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 회장 "2003년 익산공장 화재로 망할 뻔했지만…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재기했죠"
입력 2019-01-01 17:42 수정 2019-01-02 00:49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국내에 조류인플루엔자까지 발생했어요. 창사 이후 최대 위기였습니다. 이번엔 재기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만 듭디다. 매일 밤 침대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뒤척거렸습니다. 처음으로 직원들 앞에서 울었던 시기였어요.”
재기하려면 공장을 다시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에 휘청거렸던 회사를 재정비하고 다시 성장의 고삐를 죄느라 여유 자금이 바닥난 상태였다. 1999년 축산사료가공업체인 그린바이텍을 설립한 데 이어 이듬해엔 NS홈쇼핑 올품(주) 주원산오리 등을 출범시켰고, 제일사료도 인수했다. 이들 회사가 모여 하림그룹이 2002년 출범했다.
자금난 돌파는 ‘정공법’이었다. 거래하던 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 익산지점장을 찾아갔다. 당시 외환은행장이 외국인(로버트 펠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잘하면 얘기가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불이 나 없어진 건 낙후된 공장이고, 이제 최신 설비의 공장으로 다시 지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담보는 물론 없었죠. 외국인은 담보보다 사람을 본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정말이었습니다. 우리 사업 내용을 꼼꼼히 검토하더니 아무런 담보도 필요 없다며 450억원을 빌려줍디다. 결과요? 4년 만에 이자까지 다 갚았습니다. 당시 익산지점장은 우리 대출 공로로 호남지역본부장으로 승진했어요.”
김 회장의 위기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82년을 그는 가장 먼저 떠올렸다. 당시 정부는 전국 농가에 축산업을 장려했다. 그 영향으로 가축 공급이 넘쳐났다. 축산파동의 시작이었다. 닭과 돼지값이 연일 폭락세를 이어갔다.
당시 이리농고를 졸업한 청년 김홍국은 고향인 전북 익산군 황동면에서 종계(알만 낳는 닭) 5000마리와 돼지 700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사업자 등록을 하고 벌인 볏짚 사업으로 번 돈 4000만원을 투자하고, 부족한 돈은 연 60%의 고리사채로 충당했다. 그때 축산파동이 덮쳤다.
“‘장리(長利)빚’이라고 혀요. 보릿고개 때 쌀 한 말을 빌리면 추수 때 쌀 한 말 반을 갚는 걸 말하는디, 그때 그런 빚을 가져다 썼죠. 닭과 돼지는 헐값에 넘겨도 사료값이 쌓이니까 갚질 못하고, 그러다가 망했어요. 채권자들이 집으로 하도 찾아오니까 외상으로 산 땅에 지은 축사에서 모기장 치고 자고 그랬습니다. 그때 처음 후회란 것을 해봤어요. ‘부모님 말씀대로 공무원을 할 걸’. 근디 그게 다였어요. 아침에 눈 뜨면 또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디다.”(김 회장은 중간중간 사투리를 섞어 썼다.)
청년 김홍국은 익산의 한 식품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밤엔 다시 돼지를 사서 키웠다. “비올 때 리어카에 돼지 똥을 싣고 경사로를 올라가본 사람들은 알아요. 발이 빠지고, 리어카는 안 나가고…. 그러면 또 신세타령을 해요. 그런 날들이 이어졌어요.”
그때 소시지를 사 먹다가 지금 사업의 기반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발견했다고 김 회장은 말했다. ‘돼지값이 3분의 1로 떨어졌는디 소시지값은 그대로네. 아, 내가 돼지만 길러 팔 게 아니라 돼지고기도 가공해서 팔면 되겠다. 닭도 마찬가지고….’
당시 미국사료곡물협회에 소속된 박영인 박사를 만나 배운 경영이론에 이 아이디어가 더해지며 지금 하림 사업구조의 구상이 만들어졌다. 농장에서 가축을 길러, 공장에서 가공한 뒤, 직접 시장에 파는 방식이다. 김 회장은 이를 ‘3장통합(三場統合)경영’이라고 불렀다.
김 회장은 재기에 성공했다. 1986년 3장통합을 염두에 두고 하림의 전신인 코리데리카후드란 회사를 설립했다. 사육과 가공, 수출까지 고려한 회사였다. 농가가 가축을 길러주면 수수료를 줬다. 회사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닭 수요가 급증한 덕분에 금세 자리를 잡았다. 김 회장은 “하루 이익이 2000만원씩 나던 시절”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이 돈을 또 투자하기로 했다. 1989년 하루 20만 수(首)를 처리할 수 있는 도계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왜 반대가 없었겠어요. 당시 국내에 가장 큰 규모는 하루 3만 수였거든요.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근디 경영은 다수결이 아니잖아요? 축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니까 투자를 많이 해야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경기가 급랭하자 당연히 축산 수요도 급감했다. 운영비가 필요했지만, 은행은 돈줄을 끊었다. 이자비용은 연 28%까지 치솟았다. 당장 부도가 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버티려면 또 돈이 필요했다.
김 회장은 ‘달러’밖에 방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에 투자 유치를 신청했다. IFC는 하림의 3장통합경영 구조에 큰 점수를 줬다. 1998년 10월 IFC로부터 2000만달러가 들어왔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이 외화를 유치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김 회장이 장사에 눈을 뜬 시기는 놀랍게도 열한 살 때였다. 1968년 초등학교 4학년이던 김홍국은 충남 논산군에 살던 외할머니가 준 병아리 열 마리를 길러 닭장수에게 팔았다. 당시 병아리 한 마리 가격은 7원, 닭 한 마리는 300원이었다. “시골의 하루 품삯이 150원 하던 때였는데, 닭 열 마리를 팔아 3000원을 손에 쥐었어요. 너무 신기했죠.”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일이었다. 그 소년은 이제 국내외 97개 법인과 1만56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재계 32위 그룹 총수로 성장했다. 지난해 그룹 매출은 8조200억원, 자산은 11조2000억원에 달했다. 김 회장에게 성공 요인을 물었다. “한마디로 기업가정신이죠. 위기가 왔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기업가정신은 거창한 말이지만, 실제론 단순해요.”
■김 회장의 별명은 '푼수'
농고시절 사업 시작…"대학 4년보다 사회경험 1년이 낫다"
이리농고 재학 시절의 김홍국 회장.
그는 이리농고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전북 익산군 망성면 장선리 357번지 고향집에 비닐하우스로 축사를 지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집안 축사를 모두 부숴버리자 이번엔 이웃 땅 300평을 외상으로 사들였다. 목수 한 명만 고용하고 시멘트와 슬레이트를 직접 올렸다. 가축 사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볏짚 사업도 시작했다. 김제평야에 쌓인 볏짚은 일본 다다미를 만드는 데 많이 쓰였다. 수출회사에 볏짚을 모아 납품하는 일이었다. 미성년자여서 사업자 등록이 안 되자 형수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익산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도 받았다.
“학교 복도에 매일 40~50대 아저씨들이 몰려왔어요. 직원들이었죠. 저한테 결재를 받아야 하니까 저를 보려고 학교로 온 것이었어요. 그때 제 별명이 ‘꼬마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월 수익은 300만원 정도였다. 공무원 월급이 2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제때 대학교 갈 기회를 날려버린 그는 사회를 ‘대대학(大大學)’이라고 부른다. 마음가짐에 따라 1년의 사회 경험이 4년제 대학 몇 번을 졸업한 것과 맞먹는 자산이 된다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자라는 것이 흙과 바람과 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인 것처럼 기업인도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이 쏟아져나오는 시장에서 키워집니다.”
김재후/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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