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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醬의 시간] 80년 발효, 100년을 준비하는 강릉 동해식품

곡산 2026. 3. 30. 06:54
[르포-醬의 시간] 80년 발효, 100년을 준비하는 강릉 동해식품
  •  [강릉=김현옥 기자]
  •  승인 2026.03.27 15:21

한식의 뿌리를 지켜온 시간, 그 장맛의 현장을 걷다
김진은 대표 “장맛은 물맛, 100년 기업은 발효로 완성된다”
(사진=동해식품 제공)

장(醬)은 한식의 뿌리를 이루는 전통 발효식품이자, K-푸드의 본질을 가장 깊이 담고 있는 맛의 근간이다.

지금부터 기획 시리즈로 이어나가는 ‘醬의 시간’은 각 지역에서 대를 이어 장맛을 지켜온 작지만 강한 중소 장류업체들의 이야기다. 우리 식문화의 시간과 가치를 기록하기 위해 마련했다.

규모보다 깊이, 속도보다 시간을 선택한 이들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우리나라 장류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KTX 강릉역에서 택시로 6.8km 남짓 10여분 달리면 도착하는 곳. 시내를 벗어나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모산로를 따라가면, 도시의 밀도가 낮아지며 저 멀리 완만한 산자락 밑에 펼쳐진 들판으로 인해 시야가 트이고 공기가 한층 가벼워진다.

고즈넉한 농촌 풍경에 젖어들 즈음, 드넓은 농지 한가운데 어쩌면 쌩뚱맞다 싶을 정도로 자리 잡은 약 3천 평 규모의 공장이 모습을 드러내며, 동해식품 간판이 먼저 손님을 맞는다.

강릉시 모산로에 위치한 동해식품 전경 (사진=동해식품 제공)

해방 이후 80년, 그러나 뿌리는 더 깊다

이곳은 올해로 80주년을 맞는 장류기업 동해식품의 현재이자, 동시에 100년을 향해 이어질 다음 시간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동해식품의 공식 연혁은 1946년,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실질적 뿌리는 그보다 앞선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시 100년사에는 1929년 시내에 간장공장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운영 주체는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식품 김진은 대표는 이 지점을 “장류 산업이 가진 공통된 역사”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왜간장’, 즉 일본식 간장 제조를 기반으로 전국 각지에 공장이 세워졌고, 그것이 오늘날 장류 산업의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동해식품 김진은 대표

다만 많은 기업들이 그렇듯, 동해식품 역시 해방 이전의 역사는 공식 연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소유 구조와 인수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946년 창업’이라는 숫자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함께 존재한다.

김 대표는 “8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산업적 뿌리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따라서 동해식품은 1946년 '강릉장류양조조합'으로 창업되어 1963년 강릉장류(주)로 법인 전환한 것이 공식적인 회사의 역사다. 그 당시 현재 김 대표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대한장류조합도 설립돼 지금까지 동해식품과 발자취를 같이하고 있다.  

김 대표는 1999년부터 대표를 맡아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는데, 이후 2001년 지금의 동해식품(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상호에 사용한 동해는 강원도의 한 지역명이기도 하지만, 사천항부터 부산 앞바다에 이르는 큰 동해 바다를 이르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김 대표는 매우 의미있고,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동해식품이 1963년 강릉세무서에서 받은 강릉장류(주) 법인 번호가 33번인데, 지금 현존하는 법인사업자 중 가장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1~32번 사업장은 모두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3천평 규모 공장, 그리고 사라진 적산가옥의 흔적...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법인사업체

현재 공장은 강릉시 모산동, 시내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약 3천 평 규모 부지 위에 공장동과 사무동, 연구시설, 창고가 기능별로 나뉘어 배치돼 있다. 회사 이전은 1980년대 중반 이뤄졌다.

그 이전 공장은 강릉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적산가옥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김진은 동해식품 대표가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해방직후 적산가옥에서 운영되었던 강릉장류양조조합 건물을 바라보며 역사의 흔적을 느끼고 있다.
김진은 동해식품 대표가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해방직후 적산가옥에서 운영되었던 강릉장류양조조합 건물을 바라보며 역사의 흔적을 느끼고 있다.

“그 건물이 남아 있었으면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관광 자원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제 잔재라고 해서 대부분 없애버렸죠.”

김 대표의 말처럼, 아쉽게도 장류 산업의 역사와 함께 존재했던 공간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새로운 건물이 대신하고 있다. 공장 안에 남은 몇 장의 사진이 그 시간을 간신히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장맛은 물맛”… 110m 암반수가 만든 제품 차별성

동해식품의 생산 규모는 지역 기반 기업이라는 인식을 넘어선다. 고추장과 된장이 각각 연간 약 1,400톤, 간장은 약 1만8,000kl, 여기에 쌈장과 까막장 등 혼합장까지 더해지며 안정적인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동시에 HACCP 인증과 기술혁신형(INNO-BIZ), 경영혁신형(MAIN-BIZ) 인증을 확보하며 ‘전통’과 ‘시스템’을 동시에 갖춘 기업 구조를 완성했다.

