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형
- 중국 대륙의 구조는 유라시아 대륙판이 동쪽 또는 남쪽으로의 유동 중에 태평양과 접촉하여 생긴 것이다. 또한 중국 남서부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인도양 판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지형학적으로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두 지역 모두 지질구조는 여러 거대한 지향사로 구성되어 있다. 지향사 구조는 산맥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부에서 가장 두드러진 방향은 북동~남서로, 많은 지형들이 이러한 형태와 관련되어 있다.
- 동쪽에서부터 이러한 지형을 살펴보면, 북동부의 長白산맥, 華北평야, 大興安嶺산맥, 太行산맥, 巫山산맥, 黃土고원, 四川분지, 雲貴고원 등이 있다. 동서방향을 가진 지형을 북쪽에서부터 보면, 陰山산맥, 秦嶺산맥, 大別산맥, 南嶺산맥 등이 있다. 이렇게 하여 주요한 지질 구조가 서로 십자형으로 교차하는데 이를 지리학자 스펜서는 '중국 장기판 형태'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지형들은 서쪽으로 더 나가면 더욱 주요한 경관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동서방향으로 된 규모가 큰 지형들이다. 즉 히말라야산맥, 티베트고원, 崑崙산맥, 타림(타리무:塔里木)분지, 柴達木분지, 天山산맥, 중가리아(준가얼:準家爾)분지, 알타이산맥 등이다.
- 이러한 중국의 지질구조는 과거 지질 환경과 지각 구조운동이 다양하게 나타난 결과이며, 이로써 현재 경관이 다양해지고 광물자원 종류도 광범위하게 되었다. 중국은 전체 면적의 2/3가 고원이나 산악으로 되어 있어 토지 이용에 한계가 있다. 더욱이 전체 면적의 1/4 정도가 해발고도 3,000m 이상의 고위에 있다.
- 이를 토대로 4개의 주요 고도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청해~티베트고원을 중심으로 평균 고도가 4,000m에 달하는 지역, ② 서부 티베트고원에서부터 동부 대싱안링산맥·타이항산맥·우산산맥에 이르는 해발고도 1,000∼2,000m의 고원과 산간분지 지역, ③ 동부와 북부의 평원과 북동부의 평원, 그리고 揚子江 유역 평야를 포함하는 해발고도 500m 이하의 구릉과 평야지대, ④ 해저 200m 이내의 渤海灣·황해·동중국해·남중국해 등의 대륙붕 지역 등이다.
- 약 240만 년 전부터 시작된 제4기는 黃土라고 불리는 風成土의 확장, 빙퇴적·충적평야·사막의 발달, 티베트에서의 永久凍土層의 확대 등 중국 지형과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히말라야산맥과 티베트고원의 융기로 약 5만 6,471㎢의 氷河氷이 형성되었다. 알타이산맥, 톈산산맥, 친링산맥, 쿤룬산맥, 唐古拉산맥 등은 6~8월에 70%에 달하는 강수량으로 빙설 표면이 급속도로 녹아서 홍수를 일으킨다. 그러나 빙하의 소모율은 낮다. 반면 티베트 남부, 사천, 雲南 지방의 해양성 몬순 빙하는 매우 높은 소모율을 나타내기 때문에 빙하활동이 활발하다.
- 서부 건조지역은 고도에 따른 기후 및 지형의 변화가 심하여 산 정상부에는 산지 빙하, 그 밑으로 周氷河 지대, 산기슭 부근에는 반사막 지대, 그리고 모래와 자갈로 덮인 사막이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지역에서 融氷水는 중가리아·타클라마칸·內蒙古 사막 주위의 농업과 목축업에 중요한 자원으로 작용한다. 중국 자연환경 가운데 중국의 농업과 문명 발생에 始原的 역할을 했으며, 현재까지 근본적 경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뢰스(Loess:黃土)이다. 뢰스 지대의 면적은 약 63만 1,000㎢로, 중국 면적의 6.6%를 차지한다. 그 범위는 북동부의 吉林省에서 遼寧省·河北省·河南省을 거쳐 알툰·알타이·쿤룬·친링·톈산 산맥의 서부 국경선 지대까지 걸쳐 있다.
