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산전 부장 출신 이강진씨
“흙이 좋아 1300평 텃밭 일궈요”
“은퇴 후 달라진 점이요? 자유롭다는 점이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더 바빠졌어요.”
지난 7월14일 오후 3시 경기 김포시 양촌면 300평(990㎡)대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에서 만난 이강진씨(54). 인근 문수산을 올라갔다 방금 왔다는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2005년 3월 퇴직 전 뽀얗던 피부가 은퇴 2년여 만에 구릿빛으로 변했다는 게 차이점일까.
이씨는 금요일 밤이면 부인과 함께 ‘렉스턴’을 몰고 김포로 향한다. 2박3일간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밭에서 땀 흘리고 노곤해지면 낮잠 한숨 자는 식이다.
가꾸는 야채만 고추, 오이, 감자, 토마토, 상추, 배추, 근대, 아욱 등 20여 종.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던 김상옥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떠오르는 전원생활이다.
“야채를 사러 슈퍼마켓에 갈 일은 없죠. 가끔 이웃들에게 나눠드리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어요. 저도 흐뭇합니다.”
하루 세 시간씩 골프 공 때려
마음이 내키면 강원도 홍천에 있는 제2농장으로 달려간다. 이곳은 규모가 더 크다. 1000여 평(3300㎡) 텃밭에 콩과 고추, 고구마를 가꾼다. 관리인 1명 두지 않은 개인 농장이다. 예쁘게 꾸며놓은 전원주택은 상업용 펜션 뺨칠 정도다. 이곳은 1남3녀 자녀들에겐 ‘주말 별장’으로 활용된다.
그는 서울 화곡동에 6층짜리 빌딩 건물주이기도 하다. 주중엔 이곳서 지내는 이씨의 취미는 골프. 구력 15년차인 그는 “10년 전 ‘싱글’ 실력이 지금은 ‘보기플레이어’로 떨어졌다”며 하루 3시간씩 집 근처 연습장에서 땀을 뺀다. 남들처럼 헬스는 안다녀도 세 시간씩 공을 치면 건강관리엔 문제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오전, 오후엔 평생의 소망이던 ‘육영사업’에 쏟는다.
겉모습만 보면 보통 사람처럼 하루 일과가 꽉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모든 일과를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육영사업도 ‘돈벌이’가 아닌 평소 그려왔던 ‘꿈의 실현’이다.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다. 이 같은 자유는 당연히 경제력에서 나왔다.
이강진씨의 재산은 서울 화곡동 빌딩, 강원도 홍천 농장, 김포 전원주택 등 세 곳 부동산만 30억원을 웃돈다. 나중에 70, 80대가 되어 일을 못할 때도 250평(825㎡)짜리 화곡동 빌딩을 세 주면 임대수입만으로도 노후가 보장됐다는 게 이씨 부부의 여유다.
그렇다면 이씨는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은퇴할 수 있었을까. 그가 평범한 직장인 출신이란 점은 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LG그룹에서 27년간 직장생활만 했다. 1978년 12월 LG그룹 입사 후 금성전기와 금성통신, LG산전(현 오티스LG)을 거친 샐러리맨 출신. 월급쟁이 성공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별’(임원)을 단 일도 없다. 2005년 3월31일 퇴직 당시 직급은 오티스LG 재무회계팀장.
그야말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그가 부동산으로만 30억원대 부자로 은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이 질문에 한동안 입을 다문 이강진씨가 들려준 ‘부자 아빠’의 노하우는 크게 세 가지.
첫 번째, 투자 타이밍을 잘 잡았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를 “일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는데, 그 기회를 잡은 행운아”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1년 분당 아파트 당첨이다.
“당시 신문 보니까 청약예금 1000만원이면 50평형(165㎡형) 아파트 청약이 가능하더라고요. 당장 들었죠. 그리고 10개월 후 자격이 되자마자 ‘연필 굴려서’ 대우아파트를 신청했는데, 경쟁률이 38대 1이나 되더군요. 그런데 붙었습니다.”
