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시장동향

[친디아 리포트]소매유통시장 ‘빗장’ 활짝 열리나

곡산 2008. 6. 19. 12:13

[친디아 리포트]소매유통시장 ‘빗장’ 활짝 열리나

2008 06/24   뉴스메이커 780호

“기업형 대형 업체 늘어도 영세 중소 상인 피해 적다” 연구보고서 나와


지난 5월 말 인도의 유수 연구기관인 ICRIER(Indian Council for Research on International Economic Relation)은 인도 경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기업형 소매 유통업이 비기업형 소매 유통업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보고서였다. 소매 유통업은 농업 다음으로 인도의 비중이 높은 산업이다. 인도의 소매 유통시장 규모는 2006년 기준으로 약 3222억 달러, 우리나라 2001억 달러의 약 1.6배에 해당한다. 인도 최대 산업인 농업이 같은 기간 1887억 달러 규모인 점을 감안하면 소매 유통업은 인도 최대 산업임이 틀림없다. 또한 2004년 기준으로 인도 전체 고용 인구 약 4억5900만 명의 7.3%인 3506만 명이 소매유통업에 종사하고 있어 농업 다음의 인도 최대 고용 흡수 산업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반(半)실업 상태의 고용까지 감안하면 그 비중은 약 15%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시장의 규모는 외국 대자본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산업이다. 시장만 열어주면 월마트, 테스코, 까르푸 등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산업이 소매 유통업이다. 더욱이 이 연구는 인도 정부의 의뢰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차대한 산업을 두고 인도 정부가 민간 독립 연구기관에, 그것도 하필 기업형 소매 유통업이 비기업형 소매 유통업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다소 생경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을까? 이는 인도 소매 유통 산업의 특수성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세상인이 전체 소매유통업 96% 차지
인도의 소매 유통 산업은 세계 6위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비기업형, 전근대형 또는 비조직화된(unorganized) 부문이 전체의 96%(2006년 현재)를 차지하고 있다. 조직화된 기업형 부문은 전체의 4%에 불과하다. 이것도 2000년 이후 퓨처, 릴라이언스, 타타 등 대기업이 슈퍼마켓, 할인점, 백화점, 편의점 등 근대적 유통사업을 빠른 속도로 확장한 결실이다. 파키스탄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유통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20%대나 필리핀, 태국의 35~40%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1200만 개의 키라나(kirana)라고 불리는 구멍가게가 소매 유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 인도 전체 고용의 7%, 많게는 15%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벌써부터 인식한 인도 정부가 개혁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인도 정부는 1991년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유일하게 막아놓았던 소매 유통업의 문을 2006년 2월부터 열기 시작했다. 단일 브랜드 상품을 취급하는 유통업체에 대해 51%까지 외국인 투자를 허용했다. 인도 정부가 유통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할인점이나 백화점, 편의점 등 복수 브랜드를 판매하는 소매 유통 부문은 여전히 꽉 막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소매 유통업 개방과 현지 대형 유통업체들의 확산을 두고 논쟁이 붙기 시작했다.

글로벌 대형 업체 호시탐탐 상륙 노려
영세상인과 중간상인들은 시장 개방은 물론 대형 유통업체의 확산에 반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대형 유통업체 매장이나 수송 트럭에 돌을 던지는 등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반(反)세계화를 주창하는 일부 비정부기구(NGO)는 이들을 지지하며 소매업 개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주도했다. 현 연합정부를 지지하던 공산계 정당들은 소매업 개방 시 현 연정 지지철회 카드까지 들고 나왔다. 소매 유통업을 개방하면 영세상인들이 생업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지난해 9월에는 대형 현지 유통업체 매장이 문을 닫는 일이 발생했다. 인도 최대 주(州)인 우타르프라데시(UP)가 인근 영세상인과의 마찰로 치안 상태가 불안해졌다며 관내 대형 식료품 단독 매장의 영업을 잠정적으로 중단시켰다.

사실 치안 불안은 핑계였고, 같은 해 5월 하층 카스트를 대변하던 정당이 새로 집권한데다 표를 몰아준 영세상인들의 정치적 압력을 의식한 결정이었다. 대형 쇼핑몰 등 복합 형태로 입점해 있는 현대적 유통매장을 남겨둔 채 단독으로 운영하는, 그것도 영세상인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단독 식료품 매장의 영업만 잠정적으로 중단시킨 것이었다.

인도 정부의 변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는 소매 유통업의 개방은 중국이 이미 2004년 말부터 완전 개방했듯이 대세일 뿐 아니라 대규모 고용을 창출할 수 있고, 유통단계 축소로 농가소득 향상에 기여하며 특히 식음료 산업과 물류산업의 발전을 유도하여 전근대적인 농업을 빠르게 근대화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단일 브랜드로 일단 개방의 물꼬를 튼 정부는 문방구류, 스포츠용품, 전자제품, 건설자재 및 장비류 등에 대해서는 복수 브랜드에까지 우선적으로 시장을 개방할 것임을 지속적으로 시사해왔다.

