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크랩] 홍천강 굴지리 노일리[자료]

곡산 2007. 3. 30. 13:33

아름다운 강마을

홍천강 굴지리 노일리 답사를 앞두고 [자료 준비]

 

하루 단시간에 답사를 하지 못할것이다. 천천이 나누어서 답사를 하렵니다. 길을 나서면 여러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여 예정 시간보다 늦어지는 일을 종종 경험하였기에...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은 여행을 떠난 만큼이나 설레이고 즐겁다.

밤 늦도록 커다란 지도를 펴놓고 가야 할 길을 살펴보며 미지에서 막영지를 선택하는 일이란 실제 만큼 즐겁고 가슴이 설렌다.

 

아래의 모든 사진은 2006년 여름에 촬영(한국의산천)한 사진입니다.  



▲한여름의 홍천 강변 ⓒ2007 한국의산천.우관동 (禹官東)


북방면 굴지리


내 젊음의 시간이 고이 간직되어 있는 곳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기억이란 묘비명처럼 단단한 암석판에 각인된 글이다.

봄이 온다.
얼음장으로 뒤덮혔던 그 홍천강에 봄이 오고 있다.
가봐야지 그 곳에
내 젊은 시절의 시간이 고스란히 용해되어 있는곳 북방면 굴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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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 있는 里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진 농촌이다. 마을 중앙으로 홍천강이 흐르며 강 근처엔 굴지소유원지가 있다.
마을 위로 작은 하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 거문건너, 무랭이, 산꾸네미, 석골, 석밭재가 있다. 거문건너는 굴기 동남쪽 건너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무랭이는 굴지 안에 있는 마을로 물이 흔하여 생긴 이름이다. 산꾸네미는 굴기 동북쪽 산 구렁 안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석골은 굴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석밭재는 굴기 강 건너쪽 재 밑에 있는 마을이다.

굴지리 강변은 예로부터 뛰어난 경관의 유원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치고 교통도 불편하다. 소매곡리와 노일리 중간에 걸쳐있지만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각각 달리 진입해야한다.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붐비는 홍천군의 강줄기 중 인적이 드문 편이라 휴가철에도 한적한 가족낚시터로 좋다. 양안의 험준한 산과 바위가 풍치를 더해준다. 낚시터 주변에 낚시채비와 미끼, 음식을 팔고 민박까지 겸하는 매점이 있어 편리하다. 물 흐름이 잔잔한 깊은 소의 상류 여울을 찾으면 된다. 굴지리 강변상회(033-435-8795), 장항리 개미상회(033-435-7420)

주변 둘러볼 곳

노일리 강변


 

▲ 노을지는 노일리 강변에 다시 서고 싶다.ⓒ2007 한국의산천  

노일강변유원지는 홍천강이 첩첩 산중사이로 물줄기를 숨긴 곳으로 아직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마을을 따라 시원스레 흐르는 맑고 투명한 강물은 보기만 해도 무더위가 사라진다.
남노일강변은 크게 관광농원 주변과 노일대교 주변으로 나뉜다. 먼저 만나는 노일대교 주변은 모래사장이 적고, 물의 흐름이 비교적 급하여 물놀이를 하기는 좀 힘들며 허리까지 차 오르는 물 속에서 견지낚시를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다. 그러나 고드래미 관광농원 강변은 한참을 들어가도 허리춤밖에 차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 물놀이장으로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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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자기한 수석 같은 팔봉산 ⓒ2007 한국의산천  


팔봉산유원지는 아름다운 산과 물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휴가지이다. 해발 320m의 낮은 산이지만 크고 작은 여덟 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정겹게 이어지는 팔봉산. 용마굴, 장수대, 백운대 등의 기암괴석이 홍천강에 비치는 모습은 가히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산자락이 깊게 걸린 강가에서 잠시 지친 몸과 마음을 던져놓고 쉬기에 좋다. 이곳에서 매년 8월이면 견지낚시축제가 열리는 곳이다.(033)434-0813.


 

▲모래와 자갈이 많고 넓은 개야강변 ⓒ2007 한국의산천  


개야강변
은 모곡 삼거리에서 낡은 시멘트 다리를 건너 1.5㎞정도 강변도로를 타고 달리면 개야 강변 유원지 이정표를 만난다. 강변쪽으로 나 있는 비포장 내리막길에 내려서서 소나무 숲 사이를 통과하면 시원하게 강변이 펼쳐진다. 

 

넓은 강변에는 바닷가 해변을 연상시킬 정도로 백사장이 넓어서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좋고 물도 차지 않아 물놀이에도 제격이다. 강변에서 야영을 하거나 발야구, 족구 등 간단한 공놀이를 즐길 수 있어 나들이의 즐거움을 더한다. 민박 최옥현(033-434-8190) 밤벌유원지는 홍천강에서 비교적 많이 알려진 곳으로 강폭이 넓고 물살이 잔잔하며 물이 차갑지 않아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 오토 캠핑으로 유명한 모곡 밤벌 유원지ⓒ2007 한국의산천  

 

밤벌유원지는 주변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간혹 지명 이름을 따라 모곡유원지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물이 풍부하고 깨끗해 물고기들이 많다. 쉬리, 모래무지 등 깨끗하고 모래가 많은 곳에서 서식하는 민물고기 이외에도 바위 주변에는 메기, 동자개, 꺽지 등이 많아 생태박물관을 연상시킨다. 또한 대략 2㎞ 정도의 넓은 자갈밭과 모래밭을 가지고 있으며 강변에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어 오토 캠핑장으로 그만이다. 모곡관광농원(033)434-0450.


▲홍천 비발디 파크 ⓒ2007 한국의산천  


짜릿함이 가득한 비발디파크 오션월드
이집트를 테마로 한 오션월드는 새로 만든 워터파크답게 최첨단의 짜릿한 물놀이 시설로 가득하다. 튜브를 타고 래프팅을 하듯 파도를 즐기는 익스트림 리버는 연인들의 은밀한 데이트 코스. 하나의 튜브에 둘이서 몸을 부딪치며 넘쳐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서먹함은 사라진다.
 

 

 

▲ 비발디 파크의 물 썰매장ⓒ2007 한국의산천  

 

길이가 무려 300m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간혹 물(?)도 먹는 재미가 넘쳐난다. 또한 튜브를 타고 래프팅을 즐기는 패밀리 래프트 라이드는 4인 가족이 동시에 함께 탈 수 있다. 가족들이 함께 탄 튜브가 경사진 슬라이더를 미끄러져 내려오며 짜릿함을 선사한다. 마지막에 풀장으로 떨어질 때 하얀 물보라를 맞는 것이 하이라이트. 무엇보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탈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수평형·대각선형·다이아몬드형 등 변화무쌍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실내 파도풀,17m 높이에서 떨어지는 하이 스피드 슬라이드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위한 10여 종류의 자그마한 슬라이더까지 있어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욱이 수영복을 입고 초록 잔디 위에서 시원한 물보라를 맞으며 질주하는 물보라 썰매는 아주 색다른 맛이다. 이밖에도 찜질방, 헬스장, 노천탕, 사우나 등을 갖춘 전천후 워터파크로 홍천강에서 놀다가 한번쯤 들러 볼만 한 곳이다.