- 특히 黃河 중류의 山西省·陝西省·甘肅省·寧夏回族자치구는 뢰스의 층이 두껍고 연속적인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다. 황투고원은 남부와 동부의 습윤 몬순 지대와 북부와 서부의 사막 지대 간의 기후 점이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습도가 낮고, 해발고도 500∼2,000m 고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겨울이 매우 건조하고 춥다. 봄 역시 매우 건조하며 강수량의 70%가 7·8·9월에 집중한다.
-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중심적인 농업지대인 이 지역에 농업과 토양 보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관개가 농업에 필수적이었고 관개는 저위면에서부터, 최근 들어서는 뢰스의 고위면까지 확대되었다. 뢰스의 사막 한계지에서 오아시스에 대한 모래 유입은 특히 녕하회족자치구, 내몽고자치구, 감숙성 서부 등에서 지역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황사는 북부와 동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황사와 모래 유입은 역사시대에 들어 크게 증가하였고 삼림 파괴와 작물 재배의 확대는 사막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기후와 식생
- 중국을 기후와 식생으로 크게 4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중국의 약 1/3은 삼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식생인 습윤기후이다. 습윤기후는 크게 남부와 남동부 최말단의 열대우림과 해안 도서의 몬순 삼림, 그리고 황하 동쪽의 아열대 광엽 활엽수림에서부터 발해만에 이르는 상록(혼합)림까지의 북동부, 그리고 북동부 말단인 하얼빈 동부의 한랭한 기온의 타이가가 이에 해당한다.
- 둘째, 습윤기후 아래에 위치한 삼림과 초원이 결합된 곳으로, 이곳은 중국 전체 면적의 약 14%를 차지한다. 이에 해당하는 곳으로는 黑龍江省 북동부 평야의 삼림 스텝과 山西省·陝西省·감숙성의 황투고원이 있다.
- 셋째, 반건조 지역으로 분류되는 전체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곳으로, 이곳은 초원과 스텝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환경 점이지대이다. 이곳에 해당하는 곳은 陝西省과 녕하회족자치구의 북부인 鄂爾多斯와 내몽고자치구 일부의 스텝 지역이다.
- 넷째,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하는 건조지대이다. 서반부의 광대한 지역은 독특한 건조사막 식생들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오르도스 북단의 스텝 사막과 祁連산맥 북부의 알라샨, 중가리아분지, 타림분지의 온대 사막, 그리고 차이다무분지와 쿤룬산맥 북사면의 한랭한 사막, 쿤룬산맥 서부의 고산사막과 스텝사막, 티베트고원의 건조 고산 초원 등이 있다.
- 중국의 기온 분포는 여름에는 남동쪽에서의 영향과 겨울에는 북동쪽에서의 영향이 강한 몬순 주기와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산악, 그리고 동부에 위치한 대륙적 위치에 따라서 크게 좌우된다. 1월 평균기온은 전체의 약 60%가 0℃ 이하이며 신장위구르자치구
서부와 중가리아분지 같은 곳은 -20℃까지 내려간다. 여름에 남동부는 기온과 습도가 모두 높아서 7월 평균 기온이 武漢·長沙·重慶·南京 같은
곳은 25℃ 이상 올라가며, 이 네 도시는 모두 40℃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 이와 유사하게 서부의 건조한 분지에도 7월 평균기온은 높게 나타나는데 吐魯蕃은 47.6℃까지 올라간 경우도 있다. 이는 海面下 155m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차이다무분지와 같은 한랭한 고위면 사막은 7월 평균기온이 5℃에 불과하다. 여름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영향을 끼친다. 고위 산맥의 降雪은 차고 건조한 겨울보다 여름에 많이 발생하고 주요 하천의 유입량을 늘리게 하여 덥고 습윤한 남동부에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다.
