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및 결산

편의점 인간

곡산 2017. 9. 6. 07:48

편의점 인간

한국 사회를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가까이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아마도 편의점일 것이다.
인구대비 편의점 수가 일본을 제친 한국에서 편의점은 이제 그냥 편의점이 아니다.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만물이 공존하는 소우주다.

  • 구성=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7.08.29 08:53

한국 땅에 편의점이라는 것이 등장한 때는 1989년. 우리나라 1호 편의점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들어선 세븐일레븐 올림픽선수촌점이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편의점 수는 3만 여개를 넘어섰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매일 하루 15개 편의점이 새로 문을 열고 있다.

생필품과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는 으레 동네 슈퍼마켓을 찾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편의점은 세련된 불빛을 뽐내며 낯선 모습으로 이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30여년 후, 우리 삶 대부분은 그 상자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90년 편의점 등장 700원짜리 삼각김밥 그땐 900원에 팔았죠
 
/이철원 기자

한국은 '편의점 왕국'

한국은 명실상부 '편의점 왕국'이다. 한국편의점산업협회와 업계에 따르면 국내 편의점 점포 수는 2017년 7월 기준 3만7,539개에 이른다. 국내 인구 5,125만명 기준으로 봤을 때 1,365명당 편의점 1개가 영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편의점은 5만6,160개(3월 기준)로 2,226명당 편의점 1개꼴이다(인구 1억2500만명). 인구 대비 점포 수를 따지면 1.6배 많다. 편의점 수는 일본보다 적지만 인구당 편의점 점포 수로는 일본을 추월했다.

급증하는 편의점 수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현재, 편의점은 은퇴를 맞는 이들이 비교적 쉽게 준비할 수 있는 삶의 방편이다. 은퇴를 하거나 앞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되고, 다른 외식 프랜차이즈보다 창업 비용도 적게 드는 편의점을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을 털어 노후 대비용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中

하지만 창업도 찾는 사람이 있어야 성황을 이루는 법. 편의점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난 점도 주요 원인이다. 이 중 '나홀로족'이라고 불리는 1인 가구는 편의점 매출에 1등 공신이다.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1인 가구는 청년 실업, 만혼과 저출산, 비혼족 등 현재 사회상을 응축하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대형마트나 재래시장에서 다량의 물건을 사기보다는 편의점에서 그때그때 필요하는 물건을 소량으로 구매하는 것을 선호한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에서 조사 발표한 '1인 가구의 민낯'에서 2·30대 1인가구는 식료품을 구입할 때 '필요할 때 조금씩 구입한다'고 대답한 비율이 절반 이상(20대 52%, 30대 51.8%)을 차지했다. 다인 가구는 대부분 50% 이하로 응답했다.

따라서 이들의 편의점 이용률도 높았으며 편의점에서 식료품을 구매하는 비율도 다인가구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업계도 이런 흐름을 반영해 이들의 욕구에 맞는 제품들을 적시에 출시하면서 보조를 맞췄다. 주로 1인분 식재료나 1인용 즉석식품들이 많다.

4만 곳 육박…'편의점 왕국'의 한숨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中에서

편의점 업계 종사자 수도 그만큼 늘었다. 2013년 9만 4,735명이었던 편의점 업계 종사자 수는 2015년 11만 6,978명으로 증가했다. 2017년 현재는 더 많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바이트 시장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조사 발표한 '2017년 청소년 및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실태'에 따르면 2017년 아르바이트 공고가 가장 많이 올라온 업종은 편의점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지원하는 층은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청년층이다. 편의점 산업은 은퇴 창업자 뿐만 아니라 청년 실업으로 길이 막힌 20대에게도 임시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학비를 벌거나, 취업을 준비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편의점를 선택한다. 15세 ~19세가 선호하는 아르바이트는 음식점에 이어 편의점이었고, 20세에서 24세 역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음식점과 카페 아르바이트 다음으로 선호했다.

편의점을 보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지난 2월 밤 10시쯤 서울 홍대 근처에 있는 한 편의점 앞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이른바 ‘불금’이 시작된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오가는 젊은이들로 항상 북적인다. 드나드는 손님 90%가 클럽이나 헌팅 술집을 오가는 20~30대다.(좌) 밤 1시 30분 무렵 서울 서교동 편의점은 여전히 손님들로 붐볐다. 이곳 편의점의 ‘피크타임’은 새벽 1시부터 3시. 물건을 사려는 이들이 길게 줄을 늘어설 정도였다. (우) / 장련성 객원기자

더운 날은 샌드위치가
잘 팔리고, 추운 날은
주먹밥이나 중국식 만두,
빵이 잘 팔린다.