“많이 못 벌면 지출을 100% 통제하라”
1991년 9700만원을 투자한 50평형(165㎡형) 아파트를 6년 후 처분한 돈은 3억원 남짓. 6년 새 원금 3배의 투자 수익률을 기록한 셈이다. 현 화곡동 6층 건물도 1997년 당시 단독주택을 아파트 처분한 돈으로 리모델링한 것. 현 시세는 20억원에 육박한다. 말하자면 1억원이 안 되는 종자돈을 16년 새 20배로 키운 셈이다. 2005년 은퇴 직후 희망퇴직금에 은행 빚을 합쳐 3억5000만원에 구입한 김포 농장도 현재 시세 1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행운도 노력하는 자의 전유물이라고 했던가. 이씨의 성공 노하우의 핵심 포인트는 두 번째 교훈이다. 그는 “수입 가운데 70%는 저축했다”고 들려준다. 맨땅에서 시작한 그로선 저축이 최선의 재테크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씨 부부는 은퇴 전 철저한 ‘짠돌이’였다.
“제가 애들이 넷입니다. 등록금은 회사가 해결해줬고 사교육비는 한 푼도 안 썼어요. 과외는 물론 학원도 안 보냈으니까요. 집사람은 백화점이 어떻게 생긴 줄도 모릅니다. 1년에 외식한 날이 손으로 꼽힐걸요.” 바꿔 말해 ‘지출’을 철저히 통제한 셈이다.
그는 세 번째 비법으로 다소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일에 대한 열정’을 꼽았다. 그는 “기회를 잡는 게 ‘운’이고 70%를 저축한 게 ‘노력’이라면 열정은 성공자의 가장 ‘기본’적 자세”라고 강조한다.
1984년 금성전기 오산공장의 회계과장 시절 그는 ‘슈퍼맨’으로 통했다. 남들이 6개월 걸릴 일을 한 달이면 해치우곤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열흘은 공장바닥서 자고 열흘은 책상머리서 잤고 열흘은 오산 여관서 잤다”면서 “세상엔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들려준다. 시키는 일만 하는 ‘직장인 마인드’가 아니라 직급은 과장이었지만 ‘CEO 마인드’로 일해 왔다는 게 남다른 그의 열정이다.
다음은 일화 한 토막. 1997년 LG산전이 국세청 세무조사 받을 때다. 당시 회계팀장으로 근무하던 이씨는 회사에 ‘금탑산업훈장’을 안겨준 진기록을 세웠다. 이유는 조사 결과 누락 세금 적출률이 국세청 세무조사 역사상 최소였기 때문이다. 평소 꼼꼼하고 확실한 일 처리로 회계 업무를 해왔던 이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상패다.
무엇보다 귀가 쏠렸던 말은 “20대 때부터 은퇴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이다. 2남3녀 중 장남으로 자란 생활력 덕분일까. 그는 “은퇴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는 지론을 강조한다. 자신도 “입사 2~3년 후부터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씨의 경우 대략 1980년부터 시작했으니 준비 25년 만에 은퇴에 ‘골인’한 셈이다.
향후 계획도 분명하다. 흙이 좋아 텃밭을 일구는 일은 ‘취미’라며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평생의 꿈이었던 육영사업과 실버사업을 병행하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퇴직 직전인 2004년 동국대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놓은 상태다. 그는 “최소한 75세까지는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KFC의 창업주 커넬 샌더스가 65세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듯이.
