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한끗]①야쿠르트, '균'을 팔다
- 정재웅 기자 polipsycho@bizwatch.co.kr
- 2023.01.22(일) 11:05
1935년 일본에서 첫 선…유산균 음료 시장 열어
국내에는 1971년 처음 생산…일본 기술제휴
주부 활용한 판매·고급 이미지 등으로 급성장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야쿠르트의 '클래스'
주면 좋지만 안 줘도 그만인 것이 있습니다. 가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건네받는 '요구르트'입니다. 안 줘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면 또 왠지 좋습니다. 챙김을 받았다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또 인지상정입니다. 그 작은 병에 담긴 액체를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식당 괜찮네'. 그런데 그 요구르트가 '야쿠르트'라면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오! 이 식당 꽤 괜찮네'라고요.
비슷한 제품이지만 '요구르트'와 '야쿠르트'의 간극은 생각보다 큽니다. 일반적인 요구르트와 야쿠르트는 클래스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요구르트와 야쿠르트가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 요구르트의 원조가 야쿠르트이고 그 야쿠르트가 국내 유산균 음료 시장을 열었다는 것을 알게 되신다면 아마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사실 이번 야쿠르트편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야쿠르트가 일본에서 건너온 제품이어서입니다. 우리가 현재 애용하고 있는 식품 중 생각보다 일본이 시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국민들 사이에선 반(反)일본 정서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쿠르트 도입 당시 유산균 음료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국내 사정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쿠르트를 아이템으로 선택한 것은 이제는 국산화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작은 일본에서 들여온 균주(菌株)였지만 이후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국산화를 이뤄냈습니다. 그 야쿠르트를 여러분들이 지금 드시고 계신 거고요. 단순히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야쿠르트가 폄훼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봤습니다. '우리' 야쿠르트 이야기를요.
야쿠르트의 시작
야쿠르트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930년 일본 교토제국대(현 교토대) 박사였던 '시로타 미노루(代田稔)'가 만든 제품입니다. 시로타 박사의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시로타 박사는 늦깎이로 교토제국대 의학부에 입학합니다. 시로타 박사가 의대생이던 시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열악한 위생상태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창 군국주의의 광풍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온 나라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죠. 그러다 보니 일반 국민들의 위생과 건강 상태에는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다. 그 탓에 많은 국민들이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시로타 박사는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을 미리 '예방'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가 미생물 연구의 길로 들어선 이유입니다.
시로타 미노루(代田稔) 일본 야쿠르트 창업주 / 사진출처=야쿠르트 인디아 홈페이지미생물 연구를 하던 시로타 박사는 유난히 사망률이 높은 어린아이들의 사례에 주목합니다. 특히 장(腸) 건강이 좋지 않아 감염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장 건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시로타 박사는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바로 야쿠르트의 핵심인 '유산균'입니다. 시로타 박사는 세계 최초로 '살아서 장까지 가는 유산균'을 발견합니다.
이 유산균은 시로타 박사의 이름을 따 '시로타 주(株)'로 지었습니다. 정식 이름은 ‘락토 바실러스 카제이 시로타’(Lactobacillus casei strain Shirota)입니다. 시로타 박사는 이 유산균을 활용한 제품 개발에 나섭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유산균의 효과를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야쿠르트’(Yakult)'입니다. 야쿠르트는 에스페란토어로 요구르트(yogurt)를 의미하는 ‘야후르토’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야쿠르트 병에 담긴 비밀
시로타 박사는 '시로타보호균연구소(代田保護菌硏究所)'를 설립, 1935년 자신이 발견한 유산균을 바탕으로 한 음료인 '야쿠르트'를 선보입니다. 1938년에는 '야쿠르트' 상표 등록을 마칩니다. 이후 시로타 박사는 1955년 '야쿠르트혼샤(ヤクルト本社)'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합니다. 본격적으로 야쿠르트 제품 판매에 나선 겁니다.
초창기 야쿠르트는 유리병에 담겼습니다. 하지만 유리병의 단가가 비싼 데다 회수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야쿠르트혼샤에서는 새로운 용기를 고민합니다. 한 손에 쥘 수 있고 기울였을 때 내용물이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는 디자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현재의 플라스틱병에 든 야쿠르트입니다. 현재의 병 디자인은 1968년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인 '켄모치 이사무(剣持 勇)'가 고안한 겁니다.
