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1일 (수) 11:43 오마이뉴스
당신의 집앞 구멍가게는 안녕하십니까?
진열대 넓히는 대형마트, 가짓수 줄이는 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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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대형 마트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습니다. 웬만한 운동장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지만, 주차하는 데만 이삼십 분은 족히 걸릴 정도로 자동차와 사람으로 북새통입니다.
턱없이 싼 가격도 그렇지만, 대형 마트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파는 물건이 다양합니다. 동네 구멍가게에는 진열한 상품의 가짓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반해, 대형 마트는 인도는 물론 주차장 등 외부 공간까지 차지해가며 진열대를 넓혀가는 형국입니다.
사람들이 끄는 카트마다 묶음 단위의 상품들이 산처럼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싸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으로 구입한 경우도 있을 테고, 애초 사려는 계획이 없었는데 마음이 혹해 선뜻 카트에 담은 사람 역시 있을 테지만, 어떻든 계산대에 찍히는 액수가 대개 적게는 몇 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 만 원에 이를 정도로 씀씀이가 큽니다.
밝은 조명에 빠른 템포의 음악, 게다가 더 없이 상냥한 종업원들의 '과잉 친절'을 받으며 쇼핑에 혼을 내놓는 그들은 마트의 치밀한 영업 전략에 말려든 것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원칙에 충실한 '합리적인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선택을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선택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비용과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 누구나 같은 비용이 든다면 편익이 가장 큰 방향으로 선택을 할 것이다. 특히 비용을 최소화하고 편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현행 중학교 3학년 사회 교과서에서
누구에겐가 '가까운 가게를 놔두고 왜 먼 마트까지 물건을 사러 가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분명 아둔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잘 훈련된 '합리적' 소비자들에게 대형 마트의 폐해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해봐야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런 관심은 차라리 사치기 때문입니다.
가게 사장님에서 대형 마트 종업원으로
그런데 정작 현실은 '합리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대형 마트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영세한 동네의 구멍가게는 이미 대부분 도산했고, 지역을 기반으로 나름대로 내실을 쌓아왔던 중견 유통 업체들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문을 나서려니 낯익은 분이 어쭙잖게 눈인사를 건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조그만 가게의 어엿한 사장님이었는데, 지금은 대형 마트의 종업원이 되어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자신이 투자한 모든 것을 일거에 허물어버린 '적'에게 투항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영세 상인을 허물어뜨리는 자리에 좋든 싫든 서게 된 겁니다.
이제는 다들 종업원 자격으로 한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고 힘을 모았던 지역 소매상 연합회 모임을 대형 마트의 한 구석에서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대기업이 장악한 대형 마트를 직접적으로 규제하지 않는다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그들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고, 또 고작 시설 개선 자금 몇 푼 쥐어주고 경쟁력을 높이라는 요구는 정부가 대기업 - 실은 돈 - 에 굴복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마트 안 곳곳에 '국내 최저 가격'이라고 적힌 광고판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휘어잡고 있는데, 과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싼 물건이 즐비합니다. '특판'이라며 '멀쩡한' 치약 다섯 개 묶음이 6900원, 개당 소매가가 500원인 과자의 3봉지 한 묶음이 두 봉지 값도 안 되는 880원, 자체 브랜드라며 따로 진열해 놓은 두 벌에 1만2000원인 니트로 된 티셔츠 등.
이보다 더 쌀 수 없는 물건들이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까닭을 그저 '대량구입'과 '박리다매'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차피 '훨씬 더 싼' 가격을 무기로 동네 구멍가게는 물론 지역의 중소형 마트까지 쓸어버린 대형 마트들 사이에서도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마트에 소비자를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의 이윤을 유지하려면, 종업원 수를 줄이는 등 매장 관리의 비용을 낮추거나 들어오는 물건의 납품 가격을 깎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소비'가 여러 사람에게 고통 안겨줘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다양한 쇼핑 정보를 얻고, 아무런 의심 없이 싸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찾아 장바구니를 들고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인 소비 행위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동네 구멍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말 못할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심지어 마트의 이윤을 극대화시켜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업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를 옥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느끼고 있는 이러한 부작용을 교과서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탓인지 전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시장 가격이 경제 질서를 유지해 준다'거나 '경쟁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며 친절하게 안내해줄 뿐입니다. 과도한 경쟁에 따른 부작용은 '공동체 의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겨왔던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불합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을 빌려 말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성경처럼 받드는 교과서 내용에도 두루뭉술 넘어가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옳다'는 의미처럼 사용하는 '합리적'이라는 말도 때때로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도 함께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며 들른 동네 구멍가게는 늦가을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습니다. 족히 십수 년은 돼 보이는 낡은 오락 게임기와 그 수만큼 가져다놓은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기실 이곳의 손님은 공책만한 크기의 게임기 모니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단추를 눌러대는 아이들과 담배 사러오는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이 전부입니다.
가게를 처음 열 때도 그랬을까마는, 물건이 팔리지 않다보니 포장지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고, '할인 판매'라고 적은 종이만 싸늘한 가을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나풀거리는 그 종이에는 조만간 '임대 문의' 또는 '폐업 정리'라는 글귀가 적히게 될 것 같습니다.
소비자로서 물건을 싸게 사려는 '당연한' 생각조차도 담배만 연신 피워대는 구멍가게 주인아저씨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 주려고 산 사탕값 300원을 건넸습니다. 가만히 보니 저 역시 이 가게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산 기억이 없습니다.
가게를 처분해봐야 달리 마땅히 할 만한 게 없다는 하소연을 말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인 아저씨의 깊은 주름과 한숨소리를 통해 '시장'과 '경쟁'이라는 게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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