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경영

오랜전통의 히트상품을 밀어내고 왕좌에 오른 10개의 빅 히트상품 스토리

곡산 2008. 4. 1. 18:28
오랜전통의 히트상품을 밀어내고 왕좌에 오른 10개의 빅 히트상품 스토리
히트상품 ‘왕중왕’

히트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품질향상을 위한 연구개발은 기본이고 소비자를 움직일 수 있는 마케팅 능력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트렌드도 중요하다. 많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히트상품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마케팅은 기능의 차별화는 있을지언정 품질의 차별화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최근의 기술력을 감안할 때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히트상품이 경쟁제품에 의해 점유율 2위로 내려앉은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10개 분야 20개 히트상품의 자리바꿈을 통해 그들만의 성공마케팅을 들여다본다.

기능성 음료 _ 비타500
라면 _ 신라면
아이스크림 _ 월드콘
맥주 _ 하이트
전기밥솥 _ 쿠쿠
MP3 _

디지털카메라 _
#1
캔커피 _ 레쓰비
해열진통제 _
게보린
가정용 에어컨 _ 휘센

 히트상품 비결 '그때 그때 달라요'

때 제약업계에는 소위 ‘3대 금기 사항’이라는 게 있었다. ‘박카스, 훼스탈, 사리돈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시장을 개척한 것은 물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확고부동한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상대로 한 신제품 개발은 ‘화약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3대 금기 사항 가운데 두 제품의 아성이 무너졌다. 1985년 해열진통제 사리돈이 게보린에 의해 함락된 이후 지난해에는 기능성 음료시장에서 영원한 히트상품이었던 박카스까지 비타500에 맥없이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특히 비타500은 출시 당시만 해도 박카스를 경쟁상대로 겨냥하지 않고 새로운 틈새시장 개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박카스의 패배와 비타500의 승리는 마케팅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대표하는 대명사는 부라보콘이다. 40대 이상에게는 어린이날이나 생일 때 먹는 별식으로 각인돼 있다. 부라보콘은 지금도 아이스크림의 대명사다. 판매에서 부라보콘을 앞지른 지 벌써 10년이 되었지만 월드콘은 부라보콘이 가지고 있는 아이스크림의 대명사로서의 지위까지는 탈환하지 못하고 있다. 맥주시장도 비슷한 양상이다. 하이트가 한층 높고 두꺼운 벽을 쌓고 있지만 그 자리에는 원래 OB맥주가 있었다. 맥주 하면 OB맥주를 떠올린 후에야 하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히트상품 자리 올라
라면은 조금 다르다. 30대 중반 이후라면 당연히 삼양라면이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신라면이라고 말한다. 에어컨도 위니아를 말했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엔 모두가 휘센이다. 그러나 휘센은 아직 대명사의 지위로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다. LG라는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더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제조업체는 신규 상품을 출시할 때 ‘히트상품’의 꿈을 꾼다. 마치 서민들이 로또를 구입하며 대박을 꿈꾸는 것과 같다. 그러나 히트상품은 로또와는 전혀 다르다. 로또는 100% 운에 의해 당첨되지만 히트상품은 많아야 50%의 운이 명암을 가른다. 또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을 때에는 더 높은 꿈을 꾼다. 바로 이 같은 대명사로서의 위상이다. 미니밴을 ‘봉고’라 부르고, 트렌치코트를 ‘바바리’라 부르는 것처럼 자사의 상품이 그렇게 불려지길 원한다. 여기에 떡볶이=신당동, 족발=장충동을 연상시키듯, 자동차=벤츠, 전자제품=소니와 같은 연상효과까지 기대한다.
이 같은 위상을 갖는 데에는 시간까지 요구된다. 그만한 투자와 지속적인 마케팅이 보장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히트상품 가운데에는 이 모든 것을 충족할 만한 히트상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섰다가도 곧이어 후발주자에게 따라잡히고, 또 얼마 후엔 밀려났던 선발주자의 재반격에 밀리고 만다.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인지도, 점유율 등을 필요한 시간만큼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제품들로부터 그 가능성은 기대할 수 있다. 설사 지금 당장은 점유율 1위를 놓쳤다 하더라도 재기 마케팅을 통해 몇몇 제품들의 과거 영광 재현은 결코 불가능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코노미플러스>가 취재 대상으로 삼은 10개 분야 20개 히트상품과 관련 해당 업체에서 내놓은 자료를 분석해 보면 제품의 질적 차이를 거론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제품의 질을 따져 구매를 결정하는 소비자는 소수라는 반증이다. 이는 히트상품의 반열에 올랐던 제품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뒷받침하고 있어 품질보다는 기능적 차이라는 설명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소비자에게 두 눈을 가리고 경쟁이 한창인 참진이슬로와 처음처럼을 마시게 했을 경우와 반대의 경우, 그 맛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소비자가 얼마가 되겠는가. 그러나 점유율은 확연히 다르다. 해당 업체 관계자들도 한결같이 기술적 차이를 강조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기능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하다.
이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비슷한 품질을 갖췄으면서도 서열, 즉 점유율은 분명하게 갈린다. 근소한 차일 수도 있지만 앞서 예로 든 소주시장처럼 확연하게 점유율이 구분되는 경우도 많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마케팅에서의 차별화라고 설명한다. 상품의 홍수 속에서 특정 상품이 소비자에게 꽂히는 것은 그것만의 차별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트상품들이 가지고 있는 차별화된 마케팅을 종합하면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방법론적 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그 무엇’에 마케팅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 무엇은’ 기능일 수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웰빙일 수도 있으며, 감성일 수도 있다. 또 호감도, 신뢰도, 아니면 히트상품이라는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비타민의 중요성에 대해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아예 건강 관련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비타민>인 경우도 있다. 이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비타민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현대인의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다. 웰빙 바람을 타고 한층 건강을 챙기려는 요즘 세태에서 비타민은 이제 그냥 흘려듣고 넘어갈 수 있는 ‘경고’가 아니다. 예전엔 상식 정도로 알고 있던 비타민의 중요성이 온갖 매스컴들에 의해 심화학습돼 버린 소비자들은 본능적으로 비타민 성분이 함유된 비타500을 찾을 수밖에 없다.
마케팅 컨설팅사인 모라비안바젤 컨설팅은 <블랙홀 시장 창조의 전략>이라는 책에서 “박카스와 비타500의 싸움은 타우린과 비타민의 싸움이 아니라 기존의 습관과 새로운 지식의 충돌”이라고 말한다. 비타민의 중요성이 매스컴에 의해 학습된 소비자들에게 타우린의 기능은 별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이트의 암반수도 비슷하다.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이 생수를 사먹고 있지만 먹는 물에 대한 불심감이 강했던 당시 지하 150m의 안전하고 깨끗한 100% 암반수라는 하이트의 마케팅전략은 소비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경쟁사였던 두산의 페놀 방류 사건은 물에 대한 경각심을 한층 높여주었고, 암반수라는 기능적 차이를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한 하이트는 성공적인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고 있는 웰빙 바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웰빙을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출시 이후 사회적 트렌드에 의해 동반상승 효과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비타500은 대표적인 제품이다. 또 소비자가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관심사를 하이트는 마케팅에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웰빙·건강·감성 등 효과 높아
예나 지금이나 건강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때문에 이 같은 소비자 특성이 히트상품을 침몰시키고 급기야 기업의 운명까지 뒤흔든 사례도 있다. 삼양라면과 OB맥주다. 우지 파동에 의한 삼양라면의 침몰은 라면업계의 지각변동으로 이어졌고, 페놀 방류 사건에 의한 OB맥주의 침몰 역시 맥주시장에 새로운 강자를 탄생시켰다.
히트상품들이 선호하는 두 번째 마케팅은 소비자의 감성에 접근하는 것이다. 올림푸스 디지털카메라와 MP3 아이리버의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올림푸스는 당시 모든 디지털카메라업체들이 제품 자체의 성능을 강조한 CF를 제작했던 것과는 달리 ‘추억’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문화적·감성적으로 접근했다. 전지현의 ‘마이 디지털 스토리’와 ‘나와 올림푸스만 아는 이야기’ 등의 CF는 추억이 담긴 스틸 컷이 차례대로 펼쳐지며 전지현의 디지털 스토리를 소비자와 공유한 것이었다. 가슴으로 느끼도록 한 감성적 접근은 CF송이 휴대폰 벨소리 다운로드 1위가 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리버도 소비자들의 눈과 귀, 손과 마음을 사로잡고자 튀는 디자인, 튀는 제품 사양, 튀는 서비스로 시장을 공략했다. 2002년 초기 MP3시장은 플래시 메모리 타입으로 사각형이었다. 그러나 아이리버는 통념을 깨고 삼각기둥의 MP3를 내놓았다. 이어 잠수함 스타일의 유선형 모델까지 내놓으며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했다.
해열진통제 게보린도 ‘맞다 게보린’이라는 광고 카피가 당시 전 국민을 눈물과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이산가족 찾기’와 연결되면서, 회사 측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감성 마케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수십 년간 헤어졌다 극적으로 다시 만난 이산가족들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게보린의 광고 카피였던 “맞다 맞다”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소비자의 기호를 자극함으로써 빛을 본 히트상품도 있다. 신라면의 콘셉트는 ‘얼큰하고 매콤한 맛’이다.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한국식 표현은 맵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난 후 ‘시원하다’는 한 마디다. 농심 관계자도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고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맛인 매운 맛을 키워드로 잡았다”고 말했다. 신라면의 콘셉트는 뜨거운 매운 맛으로 속이 시원한 국물. 붉은 고추와 소고기가 잘 조화된 얼큰하고 매운 국물로 한국인이 선호하는 기호를 라면 국물에 재현해 때마침 터진 삼양라면의 우지 파동 속에서 라면시장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국내 많은 히트상품들은 자력에 의한 경우보다는 경쟁 제품의 악재에 힘입어 반사이익을 얻은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갖는다. 경쟁 제품의 악재를 놓치지 않고 마케팅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시장의 판도를 변화시킨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기회만으로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또 다른 경쟁 제품들은 왜 히트상품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부지리라는 평가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지 파동에 의한 삼양라면의 위기로 부상한 신라면, 부라보콘의 해태제과 부도에 의해 점유율을 굳힐 수 있었던 월드콘, 페놀 파동으로 OB맥주 등 두산제품 불매운동 위기에 이어 소비자의 요구를 꿰뚫은 하이트, 삼성전자의 시장 오판의 틈새를 파고든 아이리버 등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어떤 특정 마케팅만으로 히트상품이 됐다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히트상품을 만들기 위한 마케팅의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하는 논쟁과 비슷하다. 시대의 트렌드를 적절히 활용했던 히트상품이 존재했는가 하면 히트상품이 시대의 트렌드를 만들었던 경우도 있었다. 즉,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제품으로 성공하기도 했고, 제품 출시 이후 소비자의 요구가 변화해 히트상품으로 부상한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국내 대표적인 히트상품들이 기존의 히트상품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편, 기존 히트상품들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재반격하는 마케팅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 하다. 최근 기존 히트상품들의 재반격 마케팅이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능성 건강 드링크시장|

