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버지 '매몰된 생활인권'
"직장은 전쟁터… 애들한텐 돈버는 기계로… 쓸쓸해요"
[정유성 서강대 교수, 20명 심층면접 보고서]
"스트레스 인내력 높은게 더 치명적, 양육 참여로 돌보는 문화 체득해야"
"전쟁터였어요. 서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궁리하고, 경쟁이 심하다 보니 온갖 음모와 술수가 난무했습니다. 결국 저는 잘리고 말았지만, 차라리 시원하고 마음 편해요. 지금 생각하면 직장 생활 12년 내내 악몽 같았어요."(42세 실직자)
"아버지는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반적 세태예요. 아내도 그렇고, 아이한테 아빠가 왜 좋냐고 물으니까 돈 벌어와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엔 가장에 대한 형식적 예의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것조차 없으니 더욱 쓸쓸하죠."(44세 공무원)
정유성 서강대 교수가 전하는 우리 시대 40대 남성들의 고백에 동세대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을 표했다.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국인권재단(이사장 박은정 서울대 교수)이 주최한 강연 및 토론 행사 '생활인권 대화마당 알지(知)'에서였다.
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을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 정 교수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40대 남성 20명을 심층 면접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인권을 추상적 목표가 아닌 구체적 생활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 즉 '생활인권'으로 본다면 40대 남성 직장인이야말로 가장 어두운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어 면접 결과를 토대로 이들 세대의 삶과 의식의 특징을 짚었다. 우선 직장 생활에선 실직 위협에 처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선후배ㆍ동료와의 관계에서도 곤란을 겪는다.
정 교수는 "비인간적인 직장 문화는 40대를 점차 자기소외에 빠뜨리고 동료들의 사정에도 무감하게 만든다"며 '한국 문화에 적응 못하는 유학파 동료를 왕따 시켜 내보냈다'고 스스럼없이 밝힌 47세 남성의 말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또 "직장을 우선시하는 사회구조, 자녀와의 소통 장애로 40대의 인권은 가정에서도 난망하다"고 지적했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던 아버지의 모습을 싫어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나도 아버지와 꼭 닮아간다"는 한 면접 대상자의 얘기는 변화된 가족 문화 속에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는 중년 가장들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상담 경험을 통해 40대 남성들이 겪는 심리적 장애를 설명했다. 최근 만난 40대 가장은 평소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자부했는데 우연히 고교생 딸의 일기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에 대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가득했던 것. 정 대표는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고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가 짐작과 전혀 다름을 인정했다고 털어놨다"며 "인간관계에서 이같은 착각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이를 '페르소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라고 분석했다. 그리스 시대 연극 배우들이 역할에 따라 페르소나(가면)을 바꿔 썼듯이 사회 생활에서도 상황마다 그에 맞는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40대 남성들은 그런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것.
정 대표는 "특히 직장에서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은 중년들은 자녀에게도 '성공한 직장 상사' 역할을 하려고 들면서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강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감정을 터트리기보단 삼키는데 익숙한 40대 남성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듯도 했다.