3. 하천
- 중국의 주요한 하천은 티베트고원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이나 동쪽으로 흘러 인도양이나 태평양으로 흐른다. 동쪽으로 흐르면서 중국 전역을
貫流하는 중요한 세 하천은 황하·양자강·西江이다. 이 가운데 양자강은 길이와 유역면적, 그리고 하구에서의 유출량에서 다른 강을 압도한다. 황하는
길이와 유역면적이 두번째이다. 황하는 중국문명의 발상에서 그 역할과 입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황하는 뢰스 토양을 관류하면서 많은 양의
토사를 하류로 운반한다. 화북평야로 내려오면서 하천은 蛇行이 줄어들면서 浮游물질을 운반하는 능력이 떨어져 하천 밑바닥에 대량으로 쌓이게
되었다.- 여름에만 집중하는 강수량과 문명 발생 이후 계속된 황하 주위의 인간 거주는 홍수가 빈발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양자강
유역면적은 2백 만㎢로 가장 넓고, 길이도 5,980km로 가장 길며 上海 근처에 있는 하구에서의 유출량도 32,190㎥/sec로 가장 많다.
양자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중심부를 흐르면서 관개를 위한 물을 제공하며 중심부로 접근하기 위한 수상 운송수단 역할을 하고, 황하에
비해 홍수가 적다. 또한 양자강 주위에 있는 많은 湖沼들은 홍수를 자연적으로 방지한다. 시장강은 황하에 비해 길이는 짧고 유역면적도 작지만
유출량은 더 많다. 내륙으로의 수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자강과 유사하지만 유역 면적이 작아 농경지가 적고 거주하는 사람들도 적다. 그러나 그
지류가 흐르는 유역은 접근성이 양호하고 수량이 풍부해 약 1억 명이 이 부근에서 다양한 경작 활동을 하고 있다.
4. 토양
- 중국기후의 대경계선인 친링산맥∼淮河 선은 토양의 분포에서도 경계선이 된다. 화북지방에는 석회토양이 발달하고 華南에는 알루미나, 철분 토양이 발달되었다. 화북의 석회토양은 염분상으로는 풍부하나, 유기물이 적고, 수분이 부족하여 생산성이 낮다. 화남의 산성 토양은 염분이 적고 비료분이 되는 것도 적어 항상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작물의 생육이 충분치 못하며 따뜻한 기온과 넉넉한 수분으로 벼를 성장시킨다. 東北 지방에서는 북부·동부에서 알루미나·철분 토양이 분포하고, 중부와 서부에는 석회토양이 많다. 북서 지방에는 회색사막토가 널리 분포하고 티베트는 산지와 초원지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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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인구는 약 12억 8,453만명(2002)으로 세계 전체 인구의 약 22%를 차지한다. 중국은 인구의 과대한
팽창을 막기 위해 1가구 1자녀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1970년대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1980년대
들어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한계가 나타났다. 이는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남아선호 관념과 더불어 개혁 이후 생산단위가 집단체제에서 가족 단위로
바뀜으로써 가구원이 바로 노동력으로 간주된 것에 기인한다. - 인구의 분포는 불균등하여 흑룡강성의 국경 지대, 내몽고자치구, 녕하회족자치구, 감숙성, 청해성, 신강위구르자치구, 서장자치구, 운남성은 전체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지만 인구는 12.5%에 불과하다. 반면에 중국 북부의 평야와 양자강 하류 주위의 충적저지로 구성되는 전체 면적의 10%에 약 40%의 인구가 분포한다. 불균등한 인구분포는 각 성 내부에서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사천성의 경우 전체 약 1억 정도의 인구 중 서부 50% 지역에 5% 이하의 인구가 거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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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1950년대부터 인구이동은 엄격히 통제하여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왔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통제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다. 농촌의 과잉인구는 농촌 내에서 비농업적 직업을 찾기도 하지만, 도시로 이주하여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해 개혁 이후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무작정 도시로 유입된 인구들로 인해 다량의 실업자가 발생하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맹류(盲流)' 현상으로도 나타났다. 중국인들의 해외 이주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한국, 일본, 미국,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으며 이들 한족(漢族)의 해외 이주자를 화교(華僑)라고 부르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이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여 그 나라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중국의 민족구성은 약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전 인구의 92%가 漢族이다. 한족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한족 외의 민족을 同化시켜 왔으나 소수민족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오고 있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나 자치주를 설정하여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또 한편으로는 이들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양자의 성격을 가진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서는 莊族, 滿族, 回族, 苗族, 위구르족, 彛族, 土家族, 蒙古族 등이 있고, 韓民族인 朝鮮族?약 192만 명으로 14번째로 많고
