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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家 맏이’ 한솔그룹 살아나나, 지배구조 안정·실적 호조로 ‘ 자존심 회복’

곡산 2013. 12. 2. 08:33

‘삼성家 맏이’ 한솔그룹 살아나나, 지배구조 안정·실적 호조로 ‘ 자존심 회복’

비즈니스 포커스

삼성가(家) 맏딸 이인희 고문이 일궈낸 한솔그룹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4월 초 지주회사 전환을 발표한 이후 한솔제지를 비롯해 한솔PNS·한솔테크닉스 등 계열사 주가가 급등하며 오랜만에 삼성가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게다가 4월 1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2012년 말 기준 순자산 5조2000억 원, 자산 순위 48위)으로 지정되면서 잊혀 있던 존재감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된 것은 공정위의 통제를 제대로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기업 규모가 커졌다는 뜻도 된다.

한솔그룹은 삼성가의 방계 그룹(CJ·신세계·한솔그룹) 중 경영 성취는 물론 인지도가 가장 낮다. 이인희 고문이 1991년 삼성가로부터 전주제지(현 한솔제지)를 물려받으며 분가했는데,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재계 10위권을 넘볼 정도로 덩치가 컸다. 당시 자산 규모는 약 9조 원으로, 재계 서열 11위까지 오르며 ‘리틀 삼성’의 위용을 떨쳤다. 이는 금융·정보기술(IT) 분야에 적극 진출한 결과였다.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한솔그룹은 한솔화학·한솔개발·한솔건설·한솔유통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화학·건설·레저·유통업에 문어발식으로 진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5년 한솔텔레콤·한솔테크닉스·한솔포렘·한솔상호저축은행·한솔케이언스 등 정보통신·무역·금융 등의 분야로도 사업 다각화를 활발히 추진하면서 그룹 덩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한솔그룹이 올 들어 상장 계열사의 주가가 급등하면서 재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역삼동 한솔그룹 사옥.


조동길 회장.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과도한 몸집 불리기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시련으로 돌아왔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1999년 한솔무역을 청산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 한솔엠닷컴과 한솔월드폰을, 2001년 한솔아이홀딩스·한솔아이벤처스·한솔텔레콤·한통엔지니어링·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 등을 매각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한솔그룹은 한솔제지 중심의 제지 사업과 한솔테크닉스로 대표되는 IT 사업, 한솔CSN의 물류 사업만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남게 됐다.

이 과정에서 그룹의 후계 구도도 뒤바뀌었다. 구조조정 전 그룹 사업의 3대 축이었던 정보통신·금융·제지 부문 가운데 장남인 조동혁 명예회장이 금융 부문을, 차남인 조동만 전 부회장이 정보통신 부문을, 3남인 조동길 회장이 제지 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구조조정으로 정보통신과 금융 부문이 매각되거나 떨어져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의 경영권도 조동길 회장에게로 넘어갔다.

현재 조동혁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한 발 비켜 서 있다. 다만 한솔케미칼의 지분 13.6%를 보유, 최대 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조동만 전 부회장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최근 조 전 부회장의 장남인 조현승 씨와 아내인 이미성 씨가 한솔인티큐브의 지분을 각각 10%, 3.96% 인수하며 대주주로 부상했다.



외환위기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영권을 잡은 조동길 회장은 2008년 인티큐브, 2009년 아트원제지, 2011년 대한페이퍼텍과 솔라시아(2011년), 2012년 신텍 등을 인수·합병(M&A)하며 전자재료·플랜트 등으로 그룹의 성장 루트를 확대했다. 그렇지만 완벽한 부활은 쉽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룹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그룹의 주력인 제지업의 불황이 지속된 데다 한솔테크닉스, 한솔CSN, 한솔PNS(옛 한솔텔레콤) 등 핵심 계열사들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구조조정은 마무리됐지만 구조조정의 잔재 격인 잠재적 부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2011년 한솔건설이 파산한 데다 아트원제지 진주공장 폐쇄에 따른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오크밸리 등 골프장을 운영해 온 한솔개발도 경기 침체 여파로 적자에 시달렸다.

