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순천=김현옥 기자
- 승인 2026.05.19 15:19
독일 REWE에 입점...진입 장벽 높은 유럽 메인 스트림에서 경쟁

전라남도 남동부에 위치한 순천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개발보다 보존’을 선택한 곳이다. 순천만 습지를 지켜내기 위해 산업의 속도를 늦추는 대신 자연을 남겼다. 그 결과 이곳에는 다른 도시와는 결이 다른 시간이 흐른다. 빠르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천천히 쌓이고 깊어지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식품기업은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의 자연과 시간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또 하나의 생태계다. 그 중심에 장류기업 매일식품이 있다.

장(醬)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그 장을 만드는 기업의 철학과 닮아간다.
3대에 걸쳐 81년의 시간을 이어온 매일식품은 전통 장류 산업의 익숙한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순천이라는 도시가 그렇듯, 매일식품 역시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만들어왔다. 전통을 고집하되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화를 추구하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 그 선택의 결과는 ‘시간이 만든 맛’으로 축적되어 왔다.
이번 <醬의시간> 3편은 한 기업의 역사를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을 지켜낸 도시와 그 위에서 시간을 쌓아온 기업이 어떻게 서로를 닮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광명에서 KTX로 2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순천역. 27만명이라는 도시 인구 규모에 걸맞게 너무 복잡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한산하게 시골스럽지도 않은, 적당히 분주함 속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막 개찰구를 빠져나온 승객들로 인해 잠시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려 타고 15분 정도 바깥 풍경을 감상하노라니 서면 산업단지 안에 있는 매일식품 본사에 다다른다.
■ 1945년 장독대에서 2025년 글로벌 소스로
이 곳 전남 순천의 본사 1공장과 2022년 9월 준공된 전북 익산 2공장을 잇는 매일식품의 시간은 지난 81년간 쌓아온 발효의 발자취이다. 1945년 광복의 해와 함께 김방장유장조장으로 시작된 이 기업은 한국 장류의 흐름을 함께해왔다.
3대에 걸쳐 축적되고 있는 그 시간은 지금 방향을 바꾸고 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재해석하고, 장을 제대로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폭넓게 활용하며,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의 식탁을 겨냥하는 시간으로 말이다.


매일식품의 이러한 변화의 시간은 된장과 간장, 고추장으로 대표되는 전통 장류에서 출발해 오늘날에는 소스, 라면, 간편식까지 확장하며 ‘K-소스 기업’으로 진화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매일의 맛, 세상을 이어가다’라는 비전은 슬로건이면서 이 기업의 전략 방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글로벌 브랜드 ‘아줌마리퍼블릭’을 통해 한국의 손맛을 하나의 콘텐츠로 재구성하며 미국, 영국, 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아줌마 리퍼블릭’ 브랜드의 ‘XL(엑셀) 라면’은 당초 수출용으로 개발돼 미국 군납과 일본 도쿄 호텔 매장에 납품되는 성과를 거둔데 힘입어 국내 시장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바 있다. 지금은 이마트24와 협업해 개발한 곱배기 콘셉트의 ‘따블 라면’ 제품을 판매 중이며, 조만간 라면과 밥을 결합한 ‘라밥’ 제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매일식품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컵라면 형태의 ‘ON(온) 라면’을 출시해 틱톡, 아마존, 한인마트 등을 통한 글로벌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장인의 감각에서 ‘데이터’로..."맛을 만들어내는 구조 축적"
매일식품이 전통 기업과 다른 지점은 발효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 회사의 발효연구소는 제품의 연구, 개발 및 품질관리 뿐만아니라 80년 동안 축적된 발효 경험을 미생물과 성분, 환경 데이터로 전환하는 작업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특히 종균 관리 방식의 차별성이 눈에 띈다. 국내 장류 산업이 종균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것과 달리, 매일식품은 다양한 균을 확보하고 비교·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자체적인 ‘종균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외 종균을 스크리닝하면서 어떤 균이 어떤 맛을 내는지를 선별하는데 집중했어요. 순창 등에서 사용되는 전통 장류용 종균은 그대로 활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특히 양조간장이라는 영역에서는 별도의 접근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하게 됐지요."
오상호 대표는 "장인의 감각에 의존하던 영역을 재현 가능한 기술로 바꾸려는 시도로서, 결국 매일식품이 축적하고 있는 것은 ‘맛을 만들어내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 한국 간장의 한계, 그리고 질문
매일식품이 종균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간장의 향'이다. '왜 한국 간장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연구의 시작점이었다.
매일식품은 학계와 함께 국내외 주요 간장 제품을 비교 분석한 결과, 브랜드마다 향의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과 특히 한국 간장과 일본 간장의 향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일본 간장이 발효에서 오는 향에 집중하는 반면, 한국 간장은 이미 조미 중심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적 사용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본은 간장을 주로 찍어 먹는 용도로, 한국은 요리에 넣어 맛을 완성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격 자체가 다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국 간장은 글로벌 기준에서 보면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이 된다는 것이 해외 영업에 능통한 오 대표의 시각이다.
■ “간장을 팔지 않는다”는 전략
이 지점에서 매일식품은 간장을 더 잘 만드는 경쟁에서 벗어나 간장의 기능 자체를 바꾸는 전략으로 전환한다. “간장을 사서 양념을 따로 만들어 쓰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곧바로 요리에 쓸 수 있도록 보편적인 맛을 제공하는 게 맞아요.”