 웰빙 바람 타고 질주하는 비타500 

타500은 ‘식품’, 박카스는 ‘일반 의약품’이다. 비타500은 슈퍼, 할인점, 편의점이나 사우나, 골프장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비타민 음료다. 하지만 박카스는 슈퍼나 편의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일반 의약품이기 때문에 약국에서만 판매된다. 하지만 특성이 다른 이 두 제품은 드링크시장의 맞수로 불린다.
특히 비타500은 지난해 10월, 10억 병 생산돌파를 기록하며 총 12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신화를 쏘아 올려 ‘박카스 신화’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2001년만 해도 매출액 기준으로 비타500(53억원)은 박카스(1850억원)의 3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비타500이 40년 전통의 박카스를 대적하기에는 벅찼다는 것이 출시 초기 이 두 제품의 경쟁에 대한 평가였다.
동아제약의 박카스는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드링크다. 1961년 정제 형태로 처음 출시된 박카스는 1963년 현재와 같은 드링크 형태로 바뀐 뒤 2005년까지 약 152억 병을 넘게 팔았다. 지금까지 팔린 병의 길이를 합하면 지구를 45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박카스란 제품명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간 보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하던 중 독일 출장에서 함부르크시청 앞의 술과 추수의 신 박카스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당시 회사명이나 성분명을 이용해 제품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시대에 의약품에 신화 속 이름을 붙인 것은 파격적이었다.
박카스의 마케팅은 처음 ‘간 보호’와 ‘술’에 중점을 뒀다. 음주 전후에 박카스를 복용하면 간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캠페인과 함께 전사원이 영업직원화 돼 출시 몇 달만에 ‘박카스-정’의 월간매출이 100정 포장단위로 1만 개까지 늘어날 정도였다. 그러나 1962년 봄 제제기술이 미숙한 탓에 정제의 외피를 형성하는 당의가 녹는 문제로 인해 대량 반품사태가 빚어졌다. 신속한 제품 개선 노력으로 당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이미지가 한 번 손상된 제품은 시장에서 호응도가 현격히 떨어져 새로운 대책을 수립해야 했다.

비타500, 박카스의 40년 아성 무너뜨려
동아제약은 정제 형태의 박카스를 당시 소비자 호응도가 높은 20CC 앰플제로 변경해 박카스 내복액으로 재발매했다. 청량감이 우수했던 박카스 내복액은 출발이 순조로웠지만, 앰플 용기로 인한 안전사고와 운반과정에서 파손사고가 자주 발생해 제품 개선을 한 두 차례 더 실시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나온 제품이 바로 현재와 같은 드링크 형태의 ‘박카스 D’였다. 동아제약은 사운을 걸고 대량생산, 대량광고, 대량판매 전략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발매 1년 만에 드링크시장 1위에 올라 40여 년 동안 서민의 피로회복제로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켰다.
이러한 박카스 40년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광동제약의 ‘비타500’이다. 비타500의 탄생은 광동제약의 드링크시장에 대한 오랜 도전에 비춰보면 아주 작은 발상에서 출발했다. 1975년 광동쌍화탕을 의약품 드링크로 출시해 크게 성공했지만, 2000년 의약분업 이후 한계에 봉착했다. 쌍화탕만으로는 계절적인 비수기를 극복할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1990년 초 식품 드링크인 운지천 개발에 성공했지만, 이것도 유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다시 드링크시장에 도전한다는 것은 광동제약으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지난 2000년 전국적으로 비타민 열풍이 불었다. 이는 제약업계에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트렌드였다. 드링크류의 판매를 책임지고 있던 유통사업부에서 비타민C를 물에 녹여 ‘마시는 비타민C’라는 콘셉트를 내놓았다. 정제에 비해 훨씬 쉽고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발상으로 비타500 개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광동제약의 침체된 기업 상황으로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실화되지 못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알약이나 과립, 그리고 빨아먹는 타입의 비타민C가 시장의 강력한 적수로 존재하는데, 과연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경영상황도 부도 위기에 몰릴 만큼 좋지 못했고, 해당사업부도 연이은 신제품 발매 실패로 존폐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식이 오히려 약이 됐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벼랑 끝 선택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드링크 개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특히 기업의 성장동력인 신제품 개발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당시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듭 고민 끝에 나온 결과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개념으로는 선발 브랜드와의 경쟁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결국 성장은커녕 생존까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많은 회사들이 드링크 시장에 뛰어들어 사운을 걸고 경쟁을 벌였지만, 찻잔 속의 회오리로 머물다 사라졌다. 광동제약의 ‘운지천’도 이러한 제품 중 하나였다.
그래도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이에 철저한 환경 분석을 통한 시장성 분석과 그동안의 실패 경험을 교훈삼아 판매와 유통전략에서부터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기존 비타민C시장에서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레모나 등 과립이나 정제 형태의 선발주자와는 차별화되고, 자양강장 드링크시장의 강력한 선두주자인 박카스와는 직접적인 경쟁을 피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지금은 맞수가 됐지만 출시 이전만 하더라도 박카스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박카스 피해 틈새제품으로 출시
이 같은 고민 끝에 치열하게 맞서게 될 수밖에 없는 시장 경쟁을 피하고, 새로운 틈새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기로 했다. ‘마시는 비타민C’가 기존의 비타민C시장과 드링크시장을 합친 듯한 이미지를 주다보니 경쟁업체들은 이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견제도 의외로 적었다.
이처럼 ‘마시는 비타민C’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자 했던 전략이 주효함으로써 비타500은 블루오션에서 순탄한 항해를 시작했다.
비타500의 순탄한 항해의 이면에는 과감한 투자가 밑거름이 됐다. 비타500 생산을 위해 지금까지 투자된 금액은 400억원이 넘는다. 무방부제 제품 생산을 위한 투자비용만도 60억원을 상회하며 최첨단 장비와 현대화한 설비는 동양 최대 규모다.
특히 유통전략은 비타500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제약회사가 약국 유통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슈퍼나 편의점 등 일반 유통에 과감하게 도전한 것이 적중했다. 아마 약국시장만 고집했다면 오늘의 비타500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광동제약 관계자는 밝힌다. 약국을 벗어난 유통망의 확대가 소비자층의 확대와 맞물렸다는 점이 비타500의 드링크시장 석권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유통망을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인 상권 분석을 통해 잠재력 있는 지역은 단계적인 지역 분할을 통해 철저히 아메바식으로 추진한 것이 촉진제 역할을 했다.
가격도 차별화했다. 300원대의 박카스와 800~1500원대의 중고가 드링크가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시장에서 비타500은 그 중간의 사각지대인 ‘500원 중저가 지대’를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 ‘비타민C 500mg을 함유한 비타500을 500원에 판매해 500억원 매출을 일으키자’는 다소 엉뚱한 콘셉트로 영업을 시작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타500은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동제약 관계자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 매장에 깔아놓더라도 소비자가 선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판촉전략은 매번 생존을 건 의사결정의 연속이었다”며 “발매 초기에는 단순히 제품과 브랜드를 알리는 판촉전략에 주력하다가 점차 기능성 드링크로서의 이미지로 넓혀갔다”고 설명했다. 물론 지금은 브랜드화 전략을 위해 무방부제 무카페인의 기능적 가치와 웰빙이라는 정서적 가치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비타500은 지난 2004년 빅 모델인 ‘비’를 통해 타 경쟁사 대비 젊은 브랜드 이미지와 개성을 한층 강화했고, 올해는 ‘이효리’를 모델로 선정해 생기 있고 건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비와 이효리를 모델로 쓴 이후 10대와 20대의 음용율이 크게 올라 간 것으로 회사 측은 분석하고 있다.
제약회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온라인마케팅 활용 전략도 과감히 전개했다. 다음 등 포털사이트와 온라인게임업체 등과 공동 마케팅을 진행한 한편,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도 오픈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방문객 수가 5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비타500 홈페이지 회원수는 17만 명을 넘는 등 온라인마케팅은 큰 성공을 거뒀다.
또 그동안 대기업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국제 스포츠 마케팅에도 10억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과감히 투자하기도 했다. 광동제약은 지난 8월 미국,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터키, 한국 등이 참가한 ‘비타500 WBC 2006’을 개최해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러한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광동제약은 비타500을 글로벌 음료 브랜드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걸음을 떼게 됐다. 또 비타민시장을 넘어 전체 음료시장을 대상으로 소비자층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마시는 비타민C라는 기능성 드링크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차근차근 진행했던 이 같은 전략이 소비자에게 다가가며 비타500은 블루오션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비타500은 2001년 출시 이후 매년 100% 이상 성장했고, 2005년까지 4년간 25배나 덩치를 키웠다. 올해 목표인 1500억원을 달성할 경우 5년간 40배 성장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비타500이 두각을 나타내자 봇물 터지듯 출시된 유사제품들로 인해 매출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바로 방부제 초과 함유와 벤젠 검출 논란이 그것. 비타500은 적합판정을 받았지만 비타민 음료 모두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선두 브랜드인 비타500도 소나기를 피하지 못했다.
현재 비타민C 음료시장은 비타500이 독주하고 있지만 기능성 드링크시장에서는 최근 박카스와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고 있다. 1분기 비타500은 249억원의 매출을 기록, 248억원의 매출을 올린 박카스를 따돌리고 드링크시장 1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2분기는 344억원의 판매고를 기록한 박카스가 329억원에 그친 비타500을 제쳤다. 지난해에도 1, 3분기엔 박카스가 2, 4분기엔 비타500이 매출 1위를 차지했다. 광동제약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했던 벼랑 끝 선택이 45년 전통의 박카스 신화를 무너뜨린 대박의 신호탄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 비타500은 ‘롱-런(Long-Run)하는 브랜드‘로 가기 위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세계 드링크시장을 제패할 수 있는 토종브랜드로 성장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 plus Tip

