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전반

[르포] "국산밀, 다시 우리 식탁으로"... 100년 역사 끊긴 ‘우리밀’이 되살아나는 이유

곡산 2025. 11. 12. 07:29
[르포] "국산밀, 다시 우리 식탁으로"... 100년 역사 끊긴 ‘우리밀’이 되살아나는 이유
  •  전주=김현옥 기자
  •  승인 2025.11.11 14:41

 

잊혀졌던 우리밀, 다시 뿌리 내린다

"한국에서 밀은 사실 낯선 작물이 아닙니다. 이미 1세기경 중국을 통해 들어와 고려·조선시대에는 귀족과 왕실의 식탁에 오르던 귀한 음식 재료였습니다. ‘진맥(眞麥)’이라 불렸던 밀은 고려시대 국수, 조선시대의 혼례음식에서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농진청 식량산업기술팀 고종민 과장이
국산밀로 만든 라면제품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6일 전주 농촌진흥청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9회 국산밀 제과·제빵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만난 식량산업기술팀 고종민 과장의 말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밀 소비 중 수입산이 99% 이상 차지할 정도로 국산 밀 사용량이 미미하지만, 그 재배 역사는 뿌리가 깊다는 것에 향후 확산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있음이 확연했다.

수입밀이 국내 밀가루 소비를 전담하는 실정에 이른 것은, 여름 장마가 많은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재배가 쉽지 않은 탓이다. 밀은 가을에 씨를 뿌리고 여름 전인 6월 초에 수확해야 하기에, 오랜 세월 한국에서는 ‘장마 전에 익는 밀’만 살아남은 셈이라는 것이 고 과장의 설명이다.

“그러던 중 6·25전쟁과 미국의 원조 곡물(PL480)이 들어오면서, 국내 밀 생산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한때 자급률이 25%를 넘었지만, 이후에는 0.03%까지 떨어졌어요. 국산밀의 맥이 완전히 끊어졌던 것이지요.”

 

“국산밀로 빵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연구진

1980년대 후반부터 농진청은 다시 밀 품종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두 ‘국수용 밀’뿐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 빵·과자용 품종을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전에는 밀가루로 국수만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단백질 조성과 글루텐 구조에 따라 ‘빵용·면용·과자용’으로 세분화된 품종이 개발됐습니다.”

빵용 밀 황금알 백경 등은 단백질 함량이 12% 이상이고, 잘 부풀어 오르는 HMW글루테닌5+10을 보유하고 있으며, 면용 밀은 쫄깃한 식감을 위해 아밀로스 함량을 24%에서 20%를 낮추는 동시에 단백질 함량은 11~12%가 되도록 조성한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맞춤형 품종을 만들어낸 덕분에 이제는 국산밀로도 빵·라면·쿠키가 모두 가능하다고 고 과장은 설명했다.

농진청은 빵, 과자 또는 기능성 식품을 생산할 수 있는 다양한 국산밀 품종을 개발 보급하고 있다.
 

밀을 1년에 네 번 키운다?... ‘세대촉진 기술’ 개발

밀은 원래 한 세대를 키우는 데 1년 가까이 걸린다. 씨를 뿌리고, 싹이 자라 다음 씨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진청 연구진은 빛·온도·습도·환기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장치를 만들어, 한 세대를 3개월 만에 완성하는 ‘세대촉진(Speed Breeding)’ 기술을 개발했다.

“춘화처리(8℃, 4주)와 장일처리(22시간 조명, 7주)를 결합해, 노지에서 227일 걸리던 과정을 88일로 줄인 겁니다. 이제 1년에 4세대를 거듭할 수 있어, 품종 개발 기간도 13년 걸리던 것이 8년으로 단축되었어요.”

 

유전자 분석으로 ‘정확한 품종 선택’... 유전체 선발 시스템

“밀 육종은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합니다. 국내외 밀 유전자원 1,967점 중 핵심 614점을 선정해, DNA(SNP 칩) 분석과 표현형(출수기, 수량, 내병성 등)을 함께 기록합니다.”

이 정보를 조합하면 어떤 품종이 빵용으로 좋을지, 면용으로 알맞을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 즉,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좋은 씨앗’을 고를 수 있는 디지털 육종 시대가 열렸다고 고 과장은 말했다.