카운터에서 파는
음식도 기온에 따라
잘 팔리는 게 다르다.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中에서

도심 곳곳에서 24시간 돌아가는 편의점은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잘 포착해내는 곳이다. 언뜻 익명성에 기반해 기계적인 계산만 반복되는 듯 하지만 서로 필요한 정보만큼은 확실히 주고받는다. 그렇게 주고받은 정보는 즉각 매대에 반영되며, 점포의 매출로 이어지고, 나아가 해당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지표 역할도 한다.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들을 보면 우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얼음컵이다. 편의점 업계 1위 CU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델라페 컵얼음'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째 편의점 판매 1위를 차지했다. 2위 업체 GS25에서도 2012년부터 '컵얼음'이 줄곧 판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커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료에 섞어 마실 수 있어 카페의 비싼 음료를 대신할 수 있는 컵얼음은 특히 날씨가 더워지면 매출이 급증한다. 편의점 업계는 올해 판매 1위 제품도 컵얼음이 차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래도 서울시내 지역구별 잘 팔리는 제품은 제각각이다. 유동인구와 지역의 특성이 편의점 매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많은 중구에서는 도시락이 가장 많이 팔린다. 신림동 고시촌이 있는 관악구에서는 2L짜리 생수와 더불어 도시락과 같은 즉석식품이 잘 팔린다. 자취를 하는 고시생들이 물을 대량으로 사서 먹고 급하게 끼니를 떼우기 때문이다. 세븐일레븐이 지난 1월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이곳 편의점 매출에서 '햇반' 같은 즉석밥류가 차지하는 비율은 6%, 도시락 같은 가공식품류는 4.1%였다. 다른 지점에선 즉석밥류 매출이 평균 3%, 가공식품류 매출이 1%인 것에 비하면 무척 높은 수치다. CU의 지난해 판매통계에서도 도시락이 가장 많이 팔린 곳은 대학과 고시촌이 형성된 관악구였다.

불금 편의점… 홍대선 '작업용' 손난로, 신림동 고시촌선 1+1상품 불티

숙박업소와 모텔이 많은 종로구에서는 콘돔이 잘 팔린다. 미니스톱 지난 1월 통계에 따르면 모텔이 밀집한 신촌 지역 역시 전국에서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리는 지역으로 조사됐다.

지친 하루 위로해주네

/박상훈 기자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 번쯤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中에서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있어야만 가는 곳은 아니다.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은 저녁 시간대가 되면 급증한다. 편의점의 저녁 시간대 매출이 강세를 보이는 데는 '혼밥족'과 '혼술족' 그리고 '편퇴족' 덕분이다. '편퇴족(편의점 퇴근족)'은 퇴근길에 꼭 편의점에 들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지친 하루를 '편의점 쇼핑'으로 마감한다.

각종 도시락이나 소포장 상품 등 '1인 가구'에 특화된 상품이 많다는 것도 편의점을 찾는 이유지만, '편퇴족'들은 동네 수퍼마켓과는 다른 편의점 특유의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이들은 "밤늦게 퇴근하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쇼핑할 수 있고, 1만원 이하의 소액을 신용카드로 결제해도 핀잔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로 가게 주인 대신 아르바이트생이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찾아가도 같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는 점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2030세대에겐 장점이다.

현택수 한국문제연구원장은 "편의점은 어떤 곳보다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장소라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장소"라며 "편의점 쇼핑은 '혼술·혼밥(혼자 먹는 술·밥)'에 지친 1인 가구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했다.

지친 金대리가 위로받으러 간 곳은 편의점
인스턴트 인생을 위로하는 인스턴트 제품들… 나는 편의점에 간다
찬밥, 나에게로 와 따스한 '요리'가 되었다

콘텐츠 시장에서도 주요 소재

웹툰 ‘연애의 정령’ 35화에 등장하는 편의점 알바생의 진상 손님 대처법(좌) /네이버. 편의점 업체 GS25가 지난해 제작한 4회짜리 웹 드라마 '25사랑병동'의 한 장면. 편의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 로맨스다.(가운데) /GS리테일. 편의점은 24시간 멈추지 않는다. 소설‘편의점 인간’을 써 일본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무라타 사야카는 요즘도 일주일에 사흘은 도쿄의 어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글이 막힐 때 머릿속을 말끔히 헹굴 일터가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했다. (우) /문예춘추·그래픽=이철원 기자

현대인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다보니 각종 문화 콘텐츠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비교적 처음 등장한 것이 2004년 김애란 소설집에 실린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이다. 일본에서는 편의점에 19년째 일하면서 편의점 얘기로 소설을 쓴 작가가 일본 순수문학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서는 보통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내세워 보통을 강요하는 사회에 일침을 날린다.