비타500 평택공장을 가다
무방부제 시설 갖추고 하루 230만 병 생산

노란 모자를 쓴 갈색 ‘병’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한 줄로 가기도 하고, 한데 뭉쳐 움직이기도 한다. 헤쳐모이기를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 두 줄 종대로 늘어선다. 10개씩 노란 포장박스에 담기더니, 작은 박스는 다시 더 큰 박스에 열 개 들이로 포장된다. 인라인 시스템을 따라 움직이는 비타500은 흡사 병사들의 열병식을 보는 듯하다.
비타500이 40년 아성의 박카스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경기도 평택의 광동제약 송탄공장을 찾았다. 온통 병과 병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없는 공장 안에는 비타민C 특유의 알싸한 향이 가득했다.
3개의 생산라인이 있는 송탄공장에서 하루 생산되는 비타500은 무려 230만 병에 달한다. 월 5000만 병이 넘게 생산된다. 광동제약은 지난해 10월 비타500 10억 병 생산을 돌파했다. 광동제약은 기존 드링크 공장에 약 200억원을 투자해 실시간 모니터링, 인라인 시스템을 개발하고 원료 투입에서 완제품까지 완전 자동화했다. 그래서 한 개의 생산라인을 관리하는 직원은 고작 4명. 이 공장의 드링크 생산라인은 동양 최대의 생산 설비 규모다.
“다른 유사업체들이 투자하지 못한 무방부제 시설에 60억원을 더 투자했습니다. 균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비타민 음료 제조에서 이것은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원료 배합에서부터 차에 실리는 모든 과정이 전자동으로 이뤄지도록 공정도 개선했습니다.”(박규점 생산본부 이사)
무방부제 제품인 만큼 생산 공정은 굉장히 까다롭다. 일단 한 번 공장 문을 나선 병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한 번 사용한 병은 절대 재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들어진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은 병에는 ‘광동’이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간혹 광동제약의 로고가 찍힌 병을 다른 유사 비타민 음료 제조업체가 재활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박 이사의 설명이다.
새 병은 한 번 세척된 후 살균 처리를 거쳐 병의 안팎으로 이물질이 있는지 검사된다. 내용물이 충전되고 뚜껑이 닫히기 전까지의 공정은 무균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내용물을 충전하는 핵심시설은 가장 철저하게 관리된다. 그래서 일반인은 출입 금지다.
병에 담긴 비타500은 살균처리 된 후 다시 내외부에 이물질 여부를 재검사하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먼지 등 이물질이 발견되면 라인 밖으로 튀어 나온다. 오전에만 10여 병이 골라져 나왔다.
한창 움직이던 생산라인이 갑자기 ‘삑삑’거리는 경고음과 함께 멈췄다. 공정 중 어느 하나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전체 시스템이 멈춘다고 한다.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 한 명이 포장단계에 있는 기계를 잠시 만지작거리자 라인은 금새 다시 움직였다.
생산된 비타500은 병뚜껑과 포장 박스마다 시리얼 번호가 새겨진다. 이 번호만 있으면 언제, 어떤 생산라인에서 생산됐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불만사항이 접수되면 이 번호를 역추적해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비타500 겉 라벨에는 원료와 함량이 적혀있는데 이 맛을 흉내 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박 이사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원료와 배합 비율을 안다고 해서 맛을 똑같이 흉내 낸다면 비타500은 살아남을 수 없겠죠. 그냥 배합하는 게 아닙니다. 원료를 숙성하는 시간, 배합하는 시간, 적정한 온도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이외에도 말 못할 비타500의 제조비법은 많습니다. 다른 업체에서 흉내 내지 못하는 맛을 만드는 것이 비타500의 성공 비결입니다.”

|맥주시장|

  암반수로 OB 침수시킨 하이트  

1970년대 OB맥주 사무실에서는 아침마다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영업부 직원들은 생산량을 초과하는 주문폭주 속에서 주문받기를 꺼려했고, 대리점 직원들은 한 상자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사무실 앞에서 장사진을 치는 것이다. 1977년 이후 OB맥주는 순매출액이 51%씩 증가하고, 이익도 100% 이상씩 신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맥주시장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OB맥주와 조선맥주(크라운맥주)의 양대 구조로 형성돼 있었다. 당시 경쟁구도는 OB맥주의 압도적인 우세로 약 70대 30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오랜 기간을 이어져 왔다. 당연히 맥주하면 ‘OB’로 인식되고, 크라운은 제한적인 업소와 지방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크라운맥주는 내세울만한 변변한 브랜드 없이 수십 년간 설움을 당해왔다. 술집 개업식에 크라운맥주 지점장이 찾아가도 뒤늦게 나타난 OB맥주의 평사원이 나타나면 술집 사장은 “귀한 손님이 오셨다”다며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구도는 1993년 하이트 출시 이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하이트는 기업명인 크라운을 뒤로 돌리고 새로운 브랜드명인 하이트를 내세웠다. 기업명인 크라운을 내세워서는 OB를 잡을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 하에서 브랜드 경쟁구도로 싸움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하이트의 신제품 출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박문덕 사장(현 회장)이다. 그는 1991년 3월 영업담당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취임했다. 취임한지 17일 후 그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 이른바 페놀 사건이 그것이다.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 원액 30톤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대구·경북지역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은 두산제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고, 두산의 상징 제품이었던 OB맥주도 시장점유율이 10% 이상 하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페놀사건에 대한 반사이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말 OB맥주는 시장점유율을 68%까지 회복했고 ‘1억 상자 매출’ 목표도 달성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30년 맥주시장의 판도를 바꾼 계기가 됐다.