오 대표의 이러한 판단은 곧 제품 전략으로 이어졌다. 간장을 수출하는 대신 완성된 소스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업소용 대용량 제품부터 가정용 간편 소스까지, 매일식품의 제품은 ‘요리의 출발점’이 아니라 ‘요리의 완성 형태’에 가깝도록 설계됐다.
"이 상황에서는 간장 브랜드의 의미가 줄어들고, 대신 소비자는 결과적인 ‘맛’만 기억하게 된다."고 오 대표는 말한다.
■ CJ와 협업 그리고 제조와 유통의 분리, 새로운 실험
이러한 변화는 사업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최근 매일식품은 CJ제일제당과 협업해 생산과 유통을 분리한 모델을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다.
완제품은 매일식품이 생산하되, 유통은 CJ제일제당이 맡는 형식이다. 각자 생산과 유통 분야의 특기를 살려 브랜드와 유통 전략을 함께 가져가는 방식이어서 기존 OEM(주문자상표생산)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 차원을 떠나 장류 산업의 새로운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여서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제품의 품질 경쟁에서 더 나아가 유통과 시장의 접근 방식이 중요해진 흐름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 글로벌 시장은 ‘간장’으로 열리지 않는다
매일식품의 오랜 해외 시장 경험은 이러한 전략을 더욱 강화하게 만들었다. 오 대표는 일찌감치 간장 자체를 들고 나가서는 시장 진입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현장에서 그것을 직접 확인했다.
그 대신 소스 형태의 제품은 현지 식문화에 바로 적용할 수 있어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을 몸소 체험한 매일식품은 이를 기반으로 업소용 소스, 라면, 간편식 제품을 동시에 확장하고 있다.

오 대표는 "그러한 글로벌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ON라면’, ‘XL라면’ 등이 해외 시장 테스트를 위한 전략 상품으로 탄생했다."며 "특히 미국, 일본, 유럽 시장에서는 이러한 소스 중심 제품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 독일 대표 리테일그룹 REWE 매장 입점...유럽 시장, 느리지만 분명한 확장
우리의 한식 장(醬)을 기반으로 한 소스 제품의 글로벌 전략이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 시장이다. 유럽 시장은 한국 식품의 성장 가능성이 높지만, 복잡한 인증 절차와 규제, 유통 구조, 소비 습관의 차이 등으로 인한 진입 장벽이 높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그럼에도 매일식품은 수년 전부터 준비한 결과 독일을 대표하는 유통·리테일 그룹 중 하나인 REWE 매장 3000곳에 제품을 입점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REWE는 특히 품질과 신선식품·친환경 프리미엄 이미지가 강한 유통채널로, K-푸드 역시 '아시아식품'보다는 건강성, 발효, 비건성, 자연원료, 클린라벨 같은 요소를 강조해야 입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매일식품의 독일 REWE 입점은 유럽 메인스트림 시장에 K-푸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고, 진짜 현지화가 시작됐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매일식품은 이 외에도 영국에서 고추장 판매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일부 제품은 대기업보다 높은 실적을 기록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성과는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년간의 투자와 시행착오를 거쳐 시장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오 대표는 상기했다.
■ 아이스크림과 고추장의 조합?...장(醬)은 ‘주인공’에서 ‘구조’로 바뀌어
최근 글로벌 식문화의 변화는 장(醬)의 역할 자체를 바꾸고 있다.
전통적으로 장은 요리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식재료와 결합해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요소로 기능한다. 미국의 한 MZ 소비자가 우리나라 멜론맛 아이스크림에 고추장을 소스처럼 찍거나 발라서 먹는 모습을 SNS에 올려 화제가 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K-푸드의 조합이 새로운 소비 시장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장류 기업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합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 완성보다 "진행형" 제품 개발의 업데이트 전략으로
매일식품의 또 다른 특징은 제품 개발 방식이다. 완성된 제품을 내놓기보다 시장 반응에 맞춰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른바 ‘업데이트 전략’이다. 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식품 시장에서 중소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오 대표는 강변한다.
"연구소의 데이터와 시장 경험을 결합해 제품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변신하는 업데이트 구조"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 "결국은 소비자가 원하는 맛"...장(醬)의 시간, 그리고 시장의 시간
매일식품의 80년은 전통을 지켜온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의 매일식품은 그 시간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발효를 데이터로 바꾸고, 장을 소스로 확장하며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방향이다. 오상호 대표는 “결국 중요한 건 소비자가 원하는 맛이다.”고 단순 명쾌하게 정리한다.
장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그 흐름은 이제 장독대 안이 아니라 세계의 식탁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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