주로 東北 3省인 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 등에 분포한다. - 중국의 민족성은 자신들을 문화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문화가 유일한 것으로 여겼다. 바로 中華思想의 요체가 이에 근거하며 이를 토대로 주위의 민족을 오랑캐(夷狄)로 생각하였다. 이로써 체면을 존중하고 강한 자존 의식을 갖춘 민족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중국인들은 현실 또는 실속에 매우 빠른 민족이라고도 한다. 즉 중국인들에게 모든 사물의 판단 準據는 현실적 유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개방·개혁의 과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익이 된다면 그들의 정체성인 사회주의 이념도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또 하나의 특징으로 대륙적인 스케일을 가진 대범한 성격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이 흔히 말하는 '만만디(慢慢的)'라는 말은 이러한 성격을 극명히 보여준다. 황하를 비롯한 장대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많은 왕조의 浮沈을 겪어야 했기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덕목이 많다. 특히 신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며, 그 신용은 사람들 사이의 대면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꽌시(關係)'는 대인 관계를 일컫는 말로 이 '꽌시'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풀릴 수 있고, 역으로 하찮은 일이라도 '꽌시'가 없으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민족성은 개혁·개방으로 많이 희석되고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중국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
구 분 |
1953년 |
1964년 |
1982년 |
1990년 |
2000년 |
총인구 (만명) |
59,435 |
69,458 |
100,818 |
113,368 |
126,583 |
남성인구 (만명) |
30,799 |
35,652 |
51,944 |
58,495 |
65,355 |
여성인구 (만명) |
28,636 |
33,806 |
48,874 |
54,873 |
61,228 |
성비율 |
107.56 |
105.46 |
106.30 |
106.60 |
106.74 |
0~14세인구 (%) |
36.28 |
40.69 |
33.59 |
27.69 |
22.89 |
15~64세인구 (%) |
59.31 |
55.75 |
61.50 |
66.74 |
70.15 |
65세이상인구 (%) |
4.41 |
3.56 |
4.91 |
5.57 |
6.96 |
호구규모 (人/戶) |
4.33 |
4.43 |
4.41 |
3.96 |
3.44 |
문맹인구 (만명) |
- |
23,327 |
22,996 |
18,003 |
8,507 |
문맹률 (%) |
- |
33.58 |
22.81 |
15.88 |
6.72 |
도시인구 |
7,726 |
12,710 |
21,082 |
29,971 |
45,844 |
농촌인구 |
50,534 |
56,748 |
79,736 |
83,397 |
80,739 |
1. 언어문자
- 漢字로 표시되는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중국어는 일반적으로 漢語라고 부르기도 하고, 1956년 이후
중국의 표준어를 普通話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어 표준어는 수백 년 동안 사용한 北方官話를 기초로 하고, 北京 어음을 표준어로 하며 현대 白話文을
어법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어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큰데 대체로 北京語, 蘇州語, 廣東語, 福建語, 客家語로 크게 나뉜다. 이 가운데 인구의
약 70%가 북경어를 사용한다. 중국어의 어음특성은 聲母, 韻母, 聲調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성조의 경우 음의 높낮이에 따라 4가지
성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문자는 漢字이며, 그 수는 6만여 자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상용한자를 3,500자 정도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한 1964년에는 한자를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簡體子를 개발, 보급하여 사용하고 있다.
2. 종교
- 중국의 종교는 전통적인 것으로 불교·도교·이슬람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16세기 이후 들어와 전파되었다. 중국 헌법 제36조에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화혁명 과정에서 사원, 교회 등이 紅衛兵에 의해 공격받아,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이후 종교도 과거에 비해 활발한 추세를 보이고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인들도 중국으로 다수 몰려들고 있다. 각종 종교 신도 수는 약 2,000만 명으로, 이 가운데 카톨릭은 350만 명,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는 450만 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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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
- 1927년 중국의 북경시 외곽 周口店에서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중기 제2간빙기 지층에서 직립 유원인 다음의 古人骨이 발견되어 북경인(北京人:Sinanthropus Pekinesis)이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그 후 마지막 제4빙하기에 현대 아시아인종의 조상인 上洞人이 저우커우톈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 最古의 채색토기 문화가 나오는데, 이는 흑·백·홍으로 문양을 그린 토기로 화북 일대에서 남쪽으로는 푸젠·타이완에 분포하는데 1921년 허난성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총칭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黑色土器 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산동성 龍山鎭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이름을 따라 룽산문화라고 한다.
