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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는 죽었다" FDA의 SOI 52개 정리와 한국 제품명 전략 재설계-이주형의 글로벌 푸드트렌드(12)

곡산 2025. 9. 5. 07:17
"레시피는 죽었다" FDA의 SOI 52개 정리와 한국 제품명 전략 재설계-이주형의 글로벌 푸드트렌드(12)
  •  이주형 전문위원
  •  승인 2025.09.02 07:42

SOI 86년 전 기준…세계 각국 다양한 식품 수용 못해
규제 완화 오산…통상명 원칙 따라 원재료·특징 드러나야
국내 기업에 기회…김치·고추장 등 개성 보여줄 환경 조성
원가 경쟁력 개선…맛·품질 유지하면서 합리적 가격 가능
진정성 있는 브랜딩으로 소통하고 법무 역량 강화해야
이주형 전문위원(법무법인 비트 글로벌식품산업 지원실장)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드디어 칼을 뽑았다. 1939년부터 미국 식품업계를 옥죄어온 '정체성 표준(Standards of Identity)' 52개를 한 번에 정리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마치 86년 된 요리책을 뒤져가며 "빵에는 반드시 우유만 써야 한다"라고 우기던 시대가 막을 내린 셈이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필자는 그동안 한국 식품업체들이 겪어온 구체적인 고통들이 떠올랐다. 우유식빵을 수출하려던 한 제빵업체는 FDA 규정상 '반죽의 유일한 수분원이 우유'여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기존 레시피를 완전히 바꿔야 했다. 원가는 2배로 뛰었지만 맛은 오히려 떨어졌다.

라면 업체들은 더 심각했다. 한국 라면은 미국 기준 '누들'의 난황 고형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애매한 위치에 놓여야 했다. 김치 치즈를 만들고 싶어도 기존 치즈 표준에 맞지 않아 임시유통허가(TMP)라는 복잡한 우회로를 거쳐야 했다.

FDA의 이번 결정은 단순한 규제 정리가 아니다. 11개 표준은 이미 '직접 최종 규칙'으로 폐지가 확정됐고(8월 18일까지 중대한 반대 의견이 없으면 9월 22일 발효), 나머지 41개도 9월 15일까지 의견 수렴을 거쳐 폐지될 예정이다.

왜 이제야 손을 댔을까? FDA는 "시장에서 사실상 사라졌거나 중복된 표준들을 정리해도 소비자 보호는 일반 라벨 규정으로 충분하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글로벌 식품 트렌드가 너무 빨라졌기 때문이다.

1939년, 미국인들이 '샌드위치'와 '애플파이'만 알던 시절에 만들어진 규정으로 2025년의 다양한 미국 식품 시장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 미국 마트에는 타코, 스시, 퀘사디아, 팟타이가 당연하게 진열돼 있고, 락토스프리 우유부터 글루텐프리 파스타까지 없는 게 없다. 86년 전 미국인들이 상상조차 못했던 식품들을 여전히 낡은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변화를 단순한 '규제 완화'로 보면 큰 코 다친다. FDA의 속마음은 이렇다. "이제 그 낡은 레시피북은 치워두고, 대신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에 집중하라." 실제로 폐지되는 표준들은 모두 '통상명(common or usual name)'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는 "제품의 본질과 특징, 원재료를 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명칭"을 의미한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더 까다로워진다. 이제 제품명 하나하나가 모두 소비자 오인 방지라는 잣대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법적 공격 표면이 '표준 불일치'에서 '소비자 기만'으로 이동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식품기업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필자는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첫째, 혁신의 족쇄가 풀린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기존 표준의 벽에 막혀야 했다. 이제는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진정한 혁신에 집중할 수 있다.

둘째, 한국의 맛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다. 김치, 고추장, 된장 같은 한국 고유의 맛들이 이제 더 이상 '변칙'이 아니라 '개성'이 될 수 있다. 기존 서구 중심의 표준에 억지로 맞추지 않고도 우리만의 독특함을 어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셋째, 글로벌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86년 된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 취향에 맞춰 제품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비건, 글루텐프리, 저당 같은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들을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넷째, 원가 경쟁력이 개선된다. 표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비싼 원료를 쓰거나 복잡한 공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진다. 맛과 품질은 유지하면서도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주스 분야에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오렌지주스 관련 세부 표준들이 다수 정리되지만, % 주스 선언 규정과 Juice HACCP는 그대로 남는다. 오히려 제품명이 단순화되면서 수치와 용어의 정확성이 더 중요해졌다. ‘100% 과일주스’라고 쓰려면 브릭스 계산부터 혼합비율 환산까지 모든 게 정확해야 한다.

바닐라 향료 분야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기존 바닐라 3종 표준이 삭제되면서 이제 ‘vanilla’, ‘vanilla-flavored’, ‘natural & artificial vanilla flavor’, ‘artificially flavored’ 구분을 더욱 엄격히 해야 한다. 바닐라 향료만 넣고도 'Vanilla Cake'라고 대놓고 적을 수는 없다. 'Vanilla-flavored Cake'라고 정확히 써야 한다. 작은 차이 같지만, 소송에서는 천지차이가 될 수 있다.

한국 식품기업들이 이 변화를 진정한 기회로 만들려면 3가지 전략이 핵심이다.

첫째, 진정성 있는 브랜딩이다. 과장하지 말고, 숨기지도 말자. 김치라면이면 당당히 김치라면이라고 하고, 그 독특함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자. 소비자들은 진정성을 알아본다. 특히 MZ세대는 authenticity(진정성)를 중요하게 여긴다.

둘째, 규제 및 법무 역량 강화다. 식품에서 각국의 규제 역량을 갖추지 못한 마케팅은 오히려 독이다. 모든 제품명과 카피를 법적 관점에서 검토할 체계가 필요하다. 특히 온라인 상품 페이지부터 패키지 디자인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작은 실수가 큰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대다.

셋째,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이다. 표준화된 틀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독특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해야 한다. K-푸드의 글로벌 인기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의 맛과 문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86년 된 규칙의 폐지는 단순한 자유화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규율로 이어진다. 오히려 더 정교한 소통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과거에는 규정집만 달달 외우면 됐다면, 이제는 소비자 심리와 법적 해석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이번 변화의 핵심은 '표준에 맞추기'에서 '소비자와 소통하기'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한국 식품업계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그 진짜 실력이 시험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