 

▲ 굴지리 노일강변 주변지도 ⓒ2007 한국의산천  


홍천강
총 길이 143㎞.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해 홍천시내를 거쳐 청평호로 흘러든다. 수심이 낮고 수온이 따뜻해 매년 피서객으로 붐비는 곳이 바로 홍천강이다. 모래무지, 쏘가리, 누치 등 1급수에만 사는 물고기가 지천인 까닭에 강태공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때문에 홍천강 줄기는 어느 곳에서나 낚싯대를 드리워도 손맛이 짭짤하다. 그중에서도 마곡에서 모곡, 개야리, 팔봉산, 화양강 등이 낚시 포인트다.

유원지 또한 강줄기를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어 맘 내키는 곳에 피서지를 정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굴지리유원지는 홍천강 상류에 위치한 까닭에 한적하고, 팔봉산유원지는 수심이 얕고 팔봉산이 코앞에 있어 산행까지 즐길 수 있는 게 장점. 또 밤벌유원지는 자갈과 모래가 강변에 드넓게 펼쳐져 풍광이 아름답고, 청평호로 이어지는 마곡유원지는 수심이 깊어 수상스포츠를 즐기기에 좋다.

자연을 벗삼아 유원지에서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으며 홍천강의 백미는 역시 견지낚시다. 물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연줄 풀 듯 낚싯줄을 강물에 드리우면 피서가 따로 없다. 한여름 땡볕에 몸이 뜨거워졌다 싶으면 강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으면 된다.

천년고찰 수타사를 코앞에 둔 홍천군 동면 덕치리 단봉교 아래는 홍천강 상류다. 하류에 비해 한적하고 물살도 부드럽다. 게다가 수심이 얕고 자갈밭이 운동장처럼 넓어 낚시와 물놀이, 휴식을 취하기에 제격이다.

짙게 푸른 강변 나무들, 소박한 시골풍경을 벗삼아 어른들은 낚시를 즐기고, 아이들은 다슬기를 잡으며 휴가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다.

 

주변 볼거리
공작산, 수타사, 팔봉산, 내린천,가리산자연휴양림, 미약골, 금학산, 가령폭포, 용소계곡, 살둔계곡, 가칠봉삼봉약수, 비발디파크,소리산계곡 등. 홍천군 경제관광과 (033)430-2544

굴지리 교통
홍천을 기점으로 홍천 춘천간 5번 국도를 따라가면 동산면이 나온다 동산파출소앞에서 좌회전하여 시멘트 포장도로를 2km정도 가다가 역전평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굴지리에 이른다.

서울 → 양평 → 6번국도 → 청운면소재지 → 44번국도 → 홍천 → 5번국도 → 홍천기점 10㎞ 전방 부원상회 앞 삼거리 좌회전 → 4㎞ 앞 사거리에서 굴지리 방면 좌회전 → 비포장도로로 4㎞ 가면 왼쪽에 굴지리 낚시터 → 길을 따라 2㎞ 더 들어가면 장항리 낚시터

양덕원 사거리에서 구도로를 따라 인제쪽으로 100여m를 가면 왼편으로 양덕원천을 따라 남노일리 가는 도로가 잘 나있다.이 양덕원천도 물놀이를 하기에 좋으며 20여분을 가면 남노일리에 이른다. 도중에 홍천강을 따라 굴지리로 가는 비포장 도로가 오른쪽으로 나 있어서 장항리와 굴지리 강변도 드라이브 해볼만 하다.

북방면 굴지리 강변은 바위벼랑이 빚은 경치가 제법 수려한 곳이다. 전반적으로 수심이 깊고 물살도 빠른 편에 속하지만, 강줄기가 휘돌아 가는 지역은 수심이 얕아 가족나들이에 적당하다. 모래사장은 거의 없고 대부분 자갈과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홍천읍 지나 44번 국도에서 진입, 양덕원에서 남노일리로 가다가도 장항리를 거쳐 진입 가능. ‘06현재 장항리∼남노일리로 이어지는 강변도로를 포장공사 중이지만 승용차도 통행 가능하다. 굴지리유원지 주변은 진입 교통은 편리하지만 자연미가 사라지고 깨끗치 못하다. 대신 비포장 도로를 따라 하류로 더 내려간 장항리, 특히 허브랜드 펜션 앞의 다리 주변 강변이 넓고 다양하게 물놀이를 즐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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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길라잡이 

 

강원도 중서부에 자리한 홍천군(洪川郡)은 동쪽은 양양군과 강릉시, 서쪽은 경기도 가평·양평군, 남쪽은 횡성·평창군, 북쪽은 춘천시와 인제군에 각각 접한다. 지세를 보면 동쪽은 오대산(1,539m)의 두로봉(1,422m)∼응복산(1,360m)∼약수산(1,306m)∼구룡령∼갈전곡봉(1.204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분수령으로 이루고, 남쪽은 두로봉에서 한중지맥으로 이어지며 평창군과 경계를 이루는데 역시 1,000m를 넘나드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인제군과 경계를 이루는 북부도 개인산(1,341m)∼소뿔산(1,123m)∼매봉(80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고을이다. 산지는 군 전체의 87%를 차지한다.

고구려시대엔 벌력천현(伐力川縣)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녹효현이라 하여 삭주(朔州·지금의 춘천) 아래에 두었고,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홍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143년(인종 21)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 춘천부의 홍천군이 되었으나 다음해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강원도에 속하는 홍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35년 경기도 양평군의 단월면 분지리가 홍천군에 편입되고, 광복 후 38선 이남 인제군의 인제면·내면·남면의 3개 면이 편입되었다가 1954년 인제면·내면이 다시 인제군으로 환원되었다. 1973년 춘성군 동산면 북방리·풍천리와 양양군 서면 명개리가 편입되었으며, 내면 미산리는 인제군으로, 남면 상창봉리는 횡성군으로 이관되었다. 2004년 현재 홍천읍, 화촌·두촌·내촌·서석·동·서·남·내·북방면의 1읍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천군의 가장 큰 젖줄은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이다. 한중지맥(한강기맥)의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서쪽으로 흐르며 여러 지류를 합류하면서 군 중앙부를 지나 북한강 청평호에 흘러든다. 하천 유역엔 홍천 분지와 소규모의 하안단구,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생활의 터전이 되고 있다. 홍천군 가장 동쪽의 내면은 인제 내린천 최상류인 계방천과 한중지맥 운두령에서 발원한 자운천이 젖줄 역할을 한다.

 

홍천군은 내륙 산간지역이라 여름과 겨울의 기온교차가 심하다. 8월 평균기온 26.0℃, 1월 평균기온 -7.3℃, 연평균기온 11.1℃이지만, 동부와 서부의 차이가 심하다. 연평균강수량은 1,141mm. 면적 1,818.04㎢, 인구 74,000명(2003년 현재)이다. 군청소재지는 홍천읍 희망리.

총경지면적 17,484ha 중에서 논 6,742㏊, 밭 10,742㏊로 논밭 비율은 4:6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옥수수·약초·잎담배 등이며 최근 인삼재배가 증가하고 있다. 원목 생산이 많고, 잣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늘푸름한우’라는 상표로 잘 알려진 소를 비롯해 돼지, 사슴을 사육한다.

