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분석,동향

“PB가 살 길” 유통 공룡들의 생존 격돌…식품업체 ‘카니발리제이션’ 직면

곡산 2026. 5. 19. 07:16

“PB가 살 길” 유통 공룡들의 생존 격돌…식품업체 ‘카니발리제이션’ 직면

  •  황서영 기자
  •  승인 2026.05.18 07:55

우유·라면 등 PB 마진율, NB보다 높아
반복 구매에 편의점 PB 비중 30% 눈앞
PB 잘 나갈수록 제조사 식품 매대서 밀려
위탁 생산, 안정된 물량 불구 수익성 저하

고물가 속 유통업계가 수익성 높은 자체 브랜드(PB) 확대와 직접 제조에 나서면서 식품 제조사들이 자사 주력 상품의 매출 잠식과 매대 퇴출 사이에서 뼈아픈 진퇴양난에 직면했다.

물가 기조와 소매시장 0.6% 성장이라는 사상 최악의 정체기 속에서 대형마트와 편의점의 자체 브랜드(PB)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대형마트 매출에서 반복 소비가 일어나는 식품 비중은 통상 60~70%에 달하며, 특히 PB 상품의 마진율은 일반 상품(NB) 대비 10~30%가량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마트, GS리테일 등 유통 공룡들은 ‘K자형 소비 양극화’에 맞춰 역마진까지 감수하는 ‘초저가 PB’로 충성 고객의 발길을 붙잡는 차별화 전략에 나섰다.

고물가 속 대형마트 등 유통업계가 5000원 이하 초저가 자체 브랜드(PB) 통합 매장을 앞다퉈 선봬며 충성 고객 확보와 제조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 위탁 생산에 나선 식품 제조사들은 고품질 PB에 자사 주력 브랜드(NB) 매출을 빼앗기는 카니발리제이션과 매대 퇴출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직면했다.사진은 이마트의 5000원 이하 초저가 상품을 모아놓은 5k프라이스 통합 매장 모습. (사진=이마트)

 

실제 유통업계의 PB 팽창 속도는 매섭다. 편의점 업계의 PB 매출 비중은 30%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GS25의 2024년 기준 전체 매출 중 PB 비중은 29.7%에 달하며, 특히 초저가 라인 ‘리얼프라이스’는 전년 대비 125.1% 폭증했다. CU 역시 PB 상품 매출 신장률이 2023년 17.6%에서 2024년 3분기 누적 19.1%로 매년 두 자릿수의 고속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의 전체 매출 대비 PB 비중은 10~20% 수준이나, 우유·라면·생수 등 반복 구매가 일어나는 생필품 및 식품 카테고리 내 PB 비중은 최대 30~40%에 육박한다.

 

이러한 유통사의 메가 PB 고도화 전략 앞에서 일반 브랜드(NB)를 생산하는 식품 제조사들은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유통사의 PB 확대 전략이 위탁 생산 요구와 직접 제조 내재화라는 투트랙으로 압박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공장 가동률을 방어하기 위해 유통사의 PB 위탁 생산을 맡을 경우, 고품질의 PB 상품이 도리어 주력 NB 제품의 매출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카니발리제이션(제살깎아먹기)’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 반대로 이를 우려해 위탁 생산을 거부할 경우, 신세계푸드를 완전자회사로 편입해 아예 ‘제조 내재화’를 이룬 이마트의 사례처럼 유통사의 자체 상품에 밀려 매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진퇴양난에 놓인 것이다.

 

제조사의 NB 카니발리제이션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우유 시장이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의 초저가 자체 브랜드(PB) 우유는 매일유업, 남양유업, 동원F&B 등 주요 유업체들이 위탁 생산을 맡고 있다. 원유 가격 인상으로 우유 물가가 급등하자 소비자들은 팩당 3000원이 넘는 제조사 고유 브랜드 대신 2000원대 초중반인 PB 우유로 대거 몰렸다. 유업체들은 남는 원유를 소진하고 공장 가동률을 유지하기 위해 유통사 PB 생산에 동참해 왔으나, 결과적으로 마진율이 높은 자사 주력 우유의 매출을 스스로 갉아먹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다.