“75세에도 백수로는 안 살 것”
54세, 비교적 빠른 나이에 은퇴에 성공한 그의 여름휴가는 어떤 모습일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올해는 막내가 고3이라,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작년처럼 온가족이 홍천 농장에 가서 일주일 내내 풀이나 뽑을까 생각중입니다. 밭에 나가 땀 흘리고 목마르면 맥주 한 컵 들이키는 것처럼 좋은 휴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평생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 한번 안 가본 이강진씨 부부. 그들은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내년부터 매년 외국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20~30대에 외국 여행하다 40~50대부터 생활고에 쪼들리며 사는 ‘보통 사람’들과 180도 바뀐 인생의 시간표인 셈이다.
남광토건 팀장 출신 이일태씨
“한 달에 절반은 맛집 찾아 다닙니다”
경기도 양평.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길을 따라 산골 구석으로 들어가자 근사한 전원주택이 눈에 띈다. 팔각정 정자도 보인다. 집 가 밭에는 토마토며 고추가 가지가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매달려 있다. 포도나무도 밭 한 두둑을 차지하고 있다. 한쪽 닭장에는 오골계며 토종닭 10여 마리가 낯선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다. 사람 손을 많이 탔나보다.
척 봐도 시골농부는 아닌듯한 중년 부부가 밭고랑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경북 청송이 고향인 이일태씨는 2년 전 이곳에 터를 닦고,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공기 좋고, 물 맑고 그리고 너무 조용해서 좋아요. 직장생활하면서 좋지 않았던 건강도 좋아지고 있어요.”
이씨는 요즘 전원생활에 푹 빠져있다. 가장 즐기면서 하는 일이 닭 키우는 일. 사료는 따로 주지 않는다. 대신 닭들이 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벌레를 잡아먹는다. 저녁이면 알아서들 닭장으로 들어간다. 어미닭이 품고 있던 달걀이 병아리가 되면서 닭 식구는 더 늘었다.
이씨의 아내 최순연씨(48)는 집 옆에 야생화 정원을 만들었다. 이름 모를 꽃을 구해 만든 정원이 그럴듯하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과일, 채소는 동생이나 친구들한테 나눠 주기도 한다.
사실 최씨는 시골구석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소원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로 끝났다. 집 주위에 은퇴한 다른 이웃들이 4가구가 더 들어왔고, 순박한 시골마을 주민들과는 금방 친해졌다. 친구들은 오히려 최씨를 부러워하고 있다.
“주식 투자 없이 통장만 100여 개”
이씨 부부는 한 달에 절반 정도는 ‘맛집’을 찾아 짧은 여행을 다닌다. 언론 등에 소개된 맛집이 대상이다. 며칠 전에는 불현듯 회가 먹고 싶어 강원도 주문진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번 여름에도 휴가는 따로 계획하지 않았다. 생활이 곧 휴가이기 때문이다.
이씨가 회사를 퇴직한 것은 2002년. 구조조정이라는 회오리가 닥쳐오자 회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선배뿐만 아니라 후배들도 퇴직하면 먹고 살 일이 없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회사에선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후배들을 위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미리 은퇴를 준비한 덕분이었다.
은퇴생활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는 그의 요즘 소득은 한 달 평균 650만원 정도.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낫다. 서울, 분당, 안산, 산본 등에 보유한 부동산의 임대수익이다. 그는 현재 소형 아파트(56.1㎡) 5채, 다가구주택 1채, 상가 등을 보유하고 있다. 시세로 따지면 18억원 정도 된다는 게 이씨 설명이다. 2~3년 전만 해도 800만원 정도였던 임대수익은 최근 부동산 경기가 침체를 겪는지 조금 떨어졌다고 한다.
평범한 샐러리맨 출신인 이씨가 이러한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대기업을 다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임원이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월급쟁이로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궁금증은 얼마가지 않아 풀렸다. 그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것이라며 내민 조그만 상자에는 얼추 봐도 100개 넘는 통장이 모여 있었다. 남부럽지 않는 은퇴생활을 하는 그에게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버는 돈의 60% 이상은 무조건 저축을 했어요. 특별히 포트폴리오를 짜지 않았지만 이자율이 높거나 수익이 날 만한 금융 상품은 한 번씩 다 한 것 같습니다. 쓸 거 다 쓰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요.”