2. 고대
-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상고의 三皇五帝의 평화 시대를 거쳐 夏, 殷, 周의 三代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은허에서 발견된 龜甲獸骨에 새겨진
한자의 最古形인 卜辭에 의하여 은대의 사회를 알 수 있다. 은나라는 渭水에서 일어난 周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는데 주나라는 왕권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제자백가와 같은 문화가 발달하였다. 주나라는 BC 770년 수도를 낙읍(洛邑:지금의 洛陽縣)으로 옮겼다. 주나라의 동천 후
춘추(春秋:BC 770∼BC 403)시대를 거쳐 전국(戰國:BC 403∼BC 221)을 거쳤고 BC 221년, 秦나라의 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 진나라는 중앙집권적인 郡縣制度를 단행하고 행정·군사·감찰의 3권분립 체제를 세웠다. 또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국위를 사방에 떨쳐 진(Chin)의 이름이 서쪽에 전해져 'china'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BC 207년 진은 멸망하고, 서민 출신인 劉邦이 長安을 수도로 漢王朝를 창업하였다(BC 202). 한대에는 서방과의 교통이 활발하여 그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중국 문화의 내용이 충실해졌다. 지방 호족 세력이 발전하게 되어 한때 왕망이 新을 건국하였지만 15년 만에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25∼220) 시대가 된다. 그러나 전한부터의 타성이 그대로 남아 184년 黃巾의 난을 계기로 몰락의 기로에 들었다.
3. 중세
- 황건의 난으로 군웅할거된 중국의 국토는 曹操의 아들 曹丕가 낙양에 세운 魏와 劉備가 成都에 세운 蜀漢, 그리고 양자강 중·하류에 孫權이 세운 吳 등의 3나라로 삼국정립 시대가 되었다. 280년 위의 신하이던 司馬氏가 3국을 통일하여 西晉이 되었고, 4세기 초 흉노의 침입으로 南京으로 옮겨 東晉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宋·齊·梁·陳의 四朝와 吳·晉을 더한 六朝가 교대되었는데 이 시대의 문화는 귀족과 호족들의 풍족한 생활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우미한 것이었다.
- 한편 화북지방은 5호16국이 서로 싸우다가 선비족이 439년 北魏로 통일하여 宋나라와 대항하여 남북조 형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세는 581년 남조의 隋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수나라 文帝는 군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도를 시작하였으며, 煬帝는 대운하를 만들었지만 고구려와 싸워 대패함으로써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였다. 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唐나라의 제위에 올라, 이후 당나라는 넓은 대제국으로 영토를 확대하였다. 귀족의 취미와 외형의 미를 강조하는 당대의 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문화는 인접 국가에 파급되어 東亞文化圈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黃巢의 난이 일어나 907년 朱全忠의 後梁에 멸망되었다. 이후 5대 10여 개국이 흥망하였다.
4. 근대
- 당나라 말에서 5대에 걸친 비약적 산업발전 상황에서 宋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송나라의 국책 기조는 財政에 두었으며 국내 경제를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완성하였다. 唐末 5대에 걸치는 혼란 속에 귀족계급은 몰락하고 均田制 아래에서 발전해온 形勢戶라는 신흥 지주층 세력이 신장하였다. 송나라가 절도사를 폐지하자 그들이 莊園의 영주가 되고 경작은 佃戶라는 농노가 주로 하였다.
- 송대의 문화적 특색은 국수적·내성적·서민적인 점에 있고, 그 기반은 지주·관료들이었다. 한편 화북지방으로는 넓은 지역에 요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다(916∼1125). 또 서부에서는 티베트계의 西夏나라가 일어나 송나라는 두 나라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12세기에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수도 開封을 함락시켜, 송나라는 강남으로 도망하여 杭州에 임시 수도로 정하였으므로 이를 남송이라 칭한다(1127).