올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환골탈태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증권 정보 제공 업체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4월 25일 기준 한솔그룹 소속 8개 상장사의 주가가 연초 대비 모두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솔PNS가 145.18%, 한솔테크닉스가 93.13%, 한솔제지가 61.18% 올랐다. 한솔CSN(5.11%)를 제외한 7개사는 10% 이상 상승했다.

‘조용한 삼성가’ 한솔그룹이 재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배경은 뭘까. 먼저 지주회사 전환으로 지배구조가 안정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존의 지배구조는 한솔CSN-한솔제지-한솔EME-한솔CSN으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다. 한솔제지가 한솔그룹의 준지주회사 역할을 하면서 한솔EME·아트원제지·한솔홈데코·한솔개발·한솔PNS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한솔제지에 대한 대주주 지분율이 7%(이인희 고문 3.5%, 조동길 회장 3.3%) 미만으로 매우 취약했다는 것이다. M&A 공격이 들어오면 방어하기가 만만치 않은 상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순자산 가치가 장부가액에 미치지 못할 때는 지배구조가 취약해도 M&A의 공격 대상이 되지 않지만 순자산 가치가 증가하면 공격 대상이 된다”고 지적했다.



지주사 전환으로 순환 출자 해소

지난해 하반기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자산운용(이하 알리안츠)이 한솔CSN과 한솔제지 주식을 집중 매집하며 단숨에 2대 주주 지위로 뛰어오르자 적대적 M&A 가능성이 제기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황한 한솔그룹은 계열사를 통해 한솔CSN 주식을 매수하며 알리안츠와 지분 경쟁을 벌였고 주가는 급등 추세를 보였다.

알리안츠는 관련 종목 주가가 크게 오르자 보유 중이던 한솔제지·한솔CSN·한솔케미칼의 주식을 대거 매각하며 큰 폭의 차익을 챙기고 떠났다. 순환 출자 구조도 문제다. 순환 출자 구조는 한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출자한 다른 계열사까지 동반 부실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한솔제지는 2011년 아트원제지가 668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데다 작년에도 골프장을 운영하는 한솔개발이 303억 원의 적자를 내면서 대규모 지분법 손실을 봐야 했다.
 
지주회사 전환으로 순환 출자 구도가 해소되면 한솔제지의 기업 가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지주회사 전환은 한솔제지가 0.54 대 0.46, 한솔CSN이 0.48 대 0.52로 각각 투자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하고 그 후 투자회사 2곳을 1대 0.18로 합병해 한솔홀딩스를 세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배구조의 안정화와 함께 삼성그룹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점도 한솔그룹이 주목받는 이유다. 한솔그룹은 한솔제지를 제외한 대다수 계열사들이 영위하는 업종이 삼성그룹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한솔CSN이 대표적이다. 한솔CSN은 지난 4월 17일 삼성SDI의 중국 내 통합 물류 서비스의 수행사로 선정됐다. 이에 따른 매출 효과는 약 22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솔과 삼성의 관계가 급진전된 까닭은 삼성가의 상속 분쟁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지난해 2월 ‘부친이 물려준 차명 상속 주식 7100억 원을 돌려 달라’며 동생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주식 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이인희 고문은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인희 고문은 “창업주가 타계한 1987년 상속 문제는 형제자매들 간에 정리됐다.