‘물’의 중요성 강조한 마케팅 주효
크라운으로서는 천재일우의 반격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진로가 맥주시장에 뛰어들면서 스카우트 손길까지 뻗쳐왔다. 위기감이 사내에 돌기 시작했다. 박 사장은 급기야 총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마지막 상품’ 개발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1992년 5월 마케팅부를 신설, 신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경쟁사와 철저히 차별화된 제품을 만든다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품었다.
기존 크라운의 이미지는 쓴 맛이 압도적이었지만, 150m 지하 천연 암반수로 만든 깨끗한 맥주라는 콘셉트로 OB의 아성에 도전장을 냈다. 두산의 페놀 사건을 염두에 두고 ‘물’의 중요성을 강조한 마케팅전략이었다.
하이트 런칭 3개월만 에 실시한 구매실태조사에서 재구매율이 90% 이상으로 나타나 시장 진입은 성공적으로 조사됐다. 런칭 초반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하이트는 1993년 말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이트의 상승기류가 심상치 않자 OB는 1994년 2월 심혈을 기울인 작품 OB아이스를 출시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 아이스는 광고전략과 제품전략의 불일치로 시장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이트의 기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즈음 카스(진로쿠어스)가 시장에 진입했다. 비열처리 맥주라는 콘셉트로 무장한 카스는 진로의 유통력을 감안하면 상당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20대 시장을 겨냥한 아이스가 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하이트와 카스에 협공을 당하기 시작한 OB는 1994년 넥스를 내놓고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아이스와 넥스의 연속 출시에도 하이트의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OB가 유지해왔던 압도적인 시장점유율과 소비자지표 등은 믿기지 않을 만큼 추락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경쟁사는 그동안의 한풀이를 하듯 상승세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1995년 들어 OB는 경쟁사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멀티브랜드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즉 넥스는 20대 시장을, OB는 30~40대 시장을 방어하는 등 보유하고 있던 브랜드를 총동원해 역할분담으로 경쟁사를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의 틀에서 출시된 것이 OB라거였다. OB라거는 런칭 당시 30~40대 OB팬의 하이트로의 이탈을 막기 위해 출시된 제품이다. 경쟁사의 ‘물’이라는 콘셉트를 희석시키기 위해 ‘숙성’이라는 콘셉트로 대항했다. 또 진부한 OB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네이밍도 ‘OB라거’로 바꿨다. 이러한 OB라거의 런칭으로 끝이 보이지 않던 OB의 하락세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6년 들어서도 아이스와 넥스는 20대 시장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맥주시장의 절반 정도를 소비하는 20대 시장을 잡지 못하면서 하이트와의 전쟁은 애당초 결과가 뻔했다.
결국 하이트는 1996년 업계 1위를 탈환했다. 수십 년 동안 선택의 폭이 제한됐던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하이트는 사력을 다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당시의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경향에서 ‘물’이라는 콘셉트는 순식간에 소비자의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막강한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던 OB가 하이트의 출시를 그다지 위협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것 또한 하이트의 상승에 일조했다. 당시 OB와 하이트의 광고 논쟁도 하이트의 의도대로 신제품에 대한 관심을 한껏 올려주는 촉매제가 됐다.
기존 30~40대의 타깃을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낮추는 등 OB맥주의 공세에도 하이트맥주와의 간격은 점차 넓어져 가고 있었다. 하이트맥주는 지속적인 판매호조에 힘입어 1993년 출시 당시 30%선에 그쳤던 점유율이 1996년 43%를 차지하며 업계 1위에 올라섰고, 2000년 53%, 2006년 7월 현재 60%를 돌파하는 쾌조를 보이고 있다.
올해 맥주시장의 이슈는 나란히 선보인 신제품의 성장세다. OB맥주는 최장수 브랜드인 OB를 ‘OB블루’로 리뉴얼했으며, 하이트맥주는 프리미엄 맥주인 하이트 프라임을 단종하고 후속 브랜드인 ‘프라임 맥스’를 출시했다. 이들 신제품의 성공 여부가 향후 맥주 트렌드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캔 커피시장|

 레쓰비, 유통망으로 오리지널 잡아 

2005년 현재 캔 커피 음료시장 규모는 3000억원대. 시장은 점유율 75%를 차지하는 롯데칠성 ‘레쓰비’의 독주와 동서식품 ‘맥스웰하우스’, 코카콜라의 ‘네스카페’ 간의 공세로 형성돼 있다. 2005년 물량 기준으로 캔 커피 업체별 시장점유율은 롯데칠성 38.8%, 동서식품 23%, 코카콜라 15.2% 순이다.
캔 커피 음료의 대명사인 레쓰비는 현재 마일드와 프리미엄 2종이 있다. 1991년 2월 출시된 레쓰비는 당시 캔 커피시장을 주도하던 동서식품의 ‘맥스웰’과 코카콜라 네슬레의 ‘네스카페’에 밀려 초기 5년 동안 20%대 정도의 점유율에 그쳤다. 초기 레쓰비는 경쟁사 제품들과 싸우기에는 여러 가지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동서식품과 코카콜라 네슬레의 ‘커피전문회사’라는 강한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광고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커피 광고는 ‘이미지’에 대한 광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쟁사들이 각별히 신경을 쓰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에 레쓰비가 내세운 전략은 ‘100% 원두커피’라는 점이 전부였다. 물론 원두커피의 진한 맛과 함께 맛의 개선도 함께 이뤄졌다. 다양한 신제품 개발과 100% 콜롬비아 원두커피라는 차별화 마케팅에 점차 소비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장점유율도 꾸준히 상승곡선으로 변화를 나타냈다.

롯데의 막강한 유통력 활용
여세를 몰아 1997년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부드러운 맛의 캔 커피로 레쓰비 마일드를 리뉴얼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와 함께 광고 마케팅을 집중시켰다.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의 에피소드를 담은 ‘저 이제 내려요’라는 광고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어 1998년 시장점유율도 1위로 나타났다. 당시 레쓰비(35%)와 맥스웰하우스(22%)간의 점유율 격차는 13%였지만 2000년 들어 15%로 더욱 늘어났고 IMF 이후에는 아예 굳어져 버렸다.
캔 커피는 우리나라와 일본 등 소수 국가에서만 팔리는 제품이다. 커피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미주나 유럽 등지에는 캔 커피가 없다. 또 캔 커피는 스포츠음료나 주스 등과 대비되는 기호성 음료다. 주로 실내보다는 실외에서 마시기 때문에 광고나 판촉 등에서도 다른 접근 방법이 요구되며 특히 브랜드 파워가 중시된다. 대형할인마트나 편의점보다는 자판기의 매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도 있다.
캔 커피를 국내 최초로 출시한 선두업체는 동서식품. 1986년 첫 출시한 맥스웰 캔 커피는 일본 시장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했다. 커피를 음료수처럼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특히 캔이라는 활동적인 이미지는 커피를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동서식품은 런칭 초기 이 같은 콘셉트로 판매량을 늘리는데 마케팅을 집중시켰다. 주 소비 타깃을 20~30대 젊은 남자 대학생과 직장인으로 설정하고 제품별 특징을 최대한 살리자는 것이었다. 이어 1990년 초부터는 레쓰비와 네스카페 등 경쟁제품의 시장 진입이 이뤄지면서 타제품과의 차별화를 부각하는 방향으로 마케팅 자원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오리지널과 카페오레와는 달리 맥스웰 블랙터치(1991년), 맥스웰 카페리쉬 레규라(1993년), 맥스웰 레규라(1994년) 등 신제품이 소비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라인을 폐쇄해야 하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반면 레쓰비는 막강한 음료 유통력을 최대한 활용해 판매 물량을 늘리는 한편 막대한 광고비로 융단 폭격을 하고 있었다. 레쓰비의 공격적인 영업과 마케팅은 맥스웰에게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맥스웰은 결국 레쓰비의 독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네슬레와 롯데칠성의 참여로 맥스웰은 시장에서의 확고한 점유율 유지와 브랜드 리뉴얼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안아야 했다. 이에 동서식품은 커피음료로서의 위상강화를 위해 정통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인 ‘맥스웰 하우스’로 브랜드를 바꿨다. 제품 일부는 박카스로 기능성 음료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동아오츠카에 판매를 위탁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취약한 유통망을 보완하기도 했다. 동아오츠카도 포카리스웨트와 같은 기존 인기 제품의 유통망을 활용해 동서식품과 겹치지 않는 대학 등을 중점 공략했다.
광고전략도 변화를 꾀했다. 신인모델에서 빅모델을 활용해 오래된 맥스웰 하우스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결과 맥스웰 하우스는 급격히 추락하던 점유율을 서서히 회복시키는 데 가까스로 성공해 가고 있다.
2006년 캔 커피시장은 전년 대비 소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다 그동안 롯데칠성과 동서식품 등 제조업체간의 출혈경쟁으로 인해 소비자들에게 캔 커피는 저가이고 저급인 제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일반 캔 커피 대신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디자인과 맛의 프리미엄급 커피제품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업체들도 캔 커피시장의 확대와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는 맛과 품질을 고급화시켜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저가 캔 커피의 프리미엄급 시장으로의 이동이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곳은 동서식품. 이 회사는 제품별 특징을 최대한 살려 다양한 계층을 공략하는 한편 지난해에는 세계적인 커피브랜드인 스타벅스와 전략적 제휴를 통해 프리미엄 커피브랜드를 형성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롯데칠성도 기존 제품의 마케팅 활동을 강화해 브랜드 입지를 확고히 하는 한편 더욱 고급화된 신제품을 개발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는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10년 넘게 독주를 이어오고 있는 롯데칠성의 아성을 동서식품이 브랜드 인지도와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통해 얼마나 좁힐 수 있을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라면시장|