동해식품 주요 제품의 연간 생산능력 

그러나 이 공장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물’이다. 김진은 대표는 “장맛은 물맛입니다.”며 장류의 본질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동해식품은 110미터 깊이의 암반 지하수를 사용한다. 김 대표는 이를 두고 "발효식품에서 물은 단순한 원료가 아니라 미생물 환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장맛의 핵심”이라고 표현했다.

“장맛은 물맛이다.”는 김 대표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강릉 지역에 가뭄이 심했을 때에도 상수도에 의존하던 공장들이 생산 차질을 우려해야 했던 반면, 자체 암반수를 확보하고 있었던 동해식품은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했다.

김 대표는 “지하 암반을 통과한 물이 장류에 적합한 미네랄과 안정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 회사 장류제품의 차별성이 분명하다.”며 “이 물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동해식품이 추구하는 ‘자연 기반 발효’라는 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이 철학은 ‘강표’ 브랜드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하늘, 땅, 그리고 물. 자연의 세 요소를 기반으로 최고 품질의 장 제품을 만든다는 메시지가 로고에 담겨 있다.

동해식품 강표 브랜드 변천사(왼쪽)와 현재의 로고(오른쪽). 로고 위 블루는 청정한 맑은 하늘, 중간의 그린은 대관령 아래 넓은 녹지, 아래 레드는 비옥한 토양과 맑은 물을 의미한다. 

발효의 시간, 그리고 ‘후발효’를 멈추는 기술

공장 내부에서 본 장류 생산 공정은 전통과 산업화가 겹쳐진 모습이다.

생산 공정은 전통 장 담그기의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쌀과 곡물에 종균을 접종해 효소를 만드는 제국 공정에서 시작해, 숙성과 배합을 거쳐 살균과 포장으로 이어진다.

가운데 원통형 설비가 증자(Steaming) 공정이다.
제국(Cultivation) 설비
동해식품 간판제품인 까막장 살균(Sterilization) 공정
포장(Packaging) 라인
장 숙성실
간장 충진기
출고를 기다리는 동해식품 장류 제품들이 창고에 적재되어 있다.

현장을 안내한 김남규 총괄이사는 ‘국을 띄운다’는 표현으로 제국 과정을 설명했다. 막걸리 제조 과정과 유사하게, 미생물을 활용해 발효의 기반을 만드는 단계다.

다만 과거와 달리 현대 장류는 반드시 ‘살균’ 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장독대에서 발효가 계속 진행되는 상태로 소비됐지만, 현대 유통 환경에서는 후발효를 제어하지 않으면 제품이 부풀고, 소비자는 변질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효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미생물의 활동을 통제하는 기술, 이 지점이 전통식품이 산업으로 전환된 핵심이다.”는 것이 김 이사의 설명이다.

제품 전략은 ‘용도’ 기반으로 설계

동해식품의 제품 전략은 무조건적인 종류 확장이 아니라 ‘용도 기반 설계’에 가깝다. 떡볶이용 고추장과 찌개용 고추장이 분리돼 있고, 국간장과 맛간장이 구분되며, 된장 역시 국용과 재래식으로 나뉜다.

같은 장류라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도와 발효 정도, 맛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이는 장류를 단일 제품이 아닌 ‘조리 솔루션’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동해식품의 이를 위해 부단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중소기업부 인증은 물론 식품 관련 인증은 모두 획득했고, 지식재산권 외에도 고추장을 비롯한 각종 제조방법 특허도 여러 건이다.

특히 자랑할만한 것은 '고추냉이 간장' 관련 특허다. 항균작용이 있어 생선회나 고기 등을 먹을때 많이 사용하는 고추냉이(와사비)를 간장에 사용함으로써 인공 보존료를 배제하는 방법이다. 동해식품은 자연친화 제품인 '고추냉이 간장'의 디자인과 상표를 지식재산권으로 보유하고 있다.

동해식품에서 생산하고 있는 장류제품들

강원도의 맛, ‘묵은장’이 보여주는 지역 식문화

제품 라인업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묵은장’이다. 강원 지역의 식문화를 반영한 ‘묵은장’은 이 기업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일반적으로 수도권 소비자는 색이 밝은 된장을 선호한다. 갈변이 진행된 검은 된장은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원도에서는 반대다. 충분히 숙성된 장일수록 색이 짙고, 맛도 깊다는 인식에서 “검은 된장이 진짜 장”이라고 여긴다.

