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산=김현옥 기자
- 승인 2026.04.17 12:31
현대식 자동화 시설에서 전통 방식으로 잘 띄운 메주가 본질
송상문 대표 “정직하게 시간을 발효한 장맛이 진미의 정체성”

장(醬)은 한식의 뿌리를 이루는 전통 발효식품이자, K-푸드의 본질을 가장 깊이 담고 있는 맛의 근간이다.
지금부터 기획 시리즈로 이어나가는 ‘醬의 시간’은 각 지역에서 대를 이어 장맛을 지켜온 작지만 강한 중소 장류업체들의 이야기다. 우리 식문화의 시간과 가치를 기록하기 위해 마련했다.
규모보다 깊이, 속도보다 시간을 선택한 이들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우리나라 장류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충북 괴산군 괴산읍 문무로 184, 육군 학생군사학교 ‘문무대’ 맞은편에 우리나라 장류산업의 근간인 진미식품이 둥지를 틀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구호가 울려 퍼지는 군사 훈련장과 마주한 이곳, 진미식품은 전혀 다른 방식의 시간 흐름으로 대조를 이룬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한 번 머물다 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바람은 군사 훈련장과 식품공장 모두 같은 방향으로 불지만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한쪽이 반복과 규율로 완성된다면, 다른 한쪽은 기다림과 발효로 완성된다.
괴산은 친환경 유기농 농업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청결고추와 절임배추, 대학찰옥수수 같은 특산물로 유명하며, 이 가운데 괴산고추와 고춧가루, 찰옥수수는 지리적표시제로 관리되고 있을 정도다.
좋은 원료가 나는 땅에 장류 공장이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필연에 가깝다.
“장맛은 결국 원료에서 시작된다.”는 진미식품 송상문 대표의 말처럼, 이곳의 시간은 재배에서 발효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장류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산업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기업의 철학과 닮아 있다.
■ 1948년, '장을 제대로 만들자'로 시작된 이야기
진미식품의 출발은 1948년, 고(故) 송희백 창업주가 대전 선화동에서 직원 3명과 함께 차린 ‘대창장류사’다.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 식탁의 기본이 되는 장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 하나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 작은 공방은 3대를 거쳐 지금의 진미식품이 됐다.
송상문 대표 역시 처음부터 가업을 이을 생각은 아니었다. 해외 유학을 준비하던 중 회사가 위기에 놓이자 스물여섯의 나이에 현장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숙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이 일이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지 알게 됐습니다.” 장류는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산업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송 대표의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업계에는 ‘철학’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진미식품 역시 다르지 않아, 창업주가 한결같이 강조해온 것 '정직함'이 기업의 정체성이다. “발효식품은 정직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계속 들었습니다. 그게 결국 맛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죠.”
송 대표는 진미식품의 경영 철학과 가치에 대해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기업, 진정한 장인정신으로 전통장류를 만드는 기업"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송 대표의 말은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78년 기업을 지탱해온 시간의 언어에 가까웠다.
■ 시간을 발효하다... 진미식품의 77년 장맛
위생·안전 관리가 생명인 식품공장은 해썹 (HACCP 식품안전관리인증기)이나 GMP (우수제조관리기준), 전통식품 인증, ISO 22000, FSSC2200 등 각종 인증을 받아야 한다. 반도체에 버금가는 청결도를 유지해야하는 만큼, 진미식품 역시 내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공장 안으로 외부인을 들이는 일이 없다.
그래서 방문객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별도의 견학로이다. 이 곳을 통하면 진미식품의 각종 장류 제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공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겹쳐진 풍경이 펼쳐진다. 자동화 설비와 위생 관리 시스템 뒤편에는 여전히 ‘메주’라는 가장 본질적인 공정이 살아 있다.