 매운 맛으로 뒤집은 신라면

1989년 검찰에 익명의 제보가 전달된다. 공업용으로 수입된 우지가 라면 가공에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식물성 팜유를 사용하고 있던 농심을 제외한, 대부분의 라면제조업체 간부들을 구속했다. 소위 ‘공업용 우지 파동’으로 삼양식품에는 수천억원대의 벌칙금이 부과되기도 했다. 긴 재판을 거듭한 끝에 1997년 무혐의가 입증됐지만 이미 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삼양식품도 한 차례 법정관리를 겪으면서 소비자의 신뢰를 잃어 국내 최고의 라면기업에서 보잘 것 없는 식품회사로 전락한 뒤였다. 라면업계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우지파동으로 라면업계 판도 뒤바껴
1989년까지만 해도 국내 라면시장은 삼양식품이 시장점유율 60%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삼양라면이 처음 선보인 것은 1963년.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이 남대문시장을 지나가던 중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보고, 평소 일본을 드나들며 먹어보았던 라면의 국내생산을 결심한 것이 시초가 됐다. 지금이야 가벼운 식사나 간식 정도로 라면을 먹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전 회장은 당시 일본 묘조(明星)식품에서 기계 2대와 기술을 도입해 라면을 만들었다. 초창기 라면 가격은 10원. 자장면 한 그릇이 20~30원, 식당 찌개가 30원 하던 시절인 점을 감안하면 라면은 고급음식에 속했다.
처음에는 생소해 꺼려했던 사람들로 인해 여의치 않았던 라면 판매는 무료 시식회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고, 1965년 정부가 혼분식 장려정책을 펴면서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이러한 삼양라면의 성장세는 1966년 월 240만 봉지에서 1969년 월 1500만 봉지로 치솟을 만큼 무서웠다. ‘국민식품’으로 불리게 된 삼양라면의 폭발적 인기는 다른 기업이 무조건 라면사업에 뛰어들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해피라면, 롯데라면, 아리랑라면, 스타라면 등 8~9종이 쏟아져 나와 시장에 난립했다. 이 속에서 삼양라면은 언제나 최강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9년 ‘우지 파동’은 치명적이었다.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이 파동으로 삼양식품은 3개월의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1997년 대법원 판결로 모든 혐의가 무죄로 드러났지만 이미 회사 이미지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10%로 급락했고, 한때 파산 직전으로까지 내몰렸다. 삼양식품은 당시 우지 파동으로 수백만 개의 라면을 반품받았고, 단 한 개의 제품도 팔리지 않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이때 농심은 삼양식품을 제치고 라면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농심은 안성탕면, 사발면 등을 내놓은데 이어 1986년 신(辛)라면을 히트시켰다. 우지 파동으로 라면의 대명사 자리가 ‘신라면’으로 넘어온 것이다. 현재 160여 종의 제품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국내 라면시장에서 신라면은 단일품목으로 연간 3000억원어치가 팔리고 있다.

‘고급 매운맛’으로 차별화한 신라면
1986년 10월 시판에 들어간 신라면은 ‘얼큰하고 매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기호를 재현해 라면시장에 매운 맛 선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당시 라면은 ‘소고기’라면이나 ‘김치’라면, 삼양라면처럼 대부분 소재나 회사명이 브랜드를 대신하고 있었다. 
신라면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극복한 것이다. 농심은 어떤 맛의 제품인가를 명확히 전달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는 브랜드로 신라면을 만들어냈다. 매운 라면이라는 제품 콘셉트가 명확히 드러나고, 한자어를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로 차별화된 느낌까지 준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면이 처음부터 한자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면 개발 당시 제품명을 한글로 표기해야 하며, 외래어를 표기할 경우 한글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매울 辛’이라는 글자를 크게 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한글로 ‘신’자를 크게 표기하고, 한문 ‘辛’자는 작게 표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라면은 특유의 얼큰하고 매운 맛을 만들기 위해 1년 넘게 많은 연구원들이 고추재료 개발에 매달렸다. 200여 차례가 넘는 실험과정을 거쳐 면발도 기존의 사각형 모양에서 원형으로 바꿨다.
출시 당시 신라면의 가격은 200원. 100원이었던 다른 라면에 비해 ‘고급 매운맛 라면’이라는 차별화된 콘셉트와 가격으로 신규 시장을 개척하자는 전략이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마케팅 덕분에 가격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얼큰한 맛을 유난히 좋아하는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신라면의 인기는 치솟았다. 출시 첫해 3개월 동안 20억원어치가 팔린 데 이어 1987년에는 186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해마다 매출액이 급증, 단기간에 국내 라면시장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신라면의 이러한 폭발적 인기로 농심은 라면시장 부동의 1위를 굳힐 수 있었다.
와신상담하고 있던 삼양라면이 최근 이 같은 신라면의 독주에 서서히 제동을 걸고 있다. 과거의 영광 재현과 함께 신라면의 천하통일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양라면은 2004년부터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먹는’ 낡은 이미지를 젊게 바꾸는 광고전략을 펼치며 ‘옛 명성 찾기’에 나섰다. 또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의 추억을 되살리는 이른바 ‘복고 마케팅’에도 돌입해 월 평균 매출이 40~50만 박스(30개입 기준)에서 60만 박스로 늘었다. 그 결과 2005년 1월 판매량은 ‘우지 파동’ 이후 15년여 만에 처음으로 100만 박스(30개입 기준)를 넘기도 했다. ‘라면의 원조’를 이어가면서 ‘라면 맛을 돌려준다’는 콘셉트를 강조하면서 매출 성장을 이끌어낸 것이다.
복고 전쟁에서 선수를 뺏긴 농심도 2005년부터 맞불을 놓고 있다. ‘추억의 라면 대축제, 그 라면을 돌려주마’라는 행사를 통해 추억의 라면 맛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 삼양식품과 농심은 프리미엄급 고가의 라면을 잇따라 출시하며, ‘추억의 라면 맛’에 이어 더욱 뜨거워진 업계 1위 자리싸움을 펼치고 있다.
라면의 세계에서 2위란 의미가 없다. 이들의 경쟁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아이스크림시장|

 젊은 열기 업은 월드콘

내 제과시장에서 단일 품목으로 ‘연매출 100억원’을 달성하면 성공작으로 통한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시장에서 연매출 300억원 이상을 달성한 제품이 있다. ‘월드콘’과 ‘설레임’이다. 월드콘을 아이스크림시장에서의 히트상품으로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롯데제과 월드콘은 지난 1986년 3월 출시해 1992년에는 이이스크림시장의 절대강자였던 브라보콘의 매출을 뛰어넘는 파란을 일으켰다. 1986년 65억원의 매출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빙과시장에서 처음으로 300억원을 돌파했다. 지난해에는 빙과업계 최초로 매출 470억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올해 500억원 매출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듯 월드콘이 우리나라 대표 아이스크림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시판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추구하는 품질의 차별화, 고급화 전략과 독창적인 광고전략 때문이다.
월드콘은 출시 당시 크기를 경쟁제품에 비해 키웠고, 감촉과 향에 있어서도 부드럽고 감칠 난 맛을 강조했다. 또 아이스크림 위에 땅콩을 뿌리고 그 위에 다시 초콜릿으로 장식해 시각적인 즐거움도 최대화했다.
월드콘의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략이 바로 TV 광고 전략이다. 월드콘 CF 속엔 넓은 경기장, 쩡쩡하게 울리는 응원함성, 젊음의 열기 등을 느끼게 해주는 월드콘만의 이미지가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다른 제품과 차별화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월드콘이 역동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제품으로 인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 국제적인 경기가 열리는 해에는 이들 경기가 연상되는 CF를 제작해 상승작용이 일도록 했다. 월드콘이 출시되던 해(1986년)는 아시안게임이, 2년 뒤에는 서울올림픽, 2002년엔 월드컵 등이 연상되도록 제작하는 스포츠 마케팅을 접목시킨 것이다. 올해에는 독일 월드컵 경기에 맞춰 축제 분위기로 제작해 큰 호응을 얻었다.