동해식품은 이러한 식문화를 반영해 6개월에서 1년 이상 숙성한 묵은장을 별도 제품으로 운영하고 있다.

색이 짙을수록 깊어지는 맛, 그 시간의 축적 자체가 상품이 되는 구조다.

“까맣지만, 맛은 더 깔끔”… 시그니처 ‘만능 까막장’

이 같은 철학이 가장 집약된 제품이 바로 동해식품을 대표하는 ‘만능 까막장’이다.

김 대표는 “강원 지역에서 사용되던 막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으로, 묵은장과 밝은 된장을 혼합하고 고춧가루 등을 더해 색은 짙고, 맛은 보다 깔끔하게 정리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동해식품 시그니처 제품인 '만능 까막장'

된장은 텁텁할 수 있는데, 까막장은 발효가 충분히 진행되면서 감칠맛이 더 강화돼 찌개, 쌈, 무침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만능’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현재 온라인에서도 꾸준히 언급되는 동해식품의 시그니처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이 제품의 생산은 일반 장류보다 훨씬 까다롭다. 숙성 기간이 길어, 수요가 늘어날수록 미리 재고를 확보해 두어야 하는 구조다.

“1년 뒤 물량까지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발효식품 기업이 감수해야 하는 ‘시간 비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기업과 다른길…전략적으로 선택한 ‘가치 경쟁’

하지만 까막장의 진짜 의미는 제품 자체에 있지 않다. 이는 대기업 중심의 표준화된 장류 시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동일한 제품으로 경쟁하는 대신, 숙성과 배합을 차별화해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격 경쟁이 아닌 가치 경쟁으로 이동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대기업으로부터 OEM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기술 유출과 거래 의존도를 우려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기 안정성보다 장기 생존을 선택한 결정이다.

OEM을 거절한 이유, 중소기업의 생존 공식

장류 산업을 둘러싼 구조 역시 간단하지 않다. 대기업은 유통과 브랜드를 장악하고 있고, 중소기업은 생산과 제품력에 강점을 갖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 OEM은 유혹적인 선택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큰 리스크이기도 하다. 특정 거래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기업의 자율성은 줄어들고, 거래 중단 시 타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동해식품이 OEM 대신 자체 브랜드 전략을 고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류업계는 과거 중소기업 고유업종에서 해제된 이후 대기업 진입이 본격화됐고, 현재는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일부 제한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중소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결국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까막장처럼 숙성과 배합에서 차별화된 제품, 달지 않은 고추장처럼 용도 특화 제품, 그리고 전통식 고급 장류까지. ‘가격 경쟁이 아닌 가치 경쟁’이 동해식품의 방향이다.”고 재차 강조했다.

“밥을 안 먹는 시대”… 장류 산업의 현실

김 대표는 “장류 산업은 지금 구조적인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며 시장의 구조 변화도 업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먹거리가 너무 많아진 탓이다. 가정식이 줄고 외식과 배달이 일상화되면서 장류의 필수성이 약해졌고, 젊은 세대는 밥과 김치 소비 자체를 줄이고 있다. 발효식품으로서의 장류가 갖는 의미와 별개로, 시장 환경은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다.

그럼에도 동해식품의 방향은 분명하다. B2B와 B2C를 병행하며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하는 동시에, 차별화 제품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고, 수출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전략이다.

현재 동남아와 호주, 미국 등을 중심으로 수출이 시작됐고, 올해는 방콕 식품박람회 참가를 통해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동해식품이 자사 시그니처 제품인 까막장을 활용한 요리로 강릉 토박이 식단을 제공하는 '까막장이야기' 식당. 현재 안테나숍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며 소비자 반응을 타진한 후 프랜차이즈사업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시간으로 성장하는 기업, 100년을 향한 전진

장류 산업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동해식품의 경우 까막장처럼 1년에 가까운 숙성을 거치는 제품은 생산과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재고’가 된다.

이 기업이 말하는 100년 기업은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시간을 축적하는 구조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년 후 동해식품의 모습에 대해 김 대표는 “두 배는 성장해 있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외형 확대와 인력 확충, 그리고 세대 승계까지. 동해식품은 이미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동해식품 사무동 2층 벽면에 걸려 있는 '지속성장을 통한 100년 기업 달성'이란 문구가 이 회사의 미래 비전을 말해준다.

강릉 모산로 동해식품 공장을 떠나며 남는 인상은 ‘장류는 시간을 만드는 식품이고, 기업 역시 시간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동해식품의 80년은 전통이 어떻게 산업이 되고, 다시 가치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시간 위에 다시 100년을 쌓겠다는 계획은, 결국 ‘지속가능성’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된다.

장의 시간은 지금도 이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