안내하던 송 대표는 자연스럽게 메주 이야기를 꺼냈다. “창업주인 할아버지께서는 메주가 잘 띄워야 장맛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장류의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됩니다.”
송 대표에 따르면 장류는 기술과 시간, 그리고 사람이 만드는 식품이다. 그중에서도 메주를 중심으로 한 발효 과정이 품질을 결정한다. 그래서 진미식품은 빠른 해결보다 ‘기준을 지키는 것’을 선택해왔다.
“장맛은 기다리는 시간에서 나옵니다. 숙성을 줄이거나 공정을 타협하면 결국 맛이 달라집니다.”
진미식품이 말하는 장맛의 핵심은 '잘 띄워진 메주와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정직한 맛’이다.
■ 발효도 시스템으로...전통을 지키되 감각에 맡기지 않는다
괴산 공장은 그런 철학 위에 세워진 공간이다. 하드 웨어인 설비 부분에서 보면 최신 공장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전통과 현대 기술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가 드러난다.
전통 방식의 메주 발효 공정을 유지하면서도, 제국 설비와 현대화된 생산 시스템을 통해 품질을 균일하게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발효 원리나 종균은 예전 방식 그대로 갑니다. 전통의 맛은 바꾸면 안 되는 부분이니까요. 대신 품질관리 공정은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완전히 바꿨습니다.” 심지어 "해썹 인증도 추가적으로 재인증을 받으며 시스템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송 대표는 실제로 "이곳에서는 발효가 더 이상 감각에 맡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쌀과 밀은 각각 다른 조건에서 발효되기 때문에 온도와 습도, 압력을 실시간으로 제어한다. 원료의 수분 함량과 종균 활성도까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리된다는 설명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경험으로 맞췄다면, 지금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맞춥니다. 그래야 언제 만들어도 같은 맛이 나오니까요.”
여기에 공조 시스템을 통해 외부 잡균을 차단하고, 발효 탱크 내 공기 흐름까지 조절해 미생물 증식이 균일하게 이루어지도록 관리한다. 발효식품이 ‘감각’의 영역이라면, 진미는 그 감각을 ‘시스템’으로 번역해 전통을 지키되, 그것을 재현 가능한 구조'로 만든 셈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신뢰, 그리고 다양한 유통 채널
송 대표는 공정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 있다고 했다.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안 보이는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원료 관리나 위생 같은 것들요.”
진미식품은 원료 입고 단계에서 시험성적서와 원산지 증명서를 확인하고, 보관 과정에서도 온도 관리와 이격 보관을 철저히 지킨다. 특히 Non-GMO 원료 사용과 같은 부분은 외부에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중요한 기준이다.
“요즘 GMO나 3-MCPD 같은 이슈가 많습니다. 실제로 장류와 직접 관련이 크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더 정확한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미식품의 또 다른 강점은 유통 구조다. 학교 급식, 군납, 대기업 납품, 대리점, 온라인까지 거의 모든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이 포트폴리오는 특정 시장이 흔들려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한쪽에 의존하는 구조였다면 이미 흔들렸을 겁니다.” 송 대표는 오랜 시간 쌓인 유통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고 말했다.
■ 글루텐프리·비건·저당...작지만 의미 있는 실험
최근 진미식품은 글루텐프리, 비건, 저당 장류 같은 기능성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고 있다.
"생산라인을 완전히 분리하고, 기준보다 더 엄격한 품질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만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방향이라면 가야합니다.”

특히나 글루텐프리 제품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브랜드 가치를 위해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미식품은 20ppm 기준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관리하며 제품의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송 대표는 “브랜드는 결국 신뢰라고 생각한다.”며 "온라인 채널에서는 '이런 제품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소비자 반응도 이어지고 있어 작지만 분명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 결국은 해외…“쌀 장류로 유럽을 본다”
포화 상태에 가까운 국내 시장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미식품이 자연스럽게 눈을 돌린 곳이 글로벌 시장, 특히 유럽이다.
“가격 경쟁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차별화된 제품으로 가야 합니다. 그 중심에 있는 전략이 글루텐 프리이고, 이것은 결국 쌀 기반 장류입니다."

글루텐프리, 비건 식품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유럽과 북미 시장에서는 전통 장류가 새로운 제품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다.
진미는 이미 쌀고추장, 쌀된장 등으로 100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러한 수출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부스 형태의 해외 전시회 참가 등 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으며, 현지화된 소스 형태 제품 개발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 醬 기반 '발효 소스'로 미래를 연다
장류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진미식품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선택한 방향이 ‘소스’다. 하지만 이 영역으로의 확장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소스 시장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제품을 잘 만들어도 유통에서 막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거죠”
실제로 진미식품은 제품 개발과 디자인까지 완성하고도 시장에서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뼈아픈 경험을 겪었다.

그런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우리는 장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그래서 소스도 장을 기반으로 가야 합니다.”
송 대표가 말하는 진미식품의 소스는 단순한 조미 제품이 아니라, 고추장과 된장, 간장을 기반으로 한 '발효 소스'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 B2B에서 B2C로...‘입맛의 기억’을 놓지 않는 '미련 아닌 전략'
진미식품은 현재 B2B 중심 구조가 강한 기업이다.
한때 가정용 제품 시장 점유율이 30%에 달한 적도 있지만, 대기업의 시장 진입 이후 시장 구조가 급격히 재편됐다.
“자본력이나 마케팅에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업의 무게 중심을 B2B 쪽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B2C 시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 중심에는 '진미춘장'이 있다.
지금도 가정용 춘장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제품은 브랜드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 상징이다.
“발효식품은 입맛에 각인됩니다. 한 번 익숙해진 맛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이 ‘입맛의 기억’이 진미라는 브랜드를 다시 소비자 시장으로 이끌고 있다고 송 대표는 말했다.
■ “맛은 전통에서, 품질은 기술에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진미식품을 한 문장으로 정의해 달라고 요청하자 송 대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맛은 전통에서 오고, 품질은 현대 기술에서 온다.” 고 답했다. 그 말은 이 회사의 현재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전통을 버리지 않되, 기술로 완성하는 기업,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믿는 기업. 78년을 이어온 진미식품의 장은 빠르게 변하는 시장 속에서도 괴산의 공기처럼 ‘천천히, 그러나 기준을 지키며’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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