부라보콘 대대적인 리뉴얼로 반격나서
월드콘 이전의 아이스크림시장의 절대 강자는 부라보콘이었다. ‘12시에 만나요’로 시작되는 CM송으로 워낙 유명세를 치른 부라보콘은 국내 최장수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지난 1970년 첫 선을 보인 이후 20여 년 동안 수많은 경쟁제품을 물리치며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출시 이후 30여 년간 총 31억7000만 개가 팔렸으며, 이를 길이로 환산하면 지구를 13바퀴 반이나 돈 셈이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에는 부라보콘의 매출이 전체 아이스크림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처럼 30여 년이 넘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소비자들의 기호와 성향이 변할 때마다 제품 콘셉트의 일관성은 유지하면서도 맛이나 포장 디자인, 광고판촉 등은 계속적인 변신을 거듭해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1986년 월드콘이 출시된 이후 6년만인 1992년 매출에서 추월당하면서 최고 자리를 내줬다. 이후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매년 도전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여기에다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해태제과의 부도로 ‘부라보콘’이라는 이름이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부라보콘은 올 여름 시장에서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롯데 월드콘, 빙그레 메타콘, 롯데삼강 구구콘 등과 한판 대결을 펼쳐 가장 높은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해태 측은 이를 두고 아이스크림시장 1위 탈환을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며 자축하는 분위기다. 올해 브랜드만 남기고 모든 것을 다 바꾸는 대대적인 리뉴얼을 통해 지난해 대비 65%에 이르는 매출 신장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같은 성공은 전면적인 변신이라는 대반격의 결과로 얻은 쾌거라는 점에서 부라보콘의 기쁨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8월까지의 매출은 지난해 137억원에서 올해 225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지난 4월 리뉴얼 이후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며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그린 것. 반면 경쟁제품인 월드콘은 같은 기간 지난해 227억원에서 256억원으로 전년 대비 7.6%가 하락했다.
특별한 준비 없이 중량만 10ml 늘리고, 가격을 1000원으로 인상한 월드콘의 안이한 대응전략이 가져온 결과였다. 해태제과가 올 여름의 성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1위 재탈환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도 이 때문이다.


|MP3플레이어시장|

 경쟁사 오판 틈새 공략한 아이리버

성전자도 소니도 무시했던 MP3P(플레이어)시장에서 레인콤은 2005년에만 4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이름없는 기업이 대기업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시장을 ‘거대한 옥토’로 가꾼 것이다. 삼성전자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국내 MP3P시장을 개척한 회사는 삼성전자. 삼성전자는 1998년 4월 말 세계 최소형 MP3P인 ‘옙(Yepp)’을 출시하고 MP3사업을 시작했다. 명함크기인 옙은 10곡 정도밖에 저장할 수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품으로 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음악에 한정돼 있는 서비스를 영어교육 등으로 다양화하면서 시장 선점에 나섰다. 또 국내 시장 활성화를 위해 처음으로 MP3가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MP3P 시장 급성장 예측 못해
하지만 활성화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시장이 커지지 않자, 삼성전자는 2001년 블루텍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기술개발과 제품생산을 맡겼다. 마케팅은 삼성전자가 담당했다. 하지만 더딘 기술개발로 2년 정도 신제품 출시가 늦어졌고, 마케팅도 유기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블루텍이 지난해 7월 다시 삼성전자에 흡수합병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삼성전자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인정한 셈이다.
이러한 틈새를 레인콤의 아이리버가 파고들었다. MP3P시장의 후발주자였던 레인콤의 역사는 한 마디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MP3P 성공신화를 쓴 양덕준 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 출신으로 최고 회사의 임원이라는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나와 1999년 7명의 직원들과 자본금 3억원으로 레인콤을 설립했다. 벤처에 뛰어들기엔 이미 늦었다고 여겨지던 시기였다. 창업 당시 레인콤은 반도체칩 기술 공급업체였다. 하지만 기술 제공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양 사장은 직접 제품을 만들겠다는 모험을 감행했다.
레인콤이 MP3P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2월. 음악CD와 MP3파일을 저장한 CD를 읽을 수 있는 MP3 CD 플레이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초기 성공가능성을 엿본 미국의 유명 전자회사 소니블루는 ODM(제조자설계생산)방식을 제안하고, 아이리버는 ‘리오’라는 이름을 달고 수출됐다. 리오는 상당한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누렸지만 2001년 레인콤은 운명을 바꾸게 될 모험을 또 다시 결정했다. 아이리버라는 자체 브랜드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Sorry SONY’라는 광고문구로 2002년 당시 세계 최대 휴대용 오디오기업인 소니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CD플레이어의 차세대 제품으로 MP3P를 앞세운 세계 평정을 선언했다. 이름 없는 한국의 신생기업이 세계 굴지의 가전기업 소니에게 ‘객기’일 정도로 보이는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은 현실로 나타났다. 2002년 9월 공전의 히트작인 플래시 메모리형 MP3P인 ‘iFP-100’를 세상에 내놓았고, 2003년 세계 초박형 MP3 CDP인 ‘iMP-550’과 MP3P인 ’iFP-300’시리즈가 출시되면서 아이리버는 최강자로 부상했다.
2003년 <비즈니스위크>는 이러한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는 레인콤을 “디지털 기기 판매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제친 한국 회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이리버 브랜드의 새로운 것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놀라게 할 수 없다면 만들지 않겠다”는 아이리버의 철학으로 발전했다.
레인콤은 처음부터 다른 업체들과의 경쟁을 의식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길을 가려고 했다. 소비자들의 눈과 귀, 손, 마음을 사로잡고자 튀는 디자인, 튀는 제품사양, 튀는 서비스로 시장을 공략했다.
2002년 레인콤의 MP3P는 당시 사각형이라는 통념을 깨고 삼각기둥의 디자인을 내놓았다.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잇따라 출시된 잠수함 스타일의 유선형 모델은 시장에서 아이리버 브랜드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술력은 물론 디자인이 남달라야 한다”는 양 사장의 말대로 아이리버의 최대 매력은 독특한 디자인이다. 이는 제품홍수시대, 소비자 개성시대라는 사회적 트렌드를 제대로 분석한 결과였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소비자 눈길 사로잡아
이러한 레인콤의 디자인경영이 한때 유행시킨 말이 있다. 바로 ‘구겨 넣어’다. 즉 제품 안에 회로를 구겨 넣더라도 애초 구상한 디자인을 절대 손상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통상적인 전자제품이 회로설계에 맞춰 디자인을 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제품의 디자인부터 정하고 회로설계를 이에 맞추는 개발방식이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르다가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휴대형 디지털기기는 개성을 표출하는 개인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레인콤은 휴대형 기기에서 디자인은 다른 어떤 종류의 기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비슷하게 생긴 제품보다는 독특하고 예쁜 스타일의 제품에 눈길이 먼저 간다는 사실 말이다.
레인콤은 입소문과 온라인 마케팅 등 최신 트렌드의 마케팅 기법도 활용했다. 창업 초기였던 2000년 초 레인콤은 온라인 마케팅으로 고객들에게 파고들고자 했다. 레인콤에겐 오프라인 마케팅 활동을 벌일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타깃 고객층은 온라인 마케팅에 더없이 적격인 젊은 학생들, 바로 네티즌이기도 했다.
정밀한 고객 성향 분석과 함께 입소문 마케팅이 더해졌다. 이는 디지털 제품에 열광하는 얼리어답터들의 속성과 딱 맞아 떨어졌다.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에서, 네티즌들이 모이는 인터넷에서 얼리어답터들은 아이리버 제품을 화제로 삼았다. 아이리버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알려지게 됐다.
디지털 제품일수록 소비자들에게 불친절하고 사용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게 현실이다. 레인콤은 이 같은 현실을 깨기 위해 역발상으로 다가갔다. 그 중 하나가 펌웨어 업그레이드 서비스. 펌웨어 업그레이드는 새로운 제품을 구입할 필요 없이 제품의 성능을 인터넷상에서 업그레이드해주는 버전업 기능이다. 물론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업계 최초로 시도한 것이 바로 레인콤이다. 이를 통해 아이리버는 고객과의 꾸준한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고, 고객 충성도도 높여 나갈 수 있었다.
최근 MP3P시장이 ‘애플과 나머지 MP3P’로 나뉘면서 레인콤은 창업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애플이 가격공세를 취하면서 레인콤이 지난해 쏟아 부은 홍보용 마케팅 비용은 2004년보다 2배가 많은 300억원대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삼성전자도 그동안 준비해온 비밀병기들을 하나씩 공개하면서 MP3P 자존심 되찾기에 나선 것도 부담이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MP3P 사업 강화와 일류화 선언을 통해 아이리버와의 간격을 줄여왔다. 올 초에는 조직을 재정비해 개발 및 마케팅 분야에 우수 인력을 보강하고, 제품경쟁력 확보와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체제 구축 등 사업 재도약을 위한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레인콤은 거대기업인 애플과 삼성에 맞서면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레인콤의 2004년 4540억원이었던 매출은 2005년 4390억원으로 떨어졌다. 올해 상반기에도 720억원 매출에 머물고 있다. 이를 두고 당장 곳곳에서는 레인콤의 성장세가 꺾였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레인콤이 IT대기업들과 펼치고 있는 한판승부에서 어떻게 MP3P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시장|

