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서영 기자
- 승인 2025.12.03 07:54
하이볼·무알코올 음료·캔 칵테일 등 선택지 다양
업계 수출용 소주 생산…발포주·위스키 등 공략
국내 주류 시장의 영원한 강자로 군림해 온 국산 맥주가 위기를 맞았다. ‘헬시플레저(Healthy Pleasure)’ 트렌드를 타고 하이볼, RTD(Ready to Drink), 무알코올 음료 등 대체 주류가 급성장하면서 맥주의 입지가 빠르게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주가 확고한 ‘식사 반주(飯酒)’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것과 달리, 맥주는 안방과 수출 시장 모두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 주요 주류 기업들의 성적표에서 맥주 부문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하이트진로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2.5% 감소한 544억 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매출액은 6695억 원으로 2.3% 감소했고, 순이익은 22.6% 감소한 339억 원으로 집계됐다. ‘민생회복 소비쿠폰’ 등의 효과로 소주 판매가 2% 이상 증가하며 고군분투했으나, 맥주 부문은 전년 대비 6.2% 감소해 이를 방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롯데칠성음료가 입은 타격은 심각한 수준이다. 롯데칠성음료의 3분기 주류부문 내수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6% 줄어든 2020억 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3분기 맥주 매출은 153억 원 수준으로, 전년 동기(235억 원) 대비 무려 35%나 급락한 것으로 파악된다. 신제품 ‘크러시’를 앞세워 반전을 노렸지만 전체적인 맥주 소비 둔화 흐름을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오비맥주 역시 모회사 AB인베브를 통해 매출 감소가 언급되는 등 맥주 ‘성수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업계 전반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전문가들은 맥주 시장의 침체 원인을 ‘소비 지형의 변화’에서 찾는다. 코로나19 이후 홈술 문화가 정착되면서 하이볼, 캔 칵테일 등 소비자의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여기에 헬시플레저 열풍으로 ‘무알코올 맥주’ 시장이 2021년 415억 원에서 2023년 644억 원으로 2년 만에 50% 넘게 급성장한 것도 일반 맥주에는 악재다. 맥주잔이 비어가는 사이, 그 자리를 ‘건강한 음주’를 표방한 대체재들이 채우고 있는 셈이다.
반면 소비 심리 위축과 맥주의 뚜렷한 감소세에도 소주 판매는 민생회복 소비쿠폰 등의 영향으로 전년 대비 2% 이상 증가하며 선방했다. 사실상 ‘소주가 벌고 맥주가 까먹는’ 수익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다가오는 연말 특수도 기대하기 어렵다. 식품산업통계정보시스템(FIS)의 4분기 식품산업 경기전망지수에 따르면 소주는 101.5로 기준선(100)을 넘어 호조가 예상되지만, 맥주는 78.5에 그치며 극심한 판매 부진이 예고됐다.
업계 관계자는 “소주보다 맥주 시장의 침체가 훨씬 두드러진다”며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전체 시장 파이가 줄어 매출 방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국산 맥주 특유의 ‘밍밍함’도 발목을 잡고 있다. 그동안 국산 맥주는 소주와 섞어 마시는 ‘소맥’ 문화에 맞춰 강한 풍미보다는 목 넘김이 좋은 깔끔한 맛을 추구해 왔다. 이는 내수 시장에서는 강점이었으나, 전 세계 다양한 맥주와 경쟁해야 하는 수출 시장에서는 ‘특색이 없다’는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사에 곁들이는 반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소주와 달리, 맥주는 취향에 따라 언제든 다른 주종으로 대체될 수 있는 취약한 구조인 셈이다.
국산 맥주의 위상이 흔들리자 주류 기업들은 발 빠르게 ‘비(非) 맥주’ 부문 강화에 나섰다. 맥주에 집중된 수익 구조를 다변화해 생존 돌파구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카스’를 보유한 오비맥주는 맥주 기업 이미지를 넘어 수출용 소주 생산에 뛰어들었다. 최근 수출 전용 소주 브랜드 ‘건배짠(GeonbaeZZAN)’을 론칭, 작년 제주소주를 인수해 확보한 생산 시설을 기반으로 2025년 연말부터 2026년 상반기에 걸쳐 생산과 현지 판매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국내 소주 시장의 치열한 점유율 경쟁을 피해 모회사인 글로벌 맥주 기업 AB인베브의 막강한 글로벌 유통망을 활용, K-컬처 팬덤이 두터운 동남아 등 글로벌 시장을 곧바로 겨냥하겠다는 ‘우회 타격’ 전략이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소비 패턴도 ‘가성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된 시장 분위기에 하이트진로는 ‘발포주’로 눈을 돌렸다. 국산 일반 맥주가 외면받는 사이, 맥아 함량이 낮아 맥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가격이 30~40% 저렴한 발포주(기타주류)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는 것. 대표적인 발포주 브랜드 ‘필라이트’ 매출은 445억 원으로 17%나 급증했다. 또 하이트진로는 위스키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달 초 스코틀랜드 위스키 브랜드 ‘보니 앤 클라이드’와 ‘하이랜드 치프’를 선보이며 라인업을 확대했다.
롯데칠성음료 역시 급성장하는 RTD 시장을 겨냥해 ‘프리미엄·제로’ 전략으로 맞불을 놨다. 최근 ‘순하리 레몬진’ 전 라인업을 제로 슈거로 리뉴얼한 데 이어, 지난 21일에는 ‘레몬진’의 인기를 이을 후속작 ‘순하리 자몽진’을 전격 출시했다. 이 제품은 자몽 통과육을 그대로 얼려 추출해 과일 본연의 풍미를 극대화했으며, 알코올 도수를 9도로 높여 ‘술다운 술’을 찾는 소비자까지 겨냥했다. 이와 함께 100% 스카치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스카치 하이’ ‘로제 청하 스파클링’ 등 타깃별로 세분화된 라인업을 앞세워 4분기 매출 반등을 꾀하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편의점 매대에서 국산 맥주가 차지하던 비중이 수입 맥주, 하이볼, 무알코올 음료에 밀려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라며 “소비자들의 입맛이 세분화되고 건강을 중시하는 음주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국산 맥주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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