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서영 기자
- 승인 2026.03.04 07:53
주정 가격 올라 수익 방어…음주량 증가 효과도
증류식 소주론 프리미엄 수요 흡수…라인업 확충
내수 넘어 수출 전용 제품 개발 해외 시장 개척
국내 소주 시장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6도 벽이 무너졌다. 롯데칠성음료가 지난 1월 30일부터 제로 슈거 소주 ‘새로’의 도수를 16도에서 15.7도로 0.3도 낮춰 출고한 데 이어, 하이트진로 역시 지난 12일 대표 브랜드 ‘진로’의 도수를 동일하게 하향 조정해 본격적인 ‘15.7도 시대’를 열었다.
주류업계는 이번 도수 인하가 건강을 즐겁게 관리하는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트렌드와 부드러운 목 넘김을 선호하는 MZ세대의 니즈를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원부자재 가격 급등과 내수 시장 침체라는 혹독한 경영 환경 속에서 수익성을 방어하려는 주류 기업들의 치열한 셈법이 자리하고 있다.
1924년 35도에서 시작한 소주는 100여 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순해졌다. 2006년 20도의 벽이 깨진 이후 도수 하락 속도는 더욱 빨라져, 2026년 현재 소주는 와인(13~14도) 도수에 근접한 ‘초저도주’ 영역으로 진입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믹솔로지(Mixology)’ 문화와 무관치 않다. 위스키나 증류주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이 유행하면서 소비자들은 알코올 향이 강한 독주 대신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깔끔한 맛을 선호하게 됐다. 롯데칠성음료는 도수를 낮추는 대신 100% 국산 쌀 증류주를 사용하고 아미노산을 첨가해 감칠맛을 보강했고, 하이트진로 역시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15.7도를 ‘초깔끔한 맛’의 최적점으로 도출했다.

업계가 도수를 낮추는 더 근본적인 배경은 ‘비용 효율화’다. 소주의 핵심 원료인 주정(酒精) 가격은 최근 2년 연속 급등했다. 대한주정판매는 2022년 주정 가격을 평균 8%대 인상한 데 이어 2023년 4월에도 9.9%를 추가 인상했다.
여기에 음주 문화 변화와 외식 상권 붕괴라는 내수 시장의 침체로 주류사들의 실적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질병관리청 통계에 따르면 작년 성인의 월간 음주율(57.1%)과 고위험 음주율(12.0%)이 모두 전년 대비 하락해 과거의 폭음 문화가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 상권 데이터 기준 지난해 3분기 서울시 내 외식업체 수는 15만 6123개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000여 곳이 폐업했고, 주류 판매 의존도가 높은 시내 호프·간이주점은 2년 새 2218곳이나 자취를 감춰 타격을 입었다.
내수 시장 위축은 주류 제조사의 재무적 압박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연결 기준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17.3%, 57.3% 급감했고, 롯데칠성음료 역시 지난해 3분기 주류 부문 매출이 193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 감소하는 등 주류 부문 실적 둔화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수 인하는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익성 방어 기제’로 꼽힌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알코올 도수를 0.1도 낮출 때마다 병당 주정 원가를 약 0.6원 절감할 수 있다. 이번처럼 0.3도를 낮출 경우 병당 약 1.8원의 원가가 절감돼 연간 수억 병이 판매되는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수백억 원대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한 저도화는 소비 회전율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술이 순해지면서 취기에 도달하기 위해 마시는 양이 늘어나는 ‘음주량 증가의 역설’이 작용해, 전체적인 판매 볼륨 확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가격은 그대로 둔 채 핵심 원료 함량만 줄이는 것 아니냐며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제품의 질이나 성분을 변경해 사실상의 가격 인상 효과를 누린다는 지적이다. 소비자 주권 단체들은 도수 인하가 원가 절감을 위한 조치임을 명확히 고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 역시 물가 안정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국세청은 소주의 기준판매비율을 2024년 22.0%에서 2026년 23.2%로 상향 조정해 출고가 인하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식당 소주 가격은 여전히 5000~6000원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다단계 유통 구조와 자영업자들의 고충이 맞물린 결과다. 도매상과 벤더를 거치며 붙는 유통 마진에 더해 임대료와 인건비 급등에 시달리는 식당 업주들이 주류 마진으로 손실을 보전하는 구조가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출고가가 100원 내려가도 식당 메뉴판 가격을 1000원 단위로 조정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주류업계는 저도화에 따른 정체성 논란을 극복하기 위해 ‘투트랙(Two-Track)’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대중적인 희석식 소주는 15.7도로 낮춰 트렌드와 수익성을 잡는 한편, ‘일품진로’(하이트진로)와 같은 증류식 소주 라인업을 강화해 프리미엄 수요를 흡수한다는 구상이다. 하이트진로는 최근 ‘일품진로 마일드’ 패키지를 리뉴얼하고 고도수 라인업을 확충했다.
아울러 내수 시장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베트남에 생산 공장을 신설하고 있으며, 롯데칠성음료 역시 수출 전용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수에서 확보한 수익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다.
‘15.7도 소주’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생존을 위한 주류업계의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풀이된다.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투명한 소통과 품질 혁신이 뒷받침될 때, 국민의 술 소주는 또 한 번의 진화를 거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의 도수 인하는 단순한 트렌드 반영을 넘어 내수 위축과 원가 부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라며 “앞으로는 단기적인 수익성 방어에 그치지 않고, 프리미엄 라인업 강화와 글로벌 시장 개척을 통해 장기적인 생존 전략을 증명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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