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때 일본회사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러시아·베트남·중국서 '초코파이 신화'
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7) 이양구와 ‘초코파이 신화’
(7) 이양구와 ‘초코파이 신화’
한국은 과자에서도 세계적 명품을 배출했다. 초콜릿에 덮인 바삭한 비스킷, 그리고 그 사이에 든 말랑한 마시멜로! 중국에서도 베트남, 러시아에서도 초코파이는 인기 폭발이다. 초코파이는 오리온(옛 동양제과)이 1974년에 만들어 히트시킨 과자다. 오늘은 그 기업을 세운 이양구 회장 이야기다.
6·25전쟁, 피난, 부도위기 같은 온갖 역경을 뚫고 비즈니스를 키워간 것은 이양구의 기업가 정신이었다.
16세 때 식품가게 차려
해방이 되면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김일성 공산정권 때문에 불가능했다. 1947년 함흥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38선을 넘었다. 서울로 온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자전거 행상으로 과자장사를 시작했다. 제법 자리를 잡을 만하자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설탕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입 설탕을 팔다가 1953년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설탕의 국산화에 성공하자 독점판매권을 얻어서 사업을 늘려 갔다. 설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어린 시절 함흥물산에서 배운 정직과 신용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흑자전환…시멘트사업 진출
당시엔 풍국제과말고도 부실화된 국영기업들이 많았다. 삼척시멘트도 그중 하나였다. 원래는 오노다(小野田)시멘트였는데 해방 이후 국영기업이 되면서 적자가 심각해졌다. 이양구는 삼척시멘트도 풍국제과처럼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1957년 설탕장사로 친해진 이병철 등과 공동출자해서 삼척시멘트를 인수했다. 하지만 풍국제과 때와는 달리 적자가 계속됐다. 동업자들도 떠났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며 시설을 늘려 원가를 낮춰갔다. 드디어 건설붐이 일어나면서 시멘트 수요도 급증했고 동양시멘트는 흑자로 전환했으며 한국의 대표적 시멘트기업이 됐다.
이양구는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었다. 강원 삼척은 수해가 잦았는데 문제를 해결하려면 산을 깎아서 물길을 바꿔야 했다. 돈이 많이 들어 정부도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다. 1962년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고는 8년간 공사비를 내 일을 마쳤다. 그때 만들어진 평지에 삼척 신시가지가 들어서 있다.
초코파이 대박…오리온으로 변신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쌍용시멘트 등 경쟁 업체들이 속속 진입하면서 가격 인하 경쟁이 심해졌다. 게다가 수출 촉진을 위해 시행된 환율 인상으로 외채 상환 부담이 늘었다. 1971년 동양시멘트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다음해의 사채동결조치(8·3조치) 덕분에 회사를 되찾았다. 그 후 한국의 대표적인 시멘트회사로 차츰 되살아났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양구 회장은 1983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후 긴 투병생활 끝에 1989년 10월1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룹의 주력인 동양시멘트 주식은 큰 딸 내외에게 상속하고 작은 딸 내외에게는 동양제과를 물려줬다. 큰 딸 내외가 맡은 기업은 금융업 위주의 동양그룹으로 변신했으나 2013년 안타깝게 부도를 맞았다. 작은 딸 내외는 오리온그룹을 글로벌 제과기업으로 잘 키워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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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 주세요^^오리온 본사
6·25전쟁, 피난, 부도위기 같은 온갖 역경을 뚫고 비즈니스를 키워간 것은 이양구의 기업가 정신이었다.
16세 때 식품가게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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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구는 1916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함흥물산이라는 회사에 사환(인턴사원에 해당)으로 취직했다. 일본인 사장 시노자키는 원칙에 충실했다. 정직과 신용을 목숨처럼 여겼고 직원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다. 소년 이양구도 그런 사람이 돼 갔다. 사장의 신임을 얻어 스무 살 되던 해에 간부 자리에 올랐지만 2년 뒤(1938년) 그곳을 나와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식료품가게였는데 사업을 잘해서 재산이 불어났다. 함흥 인근에 20만평의 땅을 샀을 정도였으니 대단한 성공이었다.이양구
해방이 되면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김일성 공산정권 때문에 불가능했다. 1947년 함흥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38선을 넘었다. 서울로 온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자전거 행상으로 과자장사를 시작했다. 제법 자리를 잡을 만하자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설탕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입 설탕을 팔다가 1953년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설탕의 국산화에 성공하자 독점판매권을 얻어서 사업을 늘려 갔다. 설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어린 시절 함흥물산에서 배운 정직과 신용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흑자전환…시멘트사업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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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세를 몰아 큰 제과기업을 하고 싶었다. 당시 과자기업의 빅3는 해태제과, 동립산업, 풍국제과였는데 풍국이 가장 컸다. 일본인 소유였던 것을 해방 이후 정부가 관리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부실로 적자가 쌓여서 새 주인을 찾는 중이었다. 1956년 이양구는 이 회사 지분의 50%를 사서 경영권을 넘겨받고 이름은 동양제과로 바꿔 달았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고가차도 옆, 풍국제과 공장 자리에 지금은 오리온 본사 건물이 서 있다. 동양제과는 이양구의 손에서 곧 흑자로 전환됐다.당시엔 풍국제과말고도 부실화된 국영기업들이 많았다. 삼척시멘트도 그중 하나였다. 원래는 오노다(小野田)시멘트였는데 해방 이후 국영기업이 되면서 적자가 심각해졌다. 이양구는 삼척시멘트도 풍국제과처럼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1957년 설탕장사로 친해진 이병철 등과 공동출자해서 삼척시멘트를 인수했다. 하지만 풍국제과 때와는 달리 적자가 계속됐다. 동업자들도 떠났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며 시설을 늘려 원가를 낮춰갔다. 드디어 건설붐이 일어나면서 시멘트 수요도 급증했고 동양시멘트는 흑자로 전환했으며 한국의 대표적 시멘트기업이 됐다.
이양구는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었다. 강원 삼척은 수해가 잦았는데 문제를 해결하려면 산을 깎아서 물길을 바꿔야 했다. 돈이 많이 들어 정부도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다. 1962년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고는 8년간 공사비를 내 일을 마쳤다. 그때 만들어진 평지에 삼척 신시가지가 들어서 있다.
초코파이 대박…오리온으로 변신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쌍용시멘트 등 경쟁 업체들이 속속 진입하면서 가격 인하 경쟁이 심해졌다. 게다가 수출 촉진을 위해 시행된 환율 인상으로 외채 상환 부담이 늘었다. 1971년 동양시멘트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다음해의 사채동결조치(8·3조치) 덕분에 회사를 되찾았다. 그 후 한국의 대표적인 시멘트회사로 차츰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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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양시멘트 사태 여파로 동양제과 역시 사정이 어려워졌지만 1974년 출시한 초코파이가 대박을 내면서 정상을 회복했다.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양구 회장은 1983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후 긴 투병생활 끝에 1989년 10월1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룹의 주력인 동양시멘트 주식은 큰 딸 내외에게 상속하고 작은 딸 내외에게는 동양제과를 물려줬다. 큰 딸 내외가 맡은 기업은 금융업 위주의 동양그룹으로 변신했으나 2013년 안타깝게 부도를 맞았다. 작은 딸 내외는 오리온그룹을 글로벌 제과기업으로 잘 키워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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