시중에 나온 금융 상품의 이자율이나 수익률의 비교표를 만들어 투자에 참고하기도 했다. 그는 월급쟁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주식 투자만은 하지 않았다. 전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나섰다간 쪽박 찰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가 은퇴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해외 지사에 근무하고 돌아온 1980년대 말부터다. 건설사에 있으면서 리비아나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에서 근무할 당시 유럽이나 일본 사람들이 젊어서부터 은퇴 준비하는 것을 보고 그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4년 정도의 해외 지사 생활이 그의 안목을 넓혀주었다고 말했다.
“저축한 돈 소형 아파트에 과감히 투자”
은퇴 후 마련한 자금으로 창업을 하지 않은 것은 젊어서 사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봉제완구 사업을 하기도 했던 그는 사업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사람 문제’로 골치를 썩이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업종을 찾다보니 시작한 것이 부동산 임대업이었다. 현대건설, 한양, 남광토건 등 건설 업종에 종사하면서 터득하게 된 부동산에 대한 노하우도 한몫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버는 돈으로 골프 치러 다닐 때 좋은 부동산을 잡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어요.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적어도 10번은 직접 가봤어요. 그 땐 취미가 돌아다니면서 집 구경하는 거였죠.”
그가 저축한 돈으로 처음 구입한 것은 11가구가 살 수 있는 다가구주택이었다. 1996년 당시 다가구주택은 부동산 시장에서 눈 여겨 보는 물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대수익을 염두에 둔 그에게는 매력 덩어리였다.
그는 저축으로 어느 정도 자금이 마련되면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부동산 시세 차익보다는 임대수익을 노릴 수 있는 입지의 부동산을 택했다. 시간만 나면 틈틈이 좋은 아파트를 찾아다녔다. 세금을 감면받기 위해 소형 아파트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후 그는 3~4년 단위로 아파트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역세권을 중심으로 매매나 전세 가격이 오를 만한 곳을 물색했다. 또 대단지의 녹지공간이 넓은 아파트에 초점을 맞췄다. 주위 부동산 시세뿐만 아니라 세입자까지 꼼꼼히 따졌다. 그의 부동산 투자는 운 좋게도 딱딱 맞아 떨어졌다. 그가 구입했던 아파트들의 전세·매매가는 그 새 3배 가까이 뛰었다.
그는 사업자 등록이나 세금 문제, 임대 관리 등을 직접 처리한다. 비용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경제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가 재산을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운’도 작용했다. 실패를 경험했던 봉제완구 사업은 그에게 실패 경험과 함께 또 다른 선물을 안겨줬다. 경기도 분당에서 사업을 시작했던 그는 분당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소형 임대아파트와 상가 분양권을 받게 된 것. 그는 지금도 분당 상가에서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임대아파트는 초기 부동산 구입의 자금원이 되기도 했다.
이씨의 은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 아내 최씨의 역할도 컸다. ‘짠돌이’ 남편의 뜻을 아무 말 없이 따랐기 때문. 이씨는 아내와의 호흡이 척척 맞았다고 하지만 최씨는 속이 시꺼멓게 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창 고생을 많이 할 땐 여름 장마 때. 자고 일어나면 방안에 빗물이 새 물이 흥건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60% 이상 저축하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아이들한테 쓸 돈이 많잖아요. 애들한테 넉넉히 해줄 수 없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어요. 지금요? 이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너무 좋죠. 쫀쫀하다 싶을 정도로 살지 않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죠.”