시대별 야쿠르트 병 디자인 변천사 / 사진=야쿠르트 호주 홈페이지켄모치 이사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산업 디자인계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야쿠르트혼샤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그에게 야쿠르트 병 디자인을 의뢰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제품의 용량이 작지만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 디자인에 홈을 팠고 기울였을 때 홈에 걸려 여러 번에 걸쳐 마시도록 고안했습니다. 음용 시 만족감을 주기 위한 조치인였던 셈입니다.
야쿠르트 병 디자인은 지금까지 야쿠르트를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현재 전 세계 40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야쿠르트의 모든 디자인은 동일합니다. 상표만 각 나라의 말로 다를 뿐 내용물과 디자인은 같습니다. 야쿠르트혼샤는 이제 야쿠르트를 비롯한 유제품뿐만 아니라 식품, 화장품까지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에 상륙하다
일본의 야쿠르트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71년입니다. 1969년 고(故) 윤덕병 창업주가 서울 청계천에서 문을 연 '삼호유업'이 시작입니다. 그는 군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공부했습니다. 이후 육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전쟁을 치르고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경호실장을 지냈습니다.
1963년 중령으로 예편한 윤 창업주는 마침 당시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축산진흥정책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우유 생산량은 많았지만 우유에 대한 인식 부족 탓에 소비량이 적어 우유가 남아돌았습니다. 이를 유심히 봐왔던 그는 일본에서 경험했던 유산균 발효유를 떠올립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유산균 음료에 뜻을 품은 것이 그때입니다.
조선일보 1971년 8월 29일자에 실린 야쿠르트 광고 /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유산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던 그는 마침 건국대 축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사촌 형 고(故) 윤쾌병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힘을 합친 두 사람이 시작한 것이 바로 한국야쿠르트유업(현 hy)입니다. 윤 교수는 초대 사장을 맡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유산균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습니다. 연구시설도 없었습니다. 맨땅에 헤딩식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실패만 맛봤습니다.
결국 윤 창업주는 일본 야쿠르트의 기술을 도입키로 합니다.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지만 반드시 이를 바탕으로 우리 기술로 만든 유산균 음료를 선보이겠다고 다짐합니다. 일본에서 가져온 종균(種菌) 엠플을 기반으로 유산균 음료 개발에 전력투구합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야쿠르트 생산에 성공합니다. 윤 창업주는 1971년 경기도 안양에 국내 최초 발효유 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야쿠르트 제조·판매에 나섭니다.
'유산균 음료' 시장을 열다
하지만 유산균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시장의 저항은 생각보다 거셌습니다. "무슨 병균을 돈 받고 파느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윤 창업주와 한국야쿠르트유업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야쿠르트는 냉장 보관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냉장고는 고가의 제품이었습니다. 냉장고가 있는 집에서 야쿠르트를 구매해 먹는 다는 것은 그만큼 고급 제품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야쿠르트에는 그렇게 고급 이미지가 덧붙여졌습니다.
70년대 야쿠르트 광고 / 사진제공=hy판매 방식에도 변화를 줬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시작한 방문 판매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윤 창업주는 소비자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주부들을 방문 판매 사원으로 채용했습니다. 가방에 휴대용 냉장 시설을 갖추고 집집마다 돌며 주부들이 직접 야쿠르트를 판매했습니다. 엄마나 옆집 아줌마와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주부들이 야쿠르트를 판매하자 야쿠르트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여성들에게 사회 참여의 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 야쿠르트 이미지 개선과 판매량 급증 효과를 제대로 본 겁니다. 그리고 이런 파격은 우리나라 유산균 음료 시장을 여는 기폭제가 됐습니다. 한국야쿠르트유업의 성공을 목격한 여러 기업들이 잇따라 '요구르트'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유산균 음료 시장은 점점 더 커집니다.
이어질 이야기에서는 야쿠르트에 숨겨진 비밀과 마케팅 비법을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일본에서 시작됐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기술로 야쿠르트를 제조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던 뒷이야기들이 준비돼있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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