 

교통은 양평∼인제 사이의 44번 국도와 춘천∼원주 사이의 5번 국도가 홍천읍에서 교차하면서 군의 동서남북를 연결한다. 또 춘천∼양양 사이의 56번 국도가 군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인제∼평창 사이의 31번 국도가 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므로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특히 44번 국도는 2004년 5월 현재 양평에서 화촌면까지 왕복 4차선으로 포장되어 있고, 공사중인 홍천군 화촌∼인제군 남면 사이가 4차선으로 완공되면 홍천 동부 접근은 지금보다 수월해진다.

 

한중지맥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뻗은 ‘한중지맥’은 계방산(1,577m)∼태기산(1,261m)∼오음산(930m)∼용문산(1,157m) 같은 큰 산들을 세우고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에서 그 세력을 다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굳센 산줄기임에도 여느 정맥들이 지니고 있는 하구(河口)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산경표>에선 이름을 얻지 못했다. 현재 두로지릉, 한중지맥, 한중정맥, 한강정맥, 계방지맥, 한강기맥, 한강정맥, 용문산맥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홍천강

홍천의 젖줄인 홍천강(洪川江)은 홍천군 중앙부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으로 길이 143km에 이른다. 서석면 검산리 미약골 상류에서 발원한 강줄기는 내촌천으로 흐르면서 장남천, 야시대천, 풍천천, 덕치천을 합한 후 홍천읍을 지나 오안천, 성동천, 어룡천, 중방천과 합류해 비로소 큰 물줄기를 이룬 다음 서면 마곡리를 지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경계에서 북한강의 청평호로 흘러든다.

명칭을 살펴보면,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리편과, 17세기 중엽에 저술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 및 1765년경 8도의 읍지를 수집하여 편찬한 여지도서, 1871년경 편찬된 관동읍지에는 홍천강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였고, 1831년경 강원감영이 관내 군현의 읍지를 모아 편찬한 관동지에는 화양강(華陽江)으로 표기하였다. 1861년 김정호가 판각한 대동여지도엔 홍천강(洪川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홍천 주민들은 홍천읍을 중심으로 상류지역은 화양강, 하류지역은 홍천강이라고 불러왔다. 요즘엔 상하류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홍천강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홍천군청 관광담당 033-430-2544.

 

희망리 삼층석탑

홍천읍 사무소의 희망리 삼층석탑은 원래 홍천초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돌 위에 널찍한 돌 두 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다. 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이 탑은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가 맞지 않고, 마치 탑신이 기단부의 첨가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의 조각에 있어서도 약화된 모습이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79호. 홍천읍사무소 033-434-7790∼6.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인데 현재는 홍천읍 사무소 안 희망리 삼층석탑 옆에 옮겨 세웠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사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 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한 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다.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이 물씬 풍기지만, 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어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540호. 홍천읍사무소 033-434-7790∼6.

 

희망리 당간지주

홍천읍 희망리 강변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7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돌을 다룬 기법이나 특별한 장식 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다.
전체적인 겉모습은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천흥사지 당간지주와 유사하다. 주변의 삼층석탑과 기타 석조물 등과 비교하여 볼 때, 거의 같은 시대의 조법(彫法)을 나타내고 있어 고려 중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본다. 이 당간지주 일대는 현재도 절터였음을 알리는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보물 제80호. 

 

공작산 수타사

월정사의 말사인 수타사(壽陀寺)는 동면 덕치리 공작산(887m)에 있는 절이다. 708년 우적산 기슭에 창건될 당시엔 일월사(日月寺)였으나 1457년 지금의 위치로 건물을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지금의 수타사(壽陀寺)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36년 중건해 지금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수타사의 중심 법당으로 내부 장식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적광전(大寂光殿·강원유형문화재 제17호)을 비롯하여 삼성각·봉황문·흥회루·심우산방·요사채 등이 있다. 고려 후기의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제11호), 홍우당부도(강원문화재자료 제15호) 등이 있다. 심우산방 옆에는 귀신이나 잡귀로부터 수타사를 지킨다는 전설이 있는 수령 500년의 주목 한 그루가 있다. 


한편,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 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 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 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독특하게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 사천왕상 뱃속에서 나와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 두 권은 2004년 가을에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수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올 예정이다. 수타사 033-436-6611.

 

홍천향교

홍천읍 희망리 홍천군청 옆에 위치한 홍천향교는 조선시대 홍천의 지방 교육시설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엔 두촌면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후 화촌면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홍천읍 희망리 현 호국사 부근에 옮겼고, 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시기에 다시 현재의 위치에 이전 건립하였다. 대성전 앞에 있는 느티나무의 수령이 약 400년이 넘는다는 사실에서 400여 년에 현 위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6·25전쟁 당시 명륜당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복원했다. 수복 직후 홍천중학교로 사용한 적도 있다.

 

한서 남궁억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언론인인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1863-1939)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애국지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흥화학교 교사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이 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다. 1905년 성주(星州) 목사, 이듬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 회장이 되었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의 보리울(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고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병을 얻어 1935년 석방된 후 1939년 별세하였다. 저서로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현재, 한서 남궁억이 활동하던 서면 모곡리엔 남궁억기념관과 무궁화 묘포장이 있고, 당시의 예배당도 복원해 놓았다. 묘소는 모곡초등학교 뒷산인 유리봉 중턱에 있다. 매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남궁억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한서문화제가 열린다. 한서문화제위원회 033-435-4350
www.hanseofestival.co.kr 

 

강재구공원

북방리 성동 골짜기 입구 과거 13연대가 있던 곳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강재구(姜在求·1937-1965) 소령은 1965년 10월4일 월남전에 참가하기 위한 마지막 훈련 중 부하가 실수로 중대원이 모여있는 곳에 수류탄을 떨어트리자 자신의 몸을 던져 중대원 100여 명의 생명을 구했다. 육군은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4등 근무공로훈장을 추서했다.
1973년 그가 산화한 북방면 화동리에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1987년엔 기념비 옆에 건평 25평에 기념관을 세워 그의 유품 125점을 전시하고 있다. 매년 10월4일 고인의 유족과 육사 동기생들이 찾아와 고인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도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입장료, 주차료 없다. 관리사무소 033-433-1760

 

홍천향토사료관

무궁화공원 안쪽에 자리한 홍천향토사료관은 홍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춘 곳이다. 제1전시실은 홍천의 역사, 주민들의 의식주, 관혼상제 등에 관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한서 남궁억 선생과 무궁화에 대한 사료가 전시된 무궁화역사관이다. 제3전시실은 농경전시관으로 과거 강원 산골에서 쓰던 주루막, 등잔, 함지박을 비롯해 올챙이묵틀, 탈곡기 등 농경문화의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차료, 관람료는 무료. 전화 033-434-5994.