 애국심으로 재탈환 성공한 삼성테크윈

140년 전통의 독일 아그파 포토가 지난 5월 파산을 신청했다. 아그파는 1889년 흑백필름을 개발했고, 1936년에는 최초로 컬러필름을 내놓은 회사. 유수의 카메라 제조사들도 이제는 필름카메라의 연구개발에 더 이상 나서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디지털카메라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필름이나 필름카메라의 매출이 크게 줄어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카메라는 필름카메라와 달리 촬영 후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삭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1995년 처음 카시오가 대중적인 모델을 내놓은 이후 국내에는 1997년 판매가 본격화됐다. 국내 디지털카메라시장은 지난 2001년 보급대수 24만 대에서 2002년에는 전년 대비 87.5% 증가한 45만 대로 급성장했다. 2003년에는 93% 늘어난 87만 대, 2004년에는 59% 증가한 140만 대 규모로 매년 고속 성장세를 지속해왔다.
올해 국내 디지털카메라시장은 지난해보다 26%가량 증가한 225만 대, 2007년에는 11% 증가한 250만 대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2007년까지 국내 디지털카메라 누적보급대수는 10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10개 넘는 업체들이 디지털카메라시장을 나눠먹고 있다. 2005년 7월까지만 하더라도 1위 브랜드는 올림푸스였다. 올림푸스한국은 지난 2000년 올림푸스가 6번째로 설립한 한국 독립법인이다. 초창기 점유율이 5% 미만이었던 올림푸스의 점유율은 설립 1년 만에 국내 디지털카메라 판매에서 업계 1위로 등극했다. 올림푸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물류 시스템을 통해 가격의 군살을 제거하고, 주요 구매층에 대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면서 동호회 등을 대상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또 톱스타 전지현을 모델로 한 광고전략이 성공하면서 2005년 중반까지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감성 마케팅의 높은 벽
디지털카메라업계에서 제일 먼저 TV CF를 제작했던 올림푸스는 당시 디지털카메라업체들이 제품 자체만 강조한 CF를 제작했던 것과는 달리 ‘추억’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감성적으로 접근했다. 감성이 담긴 전지현의 ‘마이 디지털 스토리’, ‘나와 올림푸스만 아는 이야기’ CF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벨소리 다운로드 1위가 올림푸스의 CF송이었다는 것을 보면 짐작할 만하다.
삼성테크윈 관계자도 “올림푸스가 앞세운 전지현의 마이 디지털 스토리로 인해 2003년 말부터 삼성의 시장점유율이 하락했다”며 “정확한 마케팅 테마를 전달하지 못하는 단순한 제품광고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감성적 접근을 통해 올림푸스는 4년 연속 1위라는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올림푸스는 2005년 호시탐탐 정상 정복을 노리던 삼성테크윈에게 1위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삼성테크윈은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디지털카메라를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1979년 카메라 사업에 착수한 이래 필름카메라 부문에서 지금까지 4000만 대 이상을 생산판매 해왔다.
하지만 일본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던 디지털카메라시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술에서나 디자인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테크윈이 이러한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계기는 2003년 출시한 ‘케녹스 V4’. 이 제품은 다양한 소비자 패널을 통해 각종 의견을 수렴하고 시장조사를 거쳐 개발됐다. 또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마케팅 기법이 총동원됐다. 당시 톱 가수이던 ‘비’를 광고모델로 해 국산 디지털카메라의 우수성을 적극 홍보하기 시작했다. 2005년 출시된 ‘#1’ 모델은 장동건을 통해 올림푸스의 전지현과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2004년까지 커다란 변화 없이 올림푸스의 독주가 계속됐던 디지털카메라시장은 독도 문제의 여파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올림푸스뿐만 아니라 일본산 디지털카메라업체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기회를 놓칠세라 삼성테크윈이 그 자리를 메꿨다. 방일석 올림푸스 사장은 “(삼성테크윈에) 1위 자리를 내준 것은 독도 문제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올림푸스는 그동안 시장 추세나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보다는 자신들의 기술개발 계획에 따른 제품을 내놓다보니 급변하는 각 국가별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했다. 여기에다 올림푸스는 내놓기로 했던 신제품의 출시 일정이 대부분 늦어지면서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욱 맞출 수 없었다.
올림푸스와 삼성테크윈의 시장쟁탈전은 지금 2라운드를 맞고 있다. 올림푸스는 광학기기전문업체로서 디지털카메라의 핵심기능에 충실해 각 제품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제품을 선보이며 삼성테크윈의 자리를 다시 위협하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보다는 디버전스에 무게 중심을 두고 모든 마케팅에 초점을 맞춰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삼성테크윈은 프리미엄 브랜드인 ‘VLUU NV시리즈’로 맞불을 놓고 있다. VLUU NV시리즈는 한국과 미국, 유럽, 중국 등지에서 두 달 가까이 진행된 소비자조사를 통해 기본방향이 정해진 케이스다. 이런 점에서 삼성 측은 VLUU NV시리즈가 식상해진 소비자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DSLR(디지털 일안반사식)시장에서의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예전에 전문가가 사용하는 카메라라는 인식에서 벗어난 DSLR이 대중화시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밥솥시장|

 중소기업의 돌풍 쿠쿠

내 전기밥솥시장에서의 절대강자는 일제 ‘코끼리밥솥’이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시장 장악을 위해 발버둥쳤지만 코끼리밥솥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친인척은 물론 일본 여행을 다녀온 여행객들 손에는 어김없이 코끼리밥솥이 들려있었다. 부엌에 떡 하고 자리를 잡고 있는 코끼리밥솥은 주부들에게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1999년 한 해 동안 약 600만달러어치의 코끼리밥솥이 수입됐던 것만으로도 그 위력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지금 코끼리밥솥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언제 코끼리밥솥이 절대강자였는가 싶게 시장은 전혀 다른 판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2003년 LG전자 전기밥솥 폭발 사고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LG전자의 사업철수 선언과 함께 대기업들의 공세는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그 자리를 쿠쿠홈시스(주)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한층 굳건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쿠쿠홈시스가 코끼리밥솥의 퇴출, LG밥솥의 폭발을 등에 업고 이 같은 철옹성을 쌓은 것은 아니다.