 

지역별로 살아나는 ‘우리밀 산업 밸리’

밀 연구가 성공해도 밀가루로 가공할 곳이 없으면 시장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농진청은 2022년부터 ‘밀 산업 밸리화 시범단지’를 4곳(김제·구례·구미·함양)에 조성했다.

각 지역에는 하루 12~14톤을 제분할 수 있는 소형 밀가루 공장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생산된 밀가루는 지역 소상공인, 제빵소, 학교 급식 등에 공급되며 ‘지역 순환형 국산밀 체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각 지역별 현황을 보면, 전북 김제의 경우 우리농촌살리기 네트워크가 빵과 국수를 함께 만드는 종합 가공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곳에선 Satake(일본) 설비로 하루 12톤의 국산밀을 제분해 마켓컬리·이마트 등지에 공급하고 있다.

전남 구례의 구례밀영농조합은 우리나라 1호 국산밀 제분소를 리모델링해 최신 Bühler(스위스) 설비로 교체했다. 연간 2,000톤 규모의 백밀가루·유기밀가루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경북 구미의 샘물영농조합은 경상도 사투리인 ‘밀가리’를 브랜드화해 친근감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터키 Imas 설비를 도입하고 프랑스식 ‘T등급(회분 함량)’ 체계를 적용한 고품질 제분 시스템을 자랑한다. T45~T65 등급별로 빵·과자 용도를 구분하고 있다.

경남 함양의 지리산우리밀은 유기농·HACCP 인증과 Satake 설비로 하루 12톤의 국산밀을 생산한다. 이 곳은 ‘산아래 우리밀’ 브랜드로 고품질 제품 유통이란 차별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들 네 곳의 공장을 모두 합치면 하루 약 50톤의 국산 밀가루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제분소가 아니라, 국산밀 산업의 재도약 거점입니다.” 윤송 연구사는 의미 심장한 말을 전했다.

 

빵·면·과자, 용도별 맞춤 품종의 시대

지금까지 농진청이 개발한 밀 품종은 총 42종으로, 빵용 6종, 면용 25종, 과자용 4종으로 세분화돼 있다. 

▲ 빵용 ‘황금알’과 ‘백경’은 단백질 함량 14% 이상으로 부푸는 힘이 강하고 제빵성이 우수한 품종이다. 농진청은 실제 기능장들과 협업해 베이글, 식빵, 바게트 등 제품 테스트를 완료했다. ‘황금알’은 원래 이름이 ‘황금’이었으나 상표 등록 규정에 막혀 이름을 바꿨다는 후문이다.

▲ 면용 품종인 ‘새금강'과 ‘한면’은 장마철에도 싹나지 않는 ‘수발아 저항성’이 높고 면 색이 밝은 것이 특징이다. 전국 밀 재배지의 절반 이상이 이 품종을 사용하고 있다.

▲ 과자용 ‘고소’ 품종은 쿠키가 크게 잘 부풀고, 균열이 고르게 생겨 제과공장에 적합하다. 천안 호두과자, 전주 수제 초코파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

 

빵도, 국수도, 라면도 ‘우리밀’로..."산업이 아니라 문화로 발전"

농진청 식량산업기술팀 윤송 연구사가
정부 정책사업인 우리밀산업밸리와
4개 권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밀가루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농진청 식량산업기술팀 윤송 연구사는 “이전엔 우리밀로 빵을 만들면 질기고 딱딱한 질감이었지만 이제는 수입밀과 견줄 만큼 부드럽고 풍미도 좋다.”고 말했다.

김제에서는 국수, 구례에서는 빵, 함양에서는 통밀가루, 구미에서는 부침가루 등 지역마다 특화된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연드림, 초록마을, 마켓컬리 같은 유통망을 통해 소비자도 점점 더 쉽게 우리밀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윤송 연구사의 맺음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들 우리밀 제분소는 단순한 밀가루 공장이 아닙니다. 국산밀이 자라고, 가공되고, 먹거리로 완성되는 지역 문화의 시작점입니다. 과거 전쟁과 수입 곡물에 밀려 사라졌던 우리밀은 이제 다시 기술과 지역의 힘으로 식탁에 돌아오고 있는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