 

팔봉산 당굿

홍천강변인 서면 팔봉리에 솟은 팔봉산(302m)은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마다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연출해 철마다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온다. 팔봉산 제2봉 정상엔 칠성, 산신 그리고 3부인(이씨, 김씨, 홍씨) 신을 모신 당집이 있다. 이 당집에선 팔봉산 주변 주민들이 매년 음력 3월15일과 9월9일에 농사의 풍년과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당굿을 한다. 산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10여 년 전부터 팔봉산 주차장에서 굿놀이를 성대히 열고 있다. 400여 년 전인 1590년대부터 당굿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통방아놀이

화촌면 구성포리와 동면 노천리 등 수량이 적은 험준한 산간마을에 많이 있던 전통놀이로 전해오는 농요를 중심으로 노동의 즐거움과 풍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놀이 네 과정은 운목, 귀재설치와 물통방아 제작, 물대기와 방아찧기, 한마당놀이 순서로 행해진다.
먼저 물통방아를 만들기 위하여 귀새를 달 통나무를 운반한 후 방아확과 귀새에 물을 대며 곡물을 방아확에 넣고 찧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감사와 기쁨의 표현으로 신명나게 풍년가를 부르고 춤을 추는 한마당놀이가 전개되는 민속놀이다. 전승자는 동면 삼현리에 거주하는 신양식씨다.

 

연자매놀이

연자매는 직경 1∼2m 정도의 둥근 돌로 된 맷돌(웃돌)을 바닥돌 위에 세워 앉히고 중심줏대(중수리)를 축으로 틀목에 부착시켜 회전할 수 있게 하고, 바닥돌도 오돌오돌하게 쪼아서 곡식이 잘 찧어지도록 한 것으로, 소를 이용하여 방아타령을 부르며 찧게 하였다. 방앗간은 이엉이나 나무껍질로 쌓고 새초지붕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농토는 거의 화전이었던 까닭에 주로 보리와 조 등의 잡곡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곡물을 찧기 위하여 현대식 도정기가 보급되기 훨씬 이전에 마소를 이용해 인력을 절감함은 물론, 대량의 곡식을 찧을 수 있는 연자매를 활용하였다. 놀이과정은 가을걷이 및 타작, 돌 운반 및 매 제작, 방아찧기, 한마당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전승마을은 북방면 성동리다.

 

장승깎이놀이

북방면 화동리 웃범골 마을은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홍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산골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나흗날이면 마을 전체 사람들이 모여 가정의 행운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는데, 장승과 솟대를 깎아 세우고 지내는 장승제다.
장승을 언제부터 깎아 세웠는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옛날 선역(腺疫)이 심해 많은 소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마을 입구 사방에 장승과 솟대를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 후부터는 소가 병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 길가에 장승과 솟대가 서있고 당집도 있다.  
 

 

 

▲ 산행과 여행은 갈망되고 이어 준비된다. ⓒ2007 한국의산천   
 

강원도 홍천 서부  [월간 산]
“태극으로 굽이도는 저 물줄기는 최승희의 춤사위인가”
홍천강 물줄기로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무궁화 고을  

  

 

▲ 홍천 금확산에서 내려 본 산태극 수태극 문양의 홍천강 ⓒ2007 한국의산천   

금확산 (655m)은 홍천 팔봉산에서 정동쪽으로 약 4.5km떨어져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홍천강변 마을인 노일리 마을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다. 금확산은 원소리고개 방면만 빼고는 삼면을 홍천강이 굽이 돌며 에워싸고 있다.

 

“징징지잉….”

징소리다. 산을 뒤덮은 짙은 구름 때문에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가늠은 안 되지만 징소리가 분명하다. 제비꽃 화사하고 취나물 향기로운 산길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파르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제2봉과 제3봉의 안부. 징소리는 제2봉 꼭대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가파른 바위를 넘어 돌아가니 치성 드리는 무당들이 보인다. 간밤에 제법 비가 많이 내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새벽에 그친 덕에 별 어려움이 없이 칠성당과 삼부인당에서 당굿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기자기한 여덟 봉우리 아름다운 홍천 팔봉산(八峰山·302m). 제2봉 정상 바위에 자리잡은 칠성당엔 가파른 길을 이고 지고 날라온 온갖 제물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강신무(降神巫) 조정순씨(73)가 눈을 지긋이 감고 조용조용 징을 두드리고, 신 제자들은 팔봉산 신령님과 칠성님께 절을 올리고 있다.

이어 칠성당 바로 곁 바위턱에 자리잡은 삼부인당(三婦人堂)으로 간다. 자그마한 당 안에는 산 아래 팔봉 마을 서낭신인 홍씨, 이씨, 김씨 세 부인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조 보살과 오늘 굿청을 맡아줄 강신무가 신위 앞에 앉아 징을 치면서 삼부인 신을 모신다. 제단 위에 놓인 명태 한 마리를 소중하게 싸들면 산 위의 신당에서 신을 모시는 일은 끝난다.

 

사위는 구름바다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언뜻언뜻 이웃 바위봉우리들이 보이지만, 발 아래 홍천강은 끝내 자신의 몸매를 보여주지 않는다. 강신무들이 잰걸음으로 하산하기 시작한다. 일흔을 넘긴 노인들 발걸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 바위 사잇길로 휑하니 사라져버린다. 하긴 일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없이 찾아온 삼부인당이 아닌가.

홍천강이 아랫도리를 적시고 흐르는 팔봉산은 인근 팔봉 마을의 진산이다. 마을신앙의 상위 신격이 서낭신과 산신으로서 마을의 진산 꼭대기에 모셔져 신성시되어 왔다는 사실은 산에 대한 경외심의 소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허나 팔봉산은 작은 강변 마을의 진산일 뿐만 아니라 1,000m가 훨씬 넘는 높은 산들을 많이 거느린 홍천이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며 자랑하는 산이기도 하다. 300m 겨우 넘는 낮은 높이에도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듯 암벽으로 이루어져 험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 아래의 홍천강변 널따란 주차장에선 굿청이 시작되었다. 올해엔 굿에 쓰일 돼지가 열 마리나 들어왔으니 예감이 더욱 좋다. 연분홍빛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무당이 동서남북을 향해 징을 울리며 절을 한다. 이어 그녀의 입에선 무가(巫歌)가 흘러나온다. 징소리와 노랫소리는 신의 음성인양 둘러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이 당굿을 보러 마을 사람들은 물론 원주, 춘천, 서울 등지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통 강신무의 축원으로 팔봉산 당굿, 행사 기원굿을 연다. 이어 칠성굿-장군굿-작두굿-대감굿-대신동자굿을 마치면 첫날의 굿은 얼추 끝난다. 다음날은 홍천강에서 넋을 건지는 용신굿을 한다. 큰물로 죽어간 마을사람들의 넋과 물놀이 왔다가 강에 빠져죽은 넋을 건져 해원상생하는 굿이다. 그리고 굿을 이끌어 가는 당주(堂主) 조정순 강신무의 뒷점굿인 한마당굿으로 이틀만의 팔봉산 당굿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곳 팔봉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줄 신당(서낭당, 산신당)을 팔봉산 꼭대기에 두고 그 신당을 삼부인당으로 불렀다. 이(李)씨 성을 가진 시어머니와 홍(洪)씨 성을 가진 딸, 그리고 김(金)씨 성을 가진 며느리, 이 세 분을 모신 당이 삼부인당(三婦人堂)이다. 강신무 조 보살은 이씨 성을 칠성정기로, 김씨 성을 산신정기로, 홍씨 성을 삼해용왕정기로 계시받아 각기 흰 색, 파란 색, 빨간 색으로 삼아 그녀의 굿당에 물색을 걸어 두었다.

