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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뜻은 며느리도 몰라

곡산 2009. 1. 24. 23:51

간판 뜻은 며느리도 몰라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1969년 세탁소 옆 탁자 두개로 시작한 통영 오미사꿀빵, 이제는 인터넷 판매도
한겨레 남종영 기자
» 정원석(75) 할아버지
반죽을 메치는 할아버지의 등에서는 파스 냄새가 났다. 선반에는 소염제와 안티프라민도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기름이 살갗에 튀기자마자 안티프라민을 바르면 흉이 안 진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빚어 온 꿀빵을 무쇠솥에 튀겼다.

경남 통영 항남동의 오미사꿀빵. 1969년 오미사세탁소 집 옆에 탁자 두 개를 놓고 시작했다. 정원석(75·사진) 할아버지는 하동에서 온 제빵 기술자였다. 그는 제과점을 나와 꿀빵을 튀겼다. 밀가루 반죽 안에 팥앙금을 꽉 채워서 튀긴 뒤 겉에 물엿과 깨를 먹음직스럽게 바른 꿀빵은 이내 입소문을 탔다. 허리가 구부러진 윤월순(72) 할머니가 말했다.

“‘오미사 가자’는 게 통(통영)고, 통여고 학생들에게 암호로 통했지. 책 산다고 돈 받아서는 꿀빵 사 먹고 그랬어.”

달리 간판도 없었다. 오미사세탁소 옆에 있어서 오미사꿀빵이었다. 교복 치마를 걷어 올린 여학생들은 단추 두어 개를 푼 남학생들과 미팅을 했다. 그러면 으레 교외단속반이 나타났다. 담벼락을 타고 도망치다 넘어진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랬다. 큰딸 정숙남(49)씨는 꿀빵집을 헤집고 다녀서 ‘빠꼼이’라고 불렸다. 아줌마가 돼 돌아온 여학생들은 머리에 새치가 핀 정씨를 알아본다. 정씨가 우유를 난로에 데웠다. 난로에는 식지 말라고 꿀빵들도 올려져 있다. 삐거덕거리는 미닫이문, 먼지 낀 엘지 텔레비전, 업소용 해표 식용유가 꿀빵집을 이루는 풍경이다. 정원석 할아버지는 “꿀빵집이 많았는데 우리가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초반 세탁소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 지금 자리로 이사왔다. 그래서 오미사세탁소 없는 오미사꿀빵 집이 됐다. 간판도 오미사꿀빵이라고 달았다. 여태 집 앞은 1970~80년대의 풍경을 간직한 거리다.

» 통영 오미사꿀빵
정 할아버지는 “꿀빵 말고도 찹쌀떡과 우동을 팔았으나, 아이엠에프 뒤엔 꿀빵만 팔았다”고 말했다. 쫀득쫀득한 빵피와 달콤한 팥앙금에 중독된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3~4분에 한 번씩 “빵 좀 주세요”라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린다. 오후 2시가 되자 빵이 동났다. “꿀빵 먹으러 광주에서 왔다”는 손님들이 할아버지에게 졸랐지만 남은 빵이 없었다. 하루 팔 만큼만 만들기 때문이다.

“왜 더 많이 만드시지 그러세요?”

“노느니 이 잡는 거지 뭐.”



옆에서 지켜보던 큰딸이 끼어들었다.

“자식한테 손 안 벌리는 게 우리 아버지 프라이드입니더. 꿀빵으로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빚 안 지고 자식들 대학에 보냈어예.”

“그런데 오미사의 뜻이 뭐죠?”

“(호호) 우리도 모르지예.”

통영=글 남종영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