시장 출시 1년만에 1위자리 올라서
지난 1978년 시장에 첫 발을 내딛은 쿠쿠홈시스는, 중소기업이 국내 대기업은 물론 일본 대기업과 경쟁을 하겠다는 자체에 오히려 우려의 시각이 많았다. 20여 년 동안 그 같은 우려는 사실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98년 ‘쿠쿠’라는 자체브랜드를 내놓고 변신을 시도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물론 제품 출시 이후 4개월은 수입 자체가 전무했다. 더구나 현찰 선수금이라는 쿠쿠홈시스의 계약조건에 유통망을 뚫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의 현금 확보를 위해 제품 가격을 내리는 것은 구자신 회장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때 쿠쿠홈시스는 마케팅 강화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인지도 상승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단기간에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TV광고를 시작하고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파격적인 비용을 쏟아부으며 전략적인 마케팅 활동과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강화로 쿠쿠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여기에는 지난 20여 년간 밥솥 개발 및 생산에 매진해 왔고, 그 기술력과 노하우가 근간이 됐던 것은 당연했다.
회사의 전략은 적중했다. 광고와 함께 제품을 사용해본 소비자들의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매출은 서서히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유통업체들 사이에서도 쿠쿠제품은 반품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유통망 확대 효과까지 가능해졌다.
쿠쿠 브랜드로의 시장 진출 1년. 쿠쿠홈시스는 시장점유율 1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게 된다. 특히 대기업과의 경쟁은 물론 일제 코끼리밥솥의 인기가 한창 치솟고 있던 당시 쿠쿠의 점유율 1위는 믿기지 않은 기록이었다.
현재 쿠쿠는 국내 시장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자체브랜드 출시 8년 만인 올 6월 현재 누적판매량 1200만 대를 돌파하며 매출 2700억원에 1000%에 달하는 성장률을 달성하도 했다. 또 지난 2002년 10월 국내 최초로 밥솥 종주국인 일본에 자체 브랜드로 역수출을 시작한 한편 미주,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26개국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여기에 쿠쿠는 밥솥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쿠쿠홈시스 관계자는 이 같은 성공 배경에 대해 “고객 만족과 끊임없는 기술개발”이라고 말했다. 단순하면서도 식상한 이유지만 지난 30여 년간 쿠쿠홈시스의 뚝심경영을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자 앞으로도 회사를 이끌어나갈 최우선 가치라는 것이다.
실제 쿠쿠홈시스는 소형가전업계 사상 최초로 방문서비스를 실시했다. 현재 전국 70여 개의 애프터서비스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비자 대부분이 주부라는 점을 감안해 100% 찾아가는 서비스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또 제품 사용의 이상이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을 감안해 고장 수리 및 주변 환경에 대한 체크를 해주는 ‘밥맛 도우미’ 서비스도 실시중이다. 즉 애프터서비스 요원이 함수율측정기(쌀 수분 함량 체크 기기)를 지니고 다니며 직접 쌀의 수분 함량도를 체크해주고 다양한 쌀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매출의 일정액을 매년 R&D에 투자해 소비자 지향적인 제품개발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기술개발의 핵심인 쿠쿠 기술연구소는 지난 20여 년간의 제품 연구·개발을 통해 200여 건의 각종 특허 및 실용신안을 보유하고 있으며 쿠쿠 만의 기술인 UPG(Unit Per Grouping) 설계기술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우수한 성능의 제품을 선보이고자 하고 있다. 이 시간에도 기술연구소에서는 100여 대 밥솥이 테스트되고 있으며 여기에 사용되는 쌀의 양만도 30kg으로 1년이면 10톤이 넘는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까지 경쟁사의 마케팅이 강화됐을 때에도 일시적인 가격정책 변동과 소비자 현혹 마케팅보다는 기술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소비자들과 보다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노력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전기밥솥시장은 2004년을 기준으로 도달률 100%에 근접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또 4~5년이었던 제품 교체주기가 최근에는 밥솥 디자인 및 다양한 기능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가 결합되면서 3~4년으로 짧아지고 있다. 여기에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가능한 밥솥 등 첨단기술력이 접목된 제품들이 출시되면서 시장은 고급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소비패턴의 키워드로 떠오른 웰빙, 프리미엄, 디자인과 건강, 밥을 선호하는 소비자 기호가 올해는 물론 앞으로 전기밥솥시장의 큰 흐름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것이다.


|해열진통제시장|

 계란으로 바위 깬 게보린

약업계 3대 금기 사항 품목임에도 해열진통제시장에 문을 두드리지 않은 제약사는 거의 없었다. 이들의 목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사리돈’이었다. 1933년 국내에 첫 출시됐으니, 그 역사만도 70년이 넘는다.
그러나 지금 사리돈은 옛 영광을 그리워할 뿐이다. 시장점유율은 5%가 채 되지 않는다. 아스피린, 펜잘, 게보린, 뇌신, 세다판에이, 맥시팬, 바랄긴 등등 크고 작은 제약사들이 사리돈을 공략하기 위해 경쟁품은 물론 유사품까지 내놓고 발버둥을 쳤지만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당시와 비교하면 비참하기까지 하다. 토종 진통제였던 삼진제약의 신제품 ‘게보린’이 발매됐던 1979년 연간 7400만원의 실적을 올렸을 때 사리돈의 매출은 35억원으로 50배가 넘었다. 당시 제약사 입장에서 사리돈을 따라잡겠다는 것은 사실상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맞다, 맞다’라는 광고카피로 서민 마음 사로잡아
그런데 계란에 바위가 깨졌다. 출시 6년 만인 1985년 게보린이 진통제시장에서 1위로 나서기 시작해 2000년에는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고 2002년에는 200억원 매출까지 선점하면서 새로운 바위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반면 사리돈은 1933년 다국적 제약사인 로슈사가 첫 발매를 시작한 이래 현재 한국바이엘 사업부로 합병되기까지 무려 8차례 판매사를 바꿔가며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쳐 최하위권의 매출 실적으로 부진을 보이고 있다. 집 없이 전세생활을 전전하던 사리돈의 허점을 틈타 여러 제약사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하나씩 둘씩 바위였던 사리돈을 깨뜨리고 오히려 지금은 사리돈에게 바위로 앉아 있는 것이다.
사리돈에게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게보린의 성공 이면에는 전혀 뜻밖의 변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초 전 국민적 눈물과 환호를 전해주었던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국가적 이벤트가 그것이다. 수십 년간 헤어졌다가 극적으로 다시 만난 이산가족들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맞다, 맞다”였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게보린 광고 카피다.
초창기 사리돈에 밀려 지지부진했던 게보린의 판매율을 극복하기 위해 삼진제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마케팅전략에 부심했다. ‘그 무엇’을 찾아야 했다. 이때 찾아낸 정답은 ‘서민의 마음’이었고 서민 중심의 광고 마케팅전략 가운데 하나가 ‘맞다 게보린’이란 두 단어였다. 삼진제약 관계자는 “기억효과를 높이고 제품의 우수한 효능을 확산시키기 위한 키워드로 그 어떤 말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광고 카피가 국가적 이벤트에서 서민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맞다 맞다”로 이어지면서 게보린 광고는 동반상승효과를 얻었다. 이어 1980~1990년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머리 아픈 서민들을 위한 ‘해결사’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게보린의 성장세에는 브레이크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 의약품으로서는 파격적인 색깔과 모양의 차별화도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출시 초기만 해도 게보린의 모양은 일반 약과 다를 게 없는 원형이었다. 그러나 의약품으로는 파격적으로 여성 소비자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품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분홍색과 삼각형 하트 모양이라는 독특함을 디자인으로 반영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핑크하트’라는 애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삼진제약 관계자는 “과거 사리돈이 그랬듯이 지금 게보린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부동의 1위”라며 “그 이유는 단 하나”라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제품들의 공통점인 ‘고객의 욕구’에 가장 잘 맞춘 제품이라는 것이다. 그 욕구는 ‘속효성’으로 게보린의 차별적인 약효이자 해열진통제의 핵심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가정용 에어컨시장|

 ‘센 바람’으로  밀어낸‘이상향 바람’

나 지금이나 국내 가정용 에어컨시장은 LG전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비단 국내 시장 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일본의 미츠비시를 제치고 지난 2000년부터 단일 브랜드로 판매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일본 3대 조사기관인 후지경제연구소의 조사결과 LG전자 휘센 에어컨은 지난해 6042만 대 규모의 세계 에어컨 시장에서 1050만 대가 판매돼 1위를 차지했다. 추격하고 있는 중국 업체와는 약 300만 대 차이.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LG전자 에어컨은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을 하지 못했다. 기술력과 디자인력에 있어서는 당시에도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에어컨은 LG’라는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최고의 자리는 가전 최고회사라는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덤’에 불과했다.
당시 LG전자 에어컨을 초라하게했던 제품은 만도 ‘위니아’였다. 위니아는 에어컨 전문 브랜드를 앞세워 소비자들에게 ‘에어컨은 위니아’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위니아만도(주)는 1962년 ‘현대양행’으로 창립된 이래 자동차 에어컨과 함께 산업용 냉동기, 업소용 에어컨 등 국내 최대 공조전문회사로 성장해왔다. 첨단 차량공조 기술을 바탕으로 1993년에는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가정용 에어컨시장에도 진출했다. 이듬해에는 위니아(WINIA)라는 브랜드를 에어컨에 처음으로 도입하는 마케팅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점유율 3위로 급부상하는 데에 성공, LG전자 등 선발업체들을 당혹케 했다.
위니아는 Wind와 Utopia의 합성어로 ‘진정한 바람의 이상향을 꿈꾼다’는 뜻을 담고 있다. 초기 로고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상승하는 곡선을 가진 비대칭적인 구조로 바람을 심볼화한 형태였다.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약했던 당시 위니아의 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국내 최대 공조전문회사 이미지에 브랜드가 가세하면서 위니아는 가정용 에어컨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여기에 진입 초기 폭서를 예상해 미리 물량을 준비해 놓는 ‘기상마케팅’을 도입해 수요 예측 마케팅 능력까지 발휘하면서 경쟁사들을 놀라게 했다. 즉, 기상 정보 분석을 통해 1994년 여름 사상 최대의 무더위를 예측한 위니아는 일찌감치 생산물량을 확보해 적기에 공급할 수 있었던 반면 폭서를 예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