“부동산으로 돈 벌었지만 지금은 주식이 유망합니다”
이제 은퇴 준비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이씨는 투자 흐름을 잘 타라고 말한다. 최근 그의 투자 방식은 완전 바뀌었다. 그는 지금까지는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대신 주식시장에 관심을 기울일 때라는 것. 그는 여유자금 중 절반 정도를 펀드와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투자도 흐름을 잘 타야 합니다. 그동안 대세였던 부동산 투자가 이제는 주식 투자로 옮겨가고 있어요. 주식 투자를 해볼까하고 요즘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부부는 장보러 나갈 거라고 한다. 다음 날 동생네 가족 10여 명을 초대해 ‘닭백숙 파티’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닭장을 보며 “내일 살이 오른 몇 놈을 잡아 근사한 잔치를 벌일 것”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주개발지방공사 사장 출신 서철건씨
“평일에 골프치고 주말엔 쉬어야지요”
은퇴한 주변 친구들이 저를 가장 부러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열정적으로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겁니다.”
3년 전까지 공기업 사장으로 있었던 서철건씨(65). 퇴직 후 지금은 제주 서귀포에서 귤 농사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지난 7월12일 가락동 아파트에서 만난 서씨는 이제 월급쟁이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삼다수’로 유명한 제주개발지방공사 사장이 ‘월급쟁이’로서는 그의 마지막 명함이었다. 2004년 9월 이 곳을 나온 이후 몇 차례 러브콜이 왔지만 그에게는 이를 모두 고사할 만큼 관심이 가던 일이 있었다. 바로 귤 농사였다.
귤 농사가 한창인 시즌에는 아예 제주에 내려가 산다. 일 년이면 7개월이다. 젊었을 땐, 이 일이 막연하게 노후에 고향에서 심심함을 달래줄 일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퇴직 후 본격적으로 나서서 해보니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진 느낌이라고 한다.
“소작을 줘왔던 귤 농사를 직접 시작해 첫 해는 완전 실패작이었습니다. 물론 시작하기 전 열심히 공부를 하긴 했었지만 생각처럼 따라주질 않더군요. 하지만 귤 농사도 자식 농사와 비슷했습니다. 제대로 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인내하면 단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또 한 번 알았습니다.”
귤 맛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선 햇볕이 덜 드는 밑쪽의 가지를 쳐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보통 3년 동안은 수확량이 적어지지만 그 후부터는 더욱 당도 높은 귤을 얻을 수 있다. 남들은 3년간 줄어드는 수확량 때문에 쉽게 감행하지 못하는 일이다. 겨울이 되면 수확한 귤을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하지만 워낙 품질이 좋아 한번 맛을 본 이들이 알아서 다 주변에 팔아준다. 현재 귤 농사로 그가 벌어들이고 있는 수입은 월 500만원. 부동산 임대수입까지 합치면 월 1000만원이 넘으니 그야말로 ‘부자 은퇴자’다.
상가 투자 후 대출 받아 또 한 채 사들여
“사실 재테크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습니다. 다만 확실한 정보를 얻으면 놓치지 않고 투자한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풍요로운 은퇴생활이 우리에게도 그다지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1966년 국민은행에 취직하고 3년 후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월세방에서 시작해 결혼생활 5년 만에 제기동에 한옥 한 채를 샀다. 1977년 강남 개발이 한창인 방배동으로 이사했지만 치안이 불안해 신길동 단독주택으로 옮겨왔으니 강남 부동산 수혜는 받지 못했던 셈이다.
지금 살고 있는 가락동 아파트는 20년 동안 살고 있는 집이다. 살고 있는 집이라 시세차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은행원 시절 상가 투자에는 관심이 많았다. 열심히 정보를 수집해서 40세 되던 해 어렵게 모은 돈으로 구로동의 상가를 사들였다. 몇 년 후 이 상가를 담보 잡혀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또 다른 상가를 한 채 더 장만했다. 상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이자를 지불할 요량이었다. 현재 두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수익은 180만원이고 시세차익도 세 배가 넘는다.