- 13세기 초에는 몽골 민족에 의해 元나라가 대제국을 건설하여 남송을 멸망시키고 일본에 원정하는 등 여러 지역을 경략하였다. 그러나
원왕조(1216∼1368)는 인구와 문화수준의 열세 때문에 明 太祖에 쫓겨 북방으로 추방되었다. 명나라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국내재정의 곤란과 환관의 발호, 기강의 퇴폐 등 문제가 산적한 명왕조가 내란으로 자멸하자, 만주 여진족의 淸이
북경에 들어와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5. 현대
- 산업혁명을 치른 서구의 문화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서구 세력들의 물밀듯한 侵占으로, 홍콩을 영국에게, 만주 북방을 러시아에게 할양하고, 安南 등 조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으며, 국내 요소에 외국 租界가 많이 설치되어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同治中興을 통해 근대 공업이 일기 시작했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 청·일전쟁 직후에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점진개혁론이 활발했으나 戊戌政變에 의하여 실패하고 義和團의 北淸事變은 청왕조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 孫文이 신해혁명에 의하여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1912) 2,000년 이래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의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약 20년 간 군벌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 손문의 사후에 후계자가 된 장제스(蔣介石)는 북벌의 성공으로 양자강 유역에 진출하였다. 南京事件이 일어나 소련과 단교한 장제스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몰아내어 국민정부를 정통 정부로 만들었다(1928). 장제스는 소련과 단교했을 때 중국 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이때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일본의 침공이 격화되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화해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 동안에 공산당의 세력이 증대해갔다. 공동의 적인 일본이 패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가 국공 내전이 계속되다가 국민정부가 패하여 타이완으로 물러가고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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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毛澤東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 省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등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41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1999년 현재 국가 주석은 장쩌민(江澤民)이고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주룽지(朱鎔基)이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紅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專이라고도 한다. 시기상으로는 전자를 변혁기, 후자를 공고기라고 한다.
- 건국 후 초창기인 1949~1953년은 변혁기에 해당하고 중국혁명은 두 개의 세력에 의해 성공했다. 하나는 해방구로
공산통치 지역인 紅區에서의 모택동 세력과 국민당 치하의 白區에서 지하운동을 펼쳐온 류샤오치(劉少奇) 세력이었다. 1949년 새 정권이 수립되자
홍구와 백구의 지도자들은 혁명완수와 국가건설을 위해 대동단결했으며 모택동의 인민민주주의 독재론에 근거하여 노동자·농민·소자본가에서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계급의존적인 지주·자본가·반동세력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庸? 적대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토지개혁과 농업합작사 건설을
단행하고 자본주의 기업을 국유화했다.
- 1953~55년은 중국에서 국가기구가 정비되고 제도화되면서 류샤오치가 정책을 주도하는 공고기였다.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되었으며 헌법이 채택되고 법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제1차 경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연평균 7%의 공업성장률을 보였으며 능률이 중시되고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이 강화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하의 국무원의 역할이 팽창했다. 이 결과 공업은 발전되었으나 농업은 낙후했고 따라서 도시와 농촌 간에,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간에 소득 격차가 벌어졌다.
- 또한, 중앙집권적 관료조직이 질서 있고 능률적인 경영은 이루었다 해도 모택동이 항상 강조해온 군중노선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모택동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 계속에 반대하고 중국의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관료주의화된 당을 비판하고 당은 인민에 의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1955~59년의 시기는 새로운 변혁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중국 농촌의 99% 이상이 집단적인 인민공사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농업집단화는 실패했다. 농업생산력은 하락했으며 이에 더해 급속한 자연재해로 중국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모택동의 정책 실패는 새로운 공고기를 도래하게 했다. 이 공고기는 1959년부터 문화혁명 이전인 1966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 1959년 중공 당정치국 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모택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와 연합하여 인민공사를 축소하고 자작경영을 늘였으며 급진적인 정책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모택동은 류샤오치와의 정책논쟁을 통해서 류샤오치의 노선이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군부의 린뱌오(林彪)와 연대하여 반격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모택동의 아내 장칭(江靑) 등 4인방도 합세했다. 이 새로운 변혁기가 1969년까지 지속된 문화혁명이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 모택동의 노선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숙청되었으며 당과 국가기구 등 모택동과 군중 사이에 놓인 공식기구들은 모두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모택동은 청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류샤오치는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렸으며 이
과정에서 화병으로 사망했다. 문화혁명이 휩쓸고 간 후 중국은 1976년까지 새로운 공고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공고기는 정책의 전환보다는 문화혁명의 폐해를 수습하는 데 주력한 시기였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덩샤오핑에게로 넘어갔다. 장칭 등 4인방은 문화혁명기간 중의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안정적인 공고기에 들어서고 있다.