'편의점 인간'에서 드러나듯, 편의점은 태생적으로 '알바생'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tvN 드라마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 '혼술남녀', SBS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숱한 드라마가 편의점을 배경으로 활용하고, 편의점 업체 GS25는 자체적으로 편의점 배경 웹드라마를 시즌3까지 제작했다.

갑갑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는 데서 나아가, 이곳에서 집의 온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웹툰 '와라 편의점'(2008~2014)의 인기몰이에 이어, 지난 4월부터 케이툰에 연재 중인 웹툰 '편의점 만화왕'은 편의점 음식을 조리해 '집밥'으로 바꾸는 마술을 선보이며 인기를 끌고 있다. 2005년부터 11년간 자취하고 있는 두순(31) 작가는 "혼자 살다보면 편의점 음식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데, 삼각김밥을 뜯어 간단히 볶거나 간장만 뿌려도 새로운 음식이 된다. 혼자 사는 젊은이들에게 집밥 조리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4시간 돌아가는 소우주… 그곳에 우리가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세상을 쓰다

취향까지 반영하는 편의점

서울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에 있는 이마트 24 편의점. 도서관 풍경을 반영해 편의점 안에 책 읽는 공간을 마련했다. 어디를 가든 찍어내듯 똑같은 모습이었던 편의점이 변하고 있다. /그래픽=박상훈 기자

최근에는 편의점의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띈다. 필요한 물건만 사서 도망치듯 나섰던 편의점이 문화·생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편의점 쇼핑에서 위로와 힐링을 얻는다는 세대들의 취향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진열대 자리를 푹신한 의자와 테이블로 꾸미고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았다.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 근처에는 이마트 24의 '책 읽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엔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책들과 만화책·잡지가 놓여 있다. 컵라면을 먹으며 수필을,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학생들 모임 공간을 마련한 편의점도 있다. 경남 김해시 인제대에 있는 GS25 편의점에는 학생들이 그룹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대형 테이블과 빔프로젝터를 설치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 있는 이마트 24 편의점에는 중·고등학생들이 끼니를 때우며 공부할 수 있도록 스터디룸을 마련했다. 부산 한 호텔에 있는 CU 편의점에는 뽀로로 인형과 동화책, 플라스틱 공으로 만든 볼풀장이 있다.

쇼팽과 하루키가 있는 이곳…'편의점'입니다

미래의 편의점

(좌) 일본 혼슈 지방에 있는 미에현의 한 노인 요양원을 방문해 영업 중인 편의점업체 세븐일레븐의 이동식 편의점 트럭 모습. 300~400종의 물건을 싣고 달리는 이 편의점 트럭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다. /세븐일레븐. (우) 일본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에 있는 로손의 개호(介護) 전문 1호 편의점. '개호'는 곁에서 돌봐준다는 뜻이다. 개호전문 편의점에서는 노인에 필요한 물건을 팔고 필요한 서비스나 시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한 여성 고객이 '개호관련 상품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양지혜 기자.

우리나라는 편의점 수가 파출소, 지구대, 은행 수보다 많다. 어떤 시설보다 우리 일상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 편의점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이런 점을 활용하여 물건만 파는 편의점에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일본은 노인 인구 비율이 27%에 달한다. 일본의 편의점은 최근 '노인 생활 지원'과 '이동식 편의점', 두 가지 서비스를 실시하면서 편의점 업계의 질적 향상과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노인 비율이 40%가 넘는 '실버 아파트' 단지 내에 '노인 보호 편의점'을 입주시켜 노인들의 생활 민원을 해결해준다. 하루 세 끼 도시락 배달은 기본, 여분의 열쇠를 갖고 있다가 복사해주고, 수도관이 고장 나면 수리공도 불러주는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고령화 시대 틈새 시장 노려… '편의점 트럭'으로 어르신 공략

우리나라 편의점도 그동안 공과금 수납, 휴대폰 충전, 택배 등 각종 서비스를 흡수하면서 역할을 늘려왔다. 최근엔 지역 별 주 고객층에 맞춰 점포의 형태를 달리 하면서 또 다른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편의점 CU는 점포마다 경찰과 '핫라인'을 구축해 지역사회에서 '파출소' 역할을 맡기로 했다. CU를 운영하고 있는 BGF리테일은 지난 4월 26일 경찰청과 '편의점 기반 지역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많은 사회학자나 유통업 관계자는 바로 여기에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편의점 산업이 나아갈 길이 있다고 보고 있다. 양적인 팽창보다 일본처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면서 공공 서비스가 닿지 못하는 사회적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