한편 글로벌 유통업체들은 각국의 통상협상 루트를 통해 시장개방 압력을 강화하는 한편 인도 진출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월마트는 인도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월마트의 최초 해외 진출 국가인 멕시코의 사례를 들어, 소비자 후생 수준이 높아지는 것뿐 아니라 직접 고용이 늘고 대형 매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어 영세업체들의 수입과 고용이 오히려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월마트는 인도 최대 이동통신 서비스업체와 도매업체를 합작으로 설립했다. 우선 시장이 100% 개방된 도매업 분야에 뛰어들어 유통업의 기반을 쌓은 후 소매업의 문이 열리면 곧바로 직접 진출하든지 파트너와 공동 진출하려는 전략이었다. 까르푸와 테스코도 협력 파트너를 물색하는 등 소매업에 진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

개방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간 마찰과 갈등이 점점 커지자 여당은 이를 중재하기 시작했고, 양자 간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 소매 유통업 개방 문제가 논쟁을 넘어 폭력과 정치적 마찰은 물론 연정 붕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해 1월 국민의회당(National Congress) 당수인 소니아 간디는 만모한 싱 총리에게 비밀리에 서한을 보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골자는 ‘소매 유통업 개방은 영세상인들의 이해와 밀접한 만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은 경로를 통해 지난해 2월 언론에 알려졌고, 주무부서인 인도 상무부 산업정책진흥국은 외국 유통업체를 포함한 국내 대형 유통업체의 확산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실제로 국내 영세상인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피해가 있다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달라고 ICRIER에 공개적이며 공식적으로 연구 용역을 의뢰한 것이다. 그 연구 용역 결과가 지난 5월 말 공식 보고서로 발표된 것이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개방 찬성론자 측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기업형 소매 유통업의 확산이 구멍가게나 행상들에 끼치는 경제적 손실은 물론 고용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분석이었다. 중간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일, 채소, 의류를 취급하는 일부 중간상을 제외하고는 현대적 유통 체인의 확산과 그들의 매출이나 이익, 고용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적 유통 체인의 확산은 소비자 후생 향상은 물론이고 농가 소득 향상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배추 생산 농가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사에서 생산 농가는 기존 정부 허가 수집상에게 판매할 때보다 유통 체인에 직접 판매할 경우 25% 정도의 높은 가격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의 결론으로는 개방 반대론자들이 사실상 판정패한 셈이다.

이론적 명분 얻어 개방시기 단축 기대
이와 함께 보고서는 인도 소매 유통업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20006년 3220억 달러인 소매 유통 시장은 연평균 13% 성장하여 2011년 5900억 달러로 커지고 2016년께는 1조 달러를 돌파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형 소매 유통 시장은 2011년까지 연평균 45~50% 성장하여 전체 소매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6년의 4%에서 16%로 높아지는데, 금액으로는 2006년 130억 달러에서 2011년 944억 달러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방 찬성론자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낙관적인 시장 전망을 반영한 객관적인 보고서가 발표되었음에도 개방 찬성론자는 물론 인도 정부, 대형 유통업체 및 외국인 투자자들의 얼굴은 썩 밝아 보이지 않다.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 뭄바이 시내 중심가 시장의 모습.
주요 일간지 등은 보고서 내용을 비교적 소상하게 보도했으나 8%를 돌파한 도매물가 상승률에 묻혀 정책 당국자들은 물론 업계, 소비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난 4월 이후 인도 정부는 인플레 잡기에 정신이 없고 폭등한 식료품, 유류 가격에 인도 국민들도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물가 때문에 당장 내년 4~5월 총선에서 재집권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인도 정부나 국민의회당이 소매 유통업 개방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주요 언론들은 ‘너무나 중요한, 그러나 너무 늦은(too late)’ 보고서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가 인도의 소매 유통업 개방을 앞당기는 데 촉매제가 될 것은 분명하다. 개방 찬성론자들에게는 이론적인 명분으로 ‘창’을 준 셈이며, 개방 반대론자들에게서는 ‘방패’를 빼앗은 격이기 때문이다. 6월 초 국회 관련 위원회는 이번 보고서를 바탕으로 시장 개방 등을 포함한 대형 유통업체들의 확산에 대한 업계 및 관련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기로 했다.

복수 브랜드에 대한 소매 유통업 개방은 당장 기대하는 어렵고, 지역별·규모별·유통채널 형태별로 시장 진입 조건을 달리하여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할 가능성이 크지만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시장을 개방해서 대형 유통업체가 늘어나도 영세상인들에 미치는 피해가 거의 없다는 객관적 명분이 확보된 이상 인도 소매업 개방의 빗장은 조금이나마 열린 셈이다.

조충제<롯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경제학 박사>cjcho@lotte.dp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