그가 어렵게 고학하던 대학시절 할머니께 물려받았던 귤 농장도 처음엔 5280㎡ 정도였다. 당시엔 고작 평당 3.3㎡당 900원에 불과했던 땅이었다. 결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 많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그 땅을 팔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 되돌아올 터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30대 중반부터는 오히려 여유가 생기면 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여 지금은 6500평(2만1450㎡)에 이르게 됐다.
“제주도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농터를 팔아 그 돈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 망한다’고요. 꼭 이 말을 맹신해서만은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니 이 농장을 계속 늘려온 게 백 번 잘했단 생각이 들더군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못 견디고 처분했었다면 지금의 정신적 풍요로움까지 잃어버렸겠죠.”
귤 농사보다 자식 농사 잘 해
그에게 있어 풍요로운 은퇴생활의 또 다른 비결은 바로 자식들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제주에서 자식 농사 잘 지은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여섯 남매가 모두 대기업 과장, 한의사, 유치원원장, 약사, 은행원 등 사회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직업인으로 별 탈 없이 자라줬기 때문이다.
“남들 다 하는 과외 한 번 안 시켰어요. 윗놈이 아랫놈을 이끌어주는 식이었죠.”
그는 자식들에게 이미 학비까지의 지원이 전부라고 선포해 뒀다. 모두 사회에서 부족함 없이 활동할 수 있으니 결혼 비용도 다 스스로 해결하게 했고, 아직 미혼인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다.
“술을 먹고 늦는 날에도 숙제 검사는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특별하게 무언가를 해줬다기보다 함께 탐구하며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들을 내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노후 준비의 적은 자녀 교육비라는 말은 서씨에게 해당 사항이 적은 얘기다. 물론 여섯 자녀를 키우는데 드는 교육비가 만만찮았던 건 사실이다. 은행에 다녔던 덕에 세 자녀의 교육비는 지원을 받았지만 나머지 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교육보험만은 철저하게 들어놨었다고 한다.
열정이 있으면 고생은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맞을 수 있었던 가장 첫 번째 비결은 ‘열정’이다. 열정적인 사람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새벽 4시에 잠을 깬다. 또 정체된 것을 싫어해 늘 새로운 공부를 한다. 1980년대 후반 컴퓨터 보급 초기에 이미 독학으로 컴퓨터를 마스터했을 정도다.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기 위해 젊어서부터 고생만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는 아닙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젊게 살 수 있습니다. 습관들이 하나씩 쌓여가다 보면 그게 곧 생활이 되고, 그 생활이 다시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34년간 근무했던 국민은행에서도 그는 자기 관리가 철저해 후배들의 교육과 연수 업무를 도맡았다. 형식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명 한 명 멘토링을 해주고 집안 대소사까지 챙겨주면서 인간적인 교류를 쌓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평사원이었던 후배들이 임원이나 기업의 대표로 성장해서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안부전화를 하고 있다.
그가 쏟은 열정이 몸담았던 회사의 성과로 나타나 큰 보람을 느꼈던 적도 있다. 2001년 4월 제주개발지방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후 새로운 경영 마인드를 강조해 그해 30억원, 3년 되던 해에는 95억원 순익을 낼 수 있었다. 취임 당시 적자로 허덕였던 회사를 바꿔놓기 위해 숱한 사례를 분석하고 연구했던 결과다.
취미생활도 마찬가지다. 골프에 입문하고 1년 4개월만에 싱글을 기록해 친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거실의 장식장 한 줄은 아마추어 골프대회 상패나 싱글패, 홀인원 기념패 등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주말엔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골프 일과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주말 골프는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에 가깝다는 것.
그는 일, 사람, 취미 그 어떤 것이든 열정을 쏟을 만한 일이 있다면 일단 반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노후 대책을 위해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교류를 폭넓게 해놓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가 은퇴 준비를 잘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휴대전화 벨이 울리는 횟수가 은퇴 전에 비해 크게 줄지 않았을 만큼 저를 찾는 이가 많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