팔봉 주민들은 삼부인 서낭신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당제의 역사는 400여 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현(縣)에서 주관하다가 어느 때부턴가 무당이 맡아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흔히 마을굿은 마을 어른들이 유교식으로 주관하게 마련인데, 이 마을의 당굿은 신당에서 삼부인 신을 모셔와 굿을 하는 일 모두를 무당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운무가 걷힌다. 말끔한 팔봉산 얼굴이 드러난다. 아담하지만 볼수록 끌리는 묘한 매력덩어리의 산이다.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국수와 떡으로 허기를 달랜 뒤 팔봉산을 뒤로하고 홍천강 물줄기 따라 흘러간다.

홍천은 무려 87%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악 고을이다. 화전이 성행하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산에 불을 놓고 조와 수수와 옥수수 씨를 뿌렸고, 가파른 돌밭을 일궈 감자를 심었다. 수량 적지 않은 이 홍천강이 있었지만 논농사를 지을 만한 큰 평야는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홍천강 물줄기에 기댄 강마을마다 유원지가 형성됐다. 여름만 되면 강변은 울긋불긋 텐트의 물결로 뒤덮였다. 주민들이 물고기 잡고 헤엄치던 그 강물은 이제 외부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아주 번잡한 유원지만 벗어나면 주민들도 이른봄의 풋나물처럼 순박함을 잃지 않고 있다. 자연의 힘일 것이다.

 

강을 따르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피서객들 몰려드는 한여름보다는 산괴불주머니, 조팝꽃 같은 온갖 들꽃 흐드러진 요즘이 최고다.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산 사이를 굽이돌며 흐르는 강물을 쉬엄쉬엄 감상하는 맛이란! 조용하고 깨끗한 물에서 지내길 좋아하는 원앙 부부도 몇 쌍 만난다. 암수가 서로 정다울 수밖에 없는 봄날이기 때문일까. 녀석들의 몸짓은 한없이 한가롭고 행복해 보인다.

물론 사람들도 있다. 물옷 입고 맑은 강물에 몸 담근 채 시침질에 여념 없는 견지낚시꾼, 호박돌 깔린 깊은 소(沼)에서 스피너 던지는 데 정신 팔린 루어낚시꾼들도 만난다. 맛 좋다는 꺽지나 쏘가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릴대 서너 개 드리우고 한 자리서 며칠을 지낸 듯한 열성 낚시꾼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물 따라 산 따라 그렇게 흘러가다 다다른 곳은 홍천강 하류의 모곡리 보리울. 홍천강변에 널려있는 유원지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흔히 ‘홍천강유원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강변 미루나무 그늘에서 매미소리 자장가 삼아 졸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슬기 잡고, 견지낚시로 피라미와 누치 잡아 매운탕 끓여 먹던 여름날의 추억. 이곳 모곡리 강변의 여름 풍경은 홍천강 전체의 여름 풍경화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홍천강의 여름을 대표하는 모곡리 강변 들어서는 길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꽃인 무궁화를 만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궁화를 민중의 가슴에 심어준 인물을 만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1863-1939)이 이곳 보리울 마을로 낙향한 것은 1918년. 독립신문에 참여했고, 독립협회 총무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던 한서. 황성신문 초대 사장으로 언론에 종사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던 한서는 배화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몰래 국사를 가르치고, 한반도 지도에 무궁화를 수놓게 할 정도로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열중하다가 일제의 핍박이 점차 심해지자 고향인 이곳 보리울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한서의 의지는 볼 것이라고는 강줄기밖에 없는 첩첩산중의 오지였던 이곳에서 더 빛을 발했다. 교회와 학교를 짓고 교육에 힘쓰는 한편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퍼뜨리는 데도 힘썼다. 그러다 1933년 남궁억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자, 일제는 국사교육 사업과 비밀결사인 십자당사건을 이유로 체포하였다. 한서는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지만 결국 77세인 1939년에 그렇게 바라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게 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서기념관을 기웃거리다가 한서교회의 현재호 목사님을 만났다.

“기념관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한서 선생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이지요. 예배당, 학교, 무궁화 묘포장 등이 모두 요 앞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부친이 한서의 마지막 제자였던 인연을 따라 어떤 영감을 받고 9년 전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교사업을 펼치면서도 한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서의 자료를 찾는 데 주력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여기에 한서기념관이 세워지고, 무궁화동산을 꾸며지고, 초기의 예배당이 복원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남궁억 선생 기념사업은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경제전쟁 아래에서도 큰 가치가 있습니다. 무궁화가 갖고 있는 그 에너지, 그 역동성을 세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운동으로 가꾸어나가야겠지요.”

한서교회 앞 무궁화동산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종류인 63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게 그가 임업시험장과 무궁화연구회 등에 편지 보내고 발품도 팔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궁화는 일러야 7월 초순에 피기 시작하니 이 무궁화동산을 빛내는 어여쁜 무궁화꽃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모곡을 벗어나며 무궁화를 생각해본다. 꽃잎 전체가 온통 새하얀 배달, 흰 꽃잎에 붉은 중심부가 들어 있는 백단심, 흰 색 바탕꽃잎 상단에 붉은 무늬가 어리는 아사달…. 스스로도 한 송이의 고결한 무궁화꽃이었던 한서는 한서초등학교 뒤에 우뚝 솟은 유리봉 중턱에 묻혀 오늘도 자신이 사랑하던 이 땅을 굽어보고 있다.

 

홍천은 우리나라에서 면적이 가장 너른 고을이다. 시(市) 중에 가장 넓다는 안동시의 면적(1,519.18㎢)에 강화도 면적과 맞먹는 300㎢를 더해야 홍천의 면적인 1,818.9㎢와 비슷해진다. 면적이 가장 너르기도 하지만 동서의 길이가 가장 길기도 하다. 즉, 서쪽은 북한강의 청평호 물살에 닿아있으니 서울이 멀지 않은데, 동쪽 구룡령과 오대산의 두로봉에선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주민들은 흔히 “홍천의 동서는 300리”라 말한다. 지리상으로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고을인 것이다.

이 때문에 언어 차이도 있다.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동쪽의 내면은 양양·강릉·속초 등의 영동 방언에 가까워 거센 느낌이 들고, 경기와 붙어있는 서쪽의 서면·남면 등의 말씨는 경기 방언에 가까워 살갑게 들린다.

일반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서의 차이는 기후다. 표고를 대충 살펴봐도 서면 소재지가 해발 100m, 내면 소재지가 해발 600m 내외에 이르니 무려 500m의 표고 차이가 있다. 표고 100m에 0.6℃ 차이가 있다고 할 때 3℃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 동부엔 800m를 훌쩍 넘기는 높은 고갯마루들이 즐비하다고 보면 적어도 5℃ 이상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녹음이 짙은 여름보다는, 시각적으로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늦은 봄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서쪽의 서면은 복사꽃, 산벚꽃, 돌배꽃 다 스러지고 초여름으로 안내하는 철쭉꽃이 만발한데, 동쪽의 내면은 겨우 이른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5월 초순의 경험으론 내면의 봄이 서면의 봄보다 일주일쯤 늦은 것 같았다. 이는 홍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였다.