19년 간 직장에 다니다가 3년 전 작은 회사를 차렸다는 이모(46)씨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자정 무렵 귀가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일에 매몰돼 살면서 과연 자기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모(46)씨도 "내 나이쯤 되면 삶을 돌아보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돌아봐야 하고 구체적으로 뭘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신모(48)씨는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가 큰 건 사실이지만 개인마다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만큼 모든 스트레스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업무 스트레스가 심한데도 실제보다 낮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면서 '이 정도 스트레스도 안받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느냐'고 되묻는다"며 "하지만 높은 스트레스 인내력은 곧 낮은 스트레스 민감도를 뜻하며, 이는 자기를 보호하는 내부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치명적 신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실에서 문제를 발견했을 때 성급히 해결책을 찾다가 포기하지 말고 문제를 끈기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40대 남성들이 '가르고 나누는' 것에 익숙한 남성중심 문화를 버리고 '보살피고 돌보는' 관계지향적 감수성을 몸에 익혀야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며 "여성에게만 내맡겼던 양육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실천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정유성 서강대 교수, 20명 심층면접 보고서]
"스트레스 인내력 높은게 더 치명적, 양육 참여로 돌보는 문화 체득해야"
"전쟁터였어요. 서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궁리하고, 경쟁이 심하다 보니 온갖 음모와 술수가 난무했습니다. 결국 저는 잘리고 말았지만, 차라리 시원하고 마음 편해요. 지금 생각하면 직장 생활 12년 내내 악몽 같았어요."(42세 실직자)
↑ 16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국인권재단이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 인권'을 주제로 개최한 강연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정유성 서강대 교수의 연구보고서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정유성 서강대 교수가 전하는 우리 시대 40대 남성들의 고백에 동세대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을 표했다.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국인권재단(이사장 박은정 서울대 교수)이 주최한 강연 및 토론 행사 '생활인권 대화마당 알지(知)'에서였다.
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을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 정 교수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40대 남성 20명을 심층 면접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인권을 추상적 목표가 아닌 구체적 생활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 즉 '생활인권'으로 본다면 40대 남성 직장인이야말로 가장 어두운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어 면접 결과를 토대로 이들 세대의 삶과 의식의 특징을 짚었다. 우선 직장 생활에선 실직 위협에 처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선후배ㆍ동료와의 관계에서도 곤란을 겪는다.
정 교수는 "비인간적인 직장 문화는 40대를 점차 자기소외에 빠뜨리고 동료들의 사정에도 무감하게 만든다"며 '한국 문화에 적응 못하는 유학파 동료를 왕따 시켜 내보냈다'고 스스럼없이 밝힌 47세 남성의 말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또 "직장을 우선시하는 사회구조, 자녀와의 소통 장애로 40대의 인권은 가정에서도 난망하다"고 지적했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던 아버지의 모습을 싫어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나도 아버지와 꼭 닮아간다"는 한 면접 대상자의 얘기는 변화된 가족 문화 속에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는 중년 가장들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상담 경험을 통해 40대 남성들이 겪는 심리적 장애를 설명했다. 최근 만난 40대 가장은 평소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자부했는데 우연히 고교생 딸의 일기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에 대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가득했던 것. 정 대표는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고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가 짐작과 전혀 다름을 인정했다고 털어놨다"며 "인간관계에서 이같은 착각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이를 '페르소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라고 분석했다. 그리스 시대 연극 배우들이 역할에 따라 페르소나(가면)을 바꿔 썼듯이 사회 생활에서도 상황마다 그에 맞는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40대 남성들은 그런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것.
정 대표는 "특히 직장에서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은 중년들은 자녀에게도 '성공한 직장 상사' 역할을 하려고 들면서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강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감정을 터트리기보단 삼키는데 익숙한 40대 남성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듯도 했다.
19년 간 직장에 다니다가 3년 전 작은 회사를 차렸다는 이모(46)씨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자정 무렵 귀가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일에 매몰돼 살면서 과연 자기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모(46)씨도 "내 나이쯤 되면 삶을 돌아보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돌아봐야 하고 구체적으로 뭘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신모(48)씨는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가 큰 건 사실이지만 개인마다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만큼 모든 스트레스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업무 스트레스가 심한데도 실제보다 낮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면서 '이 정도 스트레스도 안받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느냐'고 되묻는다"며 "하지만 높은 스트레스 인내력은 곧 낮은 스트레스 민감도를 뜻하며, 이는 자기를 보호하는 내부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치명적 신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현실에서 문제를 발견했을 때 성급히 해결책을 찾다가 포기하지 말고 문제를 끈기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40대 남성들이 '가르고 나누는' 것에 익숙한 남성중심 문화를 버리고 '보살피고 돌보는' 관계지향적 감수성을 몸에 익혀야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며 "여성에게만 내맡겼던 양육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실천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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