, 조리 직전의 밀키트도 마켓컬리·쿠팡프레시 새벽배송 박스로 모두 집 앞으로 배달된다. 집안일과 장보기 시간을 줄인 사람들은 운동을 하고, 취미를 즐기고, 휴식을 취한다. 가사 노동을 돈으로 줄이고, 그만큼 확보한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계기에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 '시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청소, 설거지, 음식물 처리 같은 반복적인 노동을 줄이는 것이 중요해졌고 가사 노동도 외주화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살림의 목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가사 부담을 줄여 삶의 균형과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새로운 소비의 기준이 되고 있다.


'무엇을 얻는가'를 넘어 '무엇을 지지하는가'로 확장됐다. 이제 소비자는 취향과 가치관, 윤리적 기준까지 구매 결정에 반영한다. 환경을 위한 리유저블 텀블러와 가방, 로컬 브랜드, 사회공헌형 브랜드를 선택하는 이유다. 지금의 청년들은 SNS를 통해 자신이 구매한 물건과 경험을 공유한다. 과거처럼 비싼 물건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 소비가 아닌 내가 어떤 취향을 갖고 있고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에 가깝다.
또한 획일적인 소비보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졌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나의 기준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추구하는 이미지도 달라졌다. 제품의 기능만 강조하는 브랜드보다 환경, 사회적 책임, 공정성 같은 가치를 함께 제시하는 브랜드에 소비자가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2026년의 소비는 필요한 물건을 사는 행위를 넘어, 내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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