 

잠시, 전통 산줄기로 홍천을 살펴보자. 수도권에서 홍천으로 들어설 때는 양평을 지나게 되는데, 양평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강원도를 알리는 반달가슴곰 동상이 반기는 고개가 나온다. 바로 신대치(新大峙)라 불리던 신당고개다. 44번 국도가 확포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당고개엔 큰 서낭당이 있었지만, 고갯마루를 깎아 길을 넓힐 적에 당집도 함께 사라졌다.

이 신당고개는 영동과 서울을 잇는 길목이기도 하면서, 빗물을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즉 한강을 남북으로 가르는 거대한 산줄기인 한중지맥에 속하므로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이 남쪽으로 흐르면 남한강으로, 북쪽으로 흐르면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 신당고개를 비롯해 운두령, 삼마치 등이 홍천에 속한 한중지맥 고개 중 두 강의 분수령 역할을 한다.

기왕에 수계(水系)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짚어보자. 홍천강에 기대고 있는 홍천의 땅덩어리는 거의 북한강 수계에 속한다. 동북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내면만 홍천강이 아닌 내린천의 상류지만, 내린천도 어차피 북한강의 지류이니 홍천의 모든 고을이 북한강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홍천 고을이면서도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이색 마을이 하나 있으니 바로 동면의 좌운리다.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계천은 원주 섬강의 상류로서 남한강 수계에 속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주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땅속 광맥으로 이 땅을 분류한 일제의 산맥 개념으론 절대로 알 수 없고, 지상의 산줄기로 구분했던 전통 지리 개념으로 보면 삼척동자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 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사랑은 이렇게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지방을 다니다 보면 새롭게 발굴된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수가 적지 않다. 지금은 ‘영암 출신 왕인박사’가 기정 사실화되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월출산 기슭의 왕인박사 이야기는 단지 전설일 뿐이었다. 삼국시대의 불운한 영웅 계백의 묘를 논산 황산벌 근처에서 찾아낸 것도 사학자가 답사하면서 전설과 설화와 지명 등을 조사한 노력의 결과다. 그리고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흔적을 좇다가 영월 마대산 기슭에서 시인의 묘와 허물어진 생가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욕심이 앞서 전문가들의 확실한 고증 없이 아전인수격으로 사실화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이미 이런 과거사 발굴은 문화에 목마른 이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

 

‘홍천에 뭐 새로운 게 없을까’, 하고 찾아간 홍천문화원. 거기서 길손은 지난 해 새로 부임한 전상범 사무국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헤어질 때 그는 홍천문화원에서 2003년에 발간한 <벌력문화>를 길손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엔 한 여자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녀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인 춤꾼이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에 고통받을 때 그녀는 혼을 빼놓을 듯한 춤사위와 빼어난 미모로 일본과 중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에 이름을 드날렸다. 세계 사람들은 그녀의 몸짓에 놀라워했고 열광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최승희(崔承喜·1911-?). 서울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던 그녀가 강원도 홍천의 궁벽한 산골 출신이었던 것이다.

<벌력문화>에서 홍천 출신 언론인인 함광복씨(강원도민일보 논설위원)는 ‘홍천이 낳은 세기의 무희 최승희’라는 제목의 논고를 통해 ‘남북한을 뛰어 넘은 그녀를 고향에서 부활시키자’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튿날, 모든 일정을 물리치고 44번 국도를 타고 남면 제곡리로 달린다. 양덕원 이후엔 제대로 된 이정표가 단 하나도 없어 물어 물어 제곡리 안말까지 겨우 찾아간다. 함 위원의 지적대로 최승희가 태어나 살던 집은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지만, 최승희가 대여섯 살 때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춤솜씨를 보였다는 옻나무재 샘터는 아직 남아있다. 아쉽게도 옻샘은 말라있었다. 여름 큰비가 온 다음에야 잠깐 흐른다는 게 주민의 말이다. 그런데 주민들 중에 최승희가 살던 집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가 없다. 증언도 서로 엇갈렸다. 100년도 안 되는 세월의 공백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최근 들어 최승희의 예술은 부활하는데도 고향이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최초 발굴자인 함 위원은 ‘우리 모두가 이데올로기의 서슬 퍼런 공갈에 너무 오랫동안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승희가 월북자였던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최승희를 홍천에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요즘은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는다”며 약간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군청에서도 최승희 고향을 부활시키기 위해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여건은 좋아 보인다. 최승희가 춤추며 노닐었을 마을 앞 냇물은 그 당시처럼 참으로 깨끗해 다슬기가 지천이다. 최승희가 유학 가기 위해 배를 타러가던 홍천강 응아지 나루터까지의 십리 길을 내내 맑은 냇물이 동행하는 데다가 강변의 경치도 빠지지 않는다. 물도 좋고, 산도 좋고, 공기 좋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거기에 제곡리보다 상류의 명동리는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오리농법을 시작한 친환경 마을이라 구경거리도 있다.

이렇듯 세계적인 춤꾼 최승희가 고향마을에서 부활하는 데 부끄럽지 않은 환경을 아직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최승희가 제곡리에서 최참봉의 손녀딸로 부활하는 그 날. 그녀가 춤을 추던 옻샘을 다시 찾아와 시원한 샘물을 마시며 목젖을 적시고 싶다. 그때는 떠났던 이 샘물도 다시 돌아와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홍천은 산 깊은 고을임에도 나라의 보물이 제법 많다. 읍내만 해도 읍사무소에 두 점, 홍천강변에 한 점, 이렇게 세 점이 있다. 또 다음달 둘러보게 될 동쪽의 물걸리사지엔 한 자리에 무려 다섯 점의 보물이 있으니, 산악 고을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읍사무소 안에 자리한 두 점의 보물은 ‘제자리의 원칙’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이 보물들은 그곳에서 ‘1천 년 전에 만들어진 정원석’ 이상의 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변의 당간지주는 원래의 자리에 있으나 현대식 집 같은 주변 풍경에 묻힌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모두, 절집이 폐사되면서 남은 유물들이 이리저리 치이게 되면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인 것을.

그래서일까. 공작산(887m) 날개에 안긴 수타사(壽陀寺) 가는 길은 마음이 편하다. 하마비(下馬碑) 표석이 있는 수타교에서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용담(龍潭). 나지막한 폭포수 아래의 짙푸른 소는 옛날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또 원래 일월사(日月寺)였던 절 이름이 현재의 위치로 절터를 옮기면서 ‘물 수(水)’ 자를 써서 수타사(水陀寺)라 했는데, 이 용담에 스님들이 빠져죽자 ‘목숨 수(壽)’자로 바꾸었다는 유래도 전한다.