이미 끝난 것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가의 상속 분쟁 과정에서 삼성과 CJ의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했고 물류회사인 CJ GLS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반면 한솔CSN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한솔CSN은 해외 부문이 급성장하고 삼성그룹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한솔그룹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한솔CSN의 매출은 2009년 3076억 원에서 2012년 4347억 원으로 12.2% 늘어났는데, 이 중 해외 부문은 111억 원에서 446억 원으로 400% 성장했다. 이상원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그룹의 해외 물량 증대가 큰 영향을 미쳤다”며 “올해 해외 부문에서 700억 원 매출이 무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주회사 전환으로 순환 출자 구조가 해소되면 한솔제지의 기업 가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사진은 한솔제지 장항공장.


조동길 회장 명예 회복 의지 단단

TV용 BLU(Back Light Unit) 등을 생산하는 한솔테크닉스도 무선 충전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최근 52주 신고가를 경신하는 등 한솔그룹의 ‘미운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나고 있다. 한솔테크닉스는 지난해 869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적자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주력인 TV용 BLU 사업 매출이 2010년 1조3543억 원에서 2011년 6444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날 정도로 급격히 축소됐기 때문이다.

한솔테크닉스는 지난해 488억 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하고 휴대전화와 태블릿 PC용 무선 충전기 사업에 새로 진출했다. 사령탑도 삼성전자광주 대표이사를 역임하는 등 전자부품 제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용 씨로 교체했다. 이는 무선 충전기 사업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무선 충전기 사업의 최대 공급처는 삼성전자다. 보다 가까워진 그룹 오너 간의 관계를 감안했을 때 한솔테크닉스의 무선 충전기 사업은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김병기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한솔테크닉스의 무선 충전기 사업 매출액은 올해 489억 원, 2014년 2476억 원, 2015년 3666억 원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솔케미칼도 삼성 수혜주로 분류된다. 한솔케미칼은 액정표시장치(LCD), 반도체 등 IT용 과산화수소(H₂O₂) 사업과 전자재료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이 중 과산화수소의 안정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과산화수소 생산능력은 지난해 6월 9만 톤에서 올해 말까지 총 11만5000톤 규모(중국 시안 공장 2만5000톤 증설)로 늘릴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등의 증설 일정에 맞춘 투자다. 새로운 고수익 사업으로 전자재료 및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전구체(Precursor) 사업도 성과가 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시장 확대에 따른 고휘도 수지 등 전자재료 사업도 신규 진입을 위한 연구·개발 중이다. 모두 삼성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한솔그룹 주요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도 삼성 출신이 적지 않다. 조성연 한솔CSN 사장은 삼성물산 출신이고 김치우 한솔테크닉스 사장은 삼성전자 사업부장을 역임했다. 고명호 한솔홈데코 사장은 삼성그룹 생활문화센터장을 지냈다.

유화석 한솔PNS 사장과 ·박상진 솔라시아 대표는 삼성SDS에서 잔뼈가 굵었다. 박원식 한솔신텍 대표도 삼성중공업을 거쳤다. 강성부 신한금융투자증권 채권분석팀장은 “삼성가 상속 관련 분쟁에서 이인희 고문이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향후 삼성그룹이 한솔그룹의 백기사로 나서는 시나리오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솔그룹은 다 죽어가던 기업이 되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리한 확장 경영으로 곤욕을 치른 기업은 ‘내실 경영’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배웠을 것이다. 조동길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인희 고문이 어떤 조언을 해 주냐’고 묻자 “옛날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던 회사가 생기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내실만을 중시하며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영으로 일관한다면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살아남고 발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한솔그룹의 주력인 종이 사업은 사양산업으로 분류된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것은 최고경영진의 핵심 과제다. 그런 점에서 조동길 회장이 전자재료·플랜트 분야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온 것이 턴어라운드의 또 다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조동길 회장은 올 초 대한테니스협회장직을 내려놓았다. 26대 협회장 선거에 후보 등록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솔 관계자는 “경영에 전념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오너 경영인들이 어깨에 힘을 주는 대외 활동에 주력하면 회사 업무에 소홀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기업 경영에 ‘올인’하겠다는 조 회장의 의지가 꽤 단단해 보인다. 한솔그룹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