 

초저가 경쟁이 치열한 라면 시장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뚜렷하다. 홈플러스가 1봉지당 500원에 선봬 메가 히트를 기록한 ‘심플러스 이춘삼(짜장라면)·이해봉(짬뽕라면)’ 등은 모두 삼양식품이 제조한 상품이다. 고물가 속 초가성비를 앞세운 이 제품들은 출시 직후 해당 마트 내 라면 판매량 상위권을 휩쓸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자사의 기술력과 생산 라인을 동원해 만든 초저가 PB 상품이, 도리어 자사가 기존에 판매하던 NB 라면 수요를 분산시키고 가격 저항선만 낮추는 뜻밖의 경쟁자로 부상한 셈이다.

 

국내 생수 시장 역시 유통사 PB와 제조사 NB 간의 카니발리제이션 및 주도권 경쟁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격전지다. 그동안 생수 시장은 특정 제조사의 NB를 중심으로 견고한 점유율 구도가 지배해 왔다. 하지만 고물가 여파로 소비자들이 물맛의 차이보다 가격을 최우선 구매 기준으로 삼게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물론 이커머스까지 합세해 초가성비 PB 생수를 잇달아 선봬 무서운 속도로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PB 생수를 위탁 생산하는 식음료 제조사들은 공장 가동률을 방어하기 위해 유통사 PB 생산에 동참해 왔으나, 장기적으로는 자사 주력 NB 생수의 설 자리를 스스로 좁히는 뼈아픈 부메랑을 맞게 됐다.

 

삼립, 샤니 등 거대 제조사가 장악해 온 양산빵 시장에서도 유통사 PB로 인한 NB 잠식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롯데마트·슈퍼가 2500원에 출시한 PB ‘오늘좋은 숨결통식빵’은 전문 베이커리 수준의 품질을 앞세워 출시 4주 만에 누적 판매량 약 15만 개를 기록하는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또 최근 편의점 업계는 제조사와 협업해 프리미엄급 품질에 가격 경쟁력을 더한 전용 PB 빵 브랜드를 잇달아 선봬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문제는 이들 PB 제품의 제조원이 다름 아닌 삼립이나 샤니 같은 기존 시장 지배자라는 점이다. 유통사의 강력한 마케팅과 진열 우위를 앞세운 PB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갈수록,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 제조사의 NB 빵은 매대에서 밀려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생산 물량 확보를 위해 PB 제작을 외면할 수 없지만, 자사 고유 브랜드의 정체성이 희석되고 수익성이 낮은 위탁 생산 비중만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카니발리제이션을 우려해 아예 PB 생산을 거부하며 유통사와 갈등을 불사하는 사례도 있다. 국내 즉석밥 시장 점유율 1위인 CJ제일제당은 자사 핵심 제품인 ‘햇반’의 수요 잠식을 우려해 유통사의 PB 즉석밥 위탁 생산을 일절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 하청 기지로 전락해 NB의 브랜드 가치를 잃는 대신, 유통사의 채널 권력에 맞서 독자적인 제조 주도권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방어 전략으로 풀이된다.

주요 PB 상품의 판매원·제조원 및 제조사 자사 NB 비교. (재구성=식품음료신문)

 

가성비와 가심비를 모두 충족해야 생존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유통 공룡들의 하반기 PB 시장 격돌 구도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반면 제조사는 유통사와의 공급망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자사 NB만의 독자적인 경쟁력을 지켜내야 하는 복잡한 생존 게임에 돌입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성장률이 멈춘 시대에 독자적인 메가 PB 상품은 플랫폼의 생사권을 쥔 ‘전략 자산’”이라며 “유통기업들이 단순 판매 플랫폼을 넘어 제조와 외식 등 식품 밸류체인을 전방위로 구축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유통기업의 경쟁력은 매장 규모가 아니라 자체 식품 브랜드와 제조 역량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