 

홍천서 향내음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이 절집 안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 단아하고, 박물관에 모셔진 탱화도 좋다. 수타사는 사천왕상 복부에서 세조 때 간행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7, 권18의 2권1책 초간본이 발견되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그 책자는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산속에 자리한 절집의 유물들이 도난 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본사인 월정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던 것인데, 지난해 소형 박물관을 지었고, 올 가을이면 월인석보를 반환 받는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볼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화양강인가, 홍천강인가?’

홍천강을 지날 때 늘 품었던 의문이다. 홍천 읍내를 휘감고 흐르는 홍천강 물줄기를 건너는 다리가 여럿 있는데, 거기엔 ‘화양교’도 있고, ‘홍천교’도 있다. 그리고 홍천강 앞 표석엔 커다랗게 ‘화양강’이라 새겨놓아 지나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홍천강은 한중지맥(한강기맥)과 가까운 서석면 검산리의 미약골에서 발원해 내촌천으로 서류하다 두촌면 철정에서 장남천을 합류해 덩치를 한껏 키운 뒤 화촌면∼홍천읍∼북방면∼남면∼서면을 거쳐 마곡리를 지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경계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총 143km에 이른다. 물론 홍천 주민들은 대부분 이 물을 마신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리편과, 17세기 중엽에 저술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지 등엔 홍천강을 남천(南川)으로 표기하였다. 또 1831년경 관내 군현의 읍지를 모아 편찬한 관동지엔 화양강(華陽江)으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1861년 김정호가 판각한 대동여지도와 1864년경 저술한 지리서인 대동지지에는 홍천강(洪川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결국 홍천강은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남천으로 불리다가 후기에 들어 홍천강과 화양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홍천 주민들은 이 강이 홍천읍을 중심으로 화양강과 홍천강이 나뉜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상류의 화촌면 주민들은 아직도 화양강이란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짧은 구간을 따로 화양강이라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군청 관계자는 어떤 자료도 없다고 밝힌다.

 

길손은 홍천 지명 자료를 뒤적이다가 문득, 홍천읍에서 화양강 상류로 2km쯤에 있는 검률리의 ‘화냥바위’와는 어떤 연관성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양쪽으로 괴인 돌 위에 얹혀 있는 화냥바위는 그 밑에서 사모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런데 이 바위 때문에 마을이 풍기문란해져서 없애려 했을 정도니 마을에서 바위가 갖는 상징성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화냥바위가 있는 강’이라 해서 ‘화냥강’이라 부르다 화양강으로 변한 게 아닐까.

 

홍천강, 아니 화양강을 거슬러 오르면 이제 홍천 서부를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좁은 길 때문에 번잡한 화촌면 소재지를 지나면, 곧 ‘강원도 길은 험하니 조심운전하라’는 팻말이 연달아 나오고 이어 고갯길을 오르게 된다. 바로 말고개다.

말고개는 지금은 4차선 확포장공사로 어수선하지만, 6·25전쟁 초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면 6·25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밀물처럼 쳐들어오는 인민군의 탱크를 국군이 맨몸으로 막는 장면이 자주 나온 것 같다. 그런데 그 전투가 실재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한국전쟁사>엔 같은 시기의 춘천전투와 함께 이곳 말고개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은 1950년 전면 남침을 일으키면서 72시간 이내 서울지구를 남과 북으로 포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인민군 제3·4사단은 의정부 방위선을 돌파해 서울에 진입하고, 제2·7사단은 춘천과 홍천을 통과한 후 이천·수원선에 진입해 국군 주력 퇴로를 차단해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초기 승부를 노린 ‘3일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부전선에선 인민군의 의도대로 승승장구했지만 중부전선은 돌파를 못해 발이 묶이면서 인민군의 선제타격계획이 물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6월25일 새벽, 인민군 제7사단은 춘천 총공격과 때를 맞춰 전차를 앞세우고 인제 남면을 거쳐 물밀듯 쳐들어왔다. 홍천을 지키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S자로 굽이도는 말고개에 진을 치고 적을 막고, 후방인 성산에 포진한 제3포대가 철정리로 물밀 듯이 내려오는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두 차례에 걸친 인민군의 말고개 진격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쳐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인민군은 춘천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으나 홍천을 점거치 못하게 되자 말고개 일대를 융단포격하며 말고개 뚫기 돌격작전을 개시했다. 이때 제6사단 제2연대 소속 장병 19명은 말고개 S자 굽잇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인민군의 탱크에 뛰어 올라 선두 전차 2대를 파괴하였고, 인민군이 다시 후퇴할 무렵 춘천에서 전공을 올린 제19연대가 가세해 인민군을 격퇴한 것으로 <한국전쟁사>에 기록되었다. 이렇게 버틴 게 3일이었다.

 

몇 년 전 말고개를 지나다가 국군 탱크 행렬과 마주쳤을 땐 당시의 전투 상황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도로를 4차선으로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거의 일직선으로 뚫는 바람에, 1950년 당시의 긴장감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국군들이 인민군의 탱크를 맨몸으로 저지했던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수많은 차량은 고갯길을 서둘러 지나고 있다. 말고개를 넘으면 홍천 동부에 바싹 다가섰다고 여겨도 된다.

홍천강으로 대표되는 서부 홍천의 자연이, 화장도 할 줄 아는 약간 성숙한 여인이라면 동부 홍천은 아직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는 풋풋한 산골 소녀다. 자연도 그렇고, 자연을 닮아가게 마련인 주민들 품성도 그런 듯하다. 그런 산골이라 동부 홍천이 심심할 것 같다고 여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동부 산골엔 서부 산골 못지 않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널려있다.

인제쪽에서 흘러온 장남천과 서석에서 흘러오는 내촌천이 만나는 철정의 두물머리. 그 두물머리가 가까워지면 도로변 큰 바위에 새겨진 글귀가 눈길을 끈다.

 

 

▲ 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경계에 있는 살둔산장 ⓒ2007 한국의산천   

 

홍천 길라잡이(서부)

홍천은 면적이 전국의 시군 중에서 가장 넓은 고을이다. 또 동서로 길어서 서쪽 끝 서면에서 동쪽 끝 내면까지 국도와 지방도를 달린다 해도 승용차로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런 지형적인 원인 때문에 홍천 고을만을 목적으로 했을 때는 서부와 동부로 나눠서 살피는 것도 좋고, 3∼4일의 시간을 내면 동부와 서부 두루 섭렵할 수 있다.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홍천은 우선 서면·북방면·남면의 서부권, 홍천읍·동면·화촌면의 중부권, 그리고 나머지 두촌면·내촌면·서석면·내면의 동부권 이렇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홍천강 수계에 속하는 서부권과 중부권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서부권과 동부권 두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큰 분류대로 홍천을 서부권과 동부권으로 나눠서 소개한다.

모곡유원지로 대표되는 홍천강, 낮지만 알찬 산행할 수 있는 팔봉산을 비롯해 강재구공원, 홍천온천, 공작산과 수타사 등의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다. 보통 1박2일 일정이면 그런 대로 아쉽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여름철 나들이라면 하루쯤 일정을 더 잡아 강변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낚시를 즐기는 것도 좋다.

 

●당일
44번 국도가 왕복 4차로 잘 뚫려있고, 최근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홍천 나들목으로 접근이 수월해졌으므로 수도권을 비롯해 경북, 충북 등에선 당일로 다녀올 수 있다. 홍천강 주변에선 팔봉산 산행(3시간 소요)을 한 뒤 근처 강변에서 잠깐 즐기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 서면 모곡리의 한서묘역·한서기념관 등도 둘러볼 수 있다. 팔봉산 산행을 포기하면 동면의 수타사를 구경할 수 있다. 낚시를 곁들이기는 조금 어렵다.

 

●1박2일
첫날은 팔봉산 산행을 하고, 홍천강변에서 야영하든지 주변 민박, 펜션 등을 이용해 숙박하면 된다. 가족과 함께 물놀이와 낚시도 할 요량이라면 첫날 물놀이를 즐기고 이튿날 아침 일찍 팔봉산 산행을 다녀오면 된다. 그러나 길이 가파르고, 바위틈새로도 지나야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은 조금 위험하다. 떠나는 길에 홍천온천에 들러 온천욕을 할 수도 있다. 오가는 길에 하오안리의 화로숯불구이를 맛보면 된다. 저녁은 식당에서 매운탕을 맛볼 수도 있지만 직접 물고기를 잡아 끓여먹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2박3일
여유 있는 일정이다. 물놀이, 답사, 산행·온천욕을 각각 하루씩 즐길 수 있다. 이때 잠자리는 홍천강변의 즐비한 유원지 중에서 선택하는 게 좋다. 시내 한가운데나 국도변의 여관은 가족끼리 잠자기엔 마땅치 않다. 유원지 근처에 숙박지를 정해 놓고 오전과 오후 시원한 시간에 인근을 둘러보고 정오 무렵엔 물가 그늘에서 쉬면 된다. 

 

교통

●승용차
수도권에선 44번 국도를 이용하는 게 가장 무난하다. 홍천강 하류의 모곡유원지, 팔봉산관광지 등으로 접근하려면 44번 국도 양평군 단월면 소재지에서 ‘대명비발디파크’ 이정표를 따라 70번 국가지원 지방도를 타고 서면 굴업리∼대곡리∼모곡리를 거치면 된다. 남노일리, 장항리, 제곡리 등은 남면 소재지인 양덕원에서 양덕원천을 따라 난 도로를 타면 된다.
영남지방에선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홍천 나들목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다. 충청·호남지방에선 대전~진주간 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등을 이용해 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춘천 방향)∼홍천 나들목을 거쳐 접근한다. 홍천 읍내를 들르지 않고 모곡리나 팔봉산으로 직접 가려면 홍천 나들목∼44번 국도(양평 방향)∼양덕원∼494번 지방도(모곡 방향)∼서면 굴업리∼대곡리를 거치면 된다.

●시외버스
서울(상봉동)→홍천=1일 20∼30분 간격으로 24회(05:45∼21:10) 운행. 1시간40분 소요, 요금 7,000원.
서울(구의동)→홍천=1일 10∼20분 간격으로 37회(06:00∼21:00) 운행. 1시간50분 소요, 요금 7,500원.
서울(상봉동)→모곡4리=1일 8회(07:20, 09:20, 10:30, 13:10, 14:50, 16:10. 17:50, 19:30) 운행.
대전(동부)→홍천=1일 2회(08:30, 18:00)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13,500원.
인천→홍천=1일 9회(07:30∼19:00) 운행. 2시간10분 소요, 요금 9,600원.
일산→홍천=1일 6회(06:20, 08:20, 09:25, 12:25, 15:25, 18:45) 무정차 운행. 2시간30분 소요, 요금 10,900원.
수원→홍천=1일 10회(08:00∼19:30) 무정차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10,100원.
*홍천 시외버스터미널 033-432-7891∼3

●시내버스
홍천→수타사=1일 3회(09:10, 13:30, 16:00) 운행. 30분 소요, 요금 1,180원.
홍천→양덕원·제곡·용수→남노일=1일 4회(06:00, 08:30, 14:40, 18:05) 운행. 40분 소요, 요금 2,640원.
홍천→양덕원·대곡·모곡→동막=1일 4회(07:00, 07:20, 14:30, 18:45) 운행. 70분 소요, 요금 4,630원.
홍천→동산·원소리·팔봉1리→북노일리=1일 3회(06:00, 12:00, 17:30) 운행. 45분 소요, 요금 3,130원.
홍천→북방·동산·팔봉산→반곡=1일 3회(09:30, 15:30, 18:40) 운행. 60분 소요, 요금 3,440원.
홍천→홍천온천=1일 6회(07:30, 09:30, 11:30, 13:30, 15:30, 17:00) 운행. 20분 소요, 요금 750원.
*현대교통 전화 033-433-0015
*대한교통 전화 033-433-1931

 

숙박(지역번호 033)
홍천군 서면 밤벌유원지 옆의 홍천관광농원(434-1115), 모곡관광농원(434-0450), 남면 남노일리의 고드레미 관광농원(435-1995), 북방면 역전평리의 금학산 관광농원(261-1212, 261-9898) 등은 홍천강과 가깝다. 화촌면 장평리 오미관광농원(433-6992∼3)은 ‘아로마 허브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작산 중턱에 자리잡은 공작산휴양림(434-4987)은 2002년에 개장한 사설 휴양림.
한편, 서면 팔봉리 되룡골 마을 16가구(대표 이돈·434-0358)와 수타사 입구의 동면 덕치리 22가구(대표 박건환·436-6296)는 ‘민박요금 예고제’를 실시한다. 전통 민박은 여름 성수기 1박에 30,000원(평일 25,000원), 펜션형은 성수기 비수기 구별없이 40,000∼50,000원선이다. 여관은 44번 국도변에 드물지 않게 자리잡았고, 홍천 읍내에도 몇 개 있다.

 

*홍천군 홈페이지 www.hongcheon.gangwon.kr
*홍천군 경제관광과 033-430-2350, 2544
*홍천 관광안내 홈페이지
www.dagaja.co.kr
*팔봉산 관리사무소 033-434-0813  

 

 

▲ 홍천강 하류에 자리한 소남이섬 ⓒ2007 한국의산천   

강 왼쪽의 산자락은 해발 570m인 좌방산에서 흘러내리는 자락이다.

소남이섬은 모래와 자갈의 퇴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일반 승용차는 들어가기가 어려운 곳이므로 걸어들어가기를 권한다. 

 

가는 길 

서울 춘천을 잇는 46번 경춘국도를 이용하여  강촌검문소가 있는 강촌 입구에서 우회전, 강촌교를 건너 강촌역으로 향한다. 강촌역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곧장 가면 창촌농공단지 - 가정리 - 소주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내려와 오일뱅크 황골주유소를 지나면 새로 건설중인 고속도로 현장 사거리 바로 못미쳐 왼쪽으로 낡은 세멘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비포장길이 소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승용차는 진입로 끝까지만 가는것이 좋다.(강촌역에서 15km  20~30분). 청평에서 널미재를 넘어서 모곡유원지쪽으로 들어가다가 마곡으로 이동하여도 된다.
 

 

 

출처 : 한국의산천
글쓴이 : 한국의산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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