- 새로운 집권세력은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에서의 '4개 현대화' 추진을 정책목표로 세우고 미·일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중국은 계획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가미하여 점차 상품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 결성되게 하고 있으며 기업의 독립채산제 확대, 농촌에서의 잉여생산물의 판매허용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中國特色的 사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고 있다.
- 개혁의 개방과 속도, 그리고 범위를 놓고 공산당 지도부와 학생·지식인 간의 의견차이는 1989년 6월의 天安門사태로 귀결되었다.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학생, 지식인의 반대운동은 결국 보수파에 의해 무력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건국일 | 1949년 10월 1일 |
수도 | 북경 |
정체 | 사회주의 |
주석 | 江澤民 |
총리 | 朱鎔基 |
주요정당 | 공산당 |
국가권력기관 | 全國人民代表大會, 地方各級人民代表大會, 國家主席 |
국가행정기관 | 國務院, 地方各級人民政府 |
국가군사영도기관 | 중앙군사위원회 |
국가사법기관 | 最高人民法院 , 地方各級人民法院, 專門人民法院 |
국가검찰기구 | 最高人民檢察院 , 地方各級人民檢察院, 專門人民檢察院 |
1. 외교
- 헌법상 중국 외교의 기본원칙은 첫째, 평화5원칙(주권과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에 입각하여 각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둘째,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반패권주의이며, 셋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둘째의 반패권주의는 초강대국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것이며, 셋째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끼리의 평등한 관계와 연대를 도모하고 제3세계의 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 대외정책 기조
. 脫냉전이후의 新국제질서를 다극화 체제(강대국간 세력균형)로 인식하고 초강대국 일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견제
. 汎세계적 문제해결에 大國으로서 책임있는 행동과 여타 강대국들과 세계경영에 동참하면서 국가 위상제고 및 국익 극대화 추구
.
平和共存 5原則 및 독립·자주·평화 외교정책을 기초로 실사구시 외교전개
. "1국 2체제"방식에 의한 對대만 통일외교 분위기 조성
.
제3세계와의 단결 및 협력지속 추구
. 호혜평등 원칙하에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과 우호협력관계 지속추진
. 남,북문제에서
남과 북에 대한 지원을 촉구
- 건국 후 중국은 외교의 최대목표를 혁명의 보전과 정권 안정에 두었기 때문에 중공정권 수립 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6·25전쟁에 중국은 인민지원군을 보내 북한을 도왔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는 1960년대까지 적대관계를 지속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반까지 중국 외교의 특징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면서 반미, 반서방 친소외교를 수행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 외교는 소련과 적대관계에 들어섰으며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제3세계와의 유대강화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 1968년 중소국경분쟁 이후 중국은 주된 적을 미국 대신 소련으로 상정하였다. 중국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중국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리하여 1970년대에 소련에 대항하여 나타난 중국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이 반패권주의이다. 반패권주의의 달성을 위해 중국은 미국·일본과의 협력을 도모하기로 했다. 중국의 이러한 외교전략상의 변화를 以夷制夷라는 현대판 세력 균형정책으로 나타났다.
- 1972년 중국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上海에 초청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주의를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 1979년에는 미국과의 국교수립과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972년 '저우언라이-다나카(田中) 공동성명'에서 반패권주의를 확인하였고, 1978년에는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일본 등 서방과의 관계개선은 중국으로 하여금 국제연합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 1981년 중국은 대만의 국민당정부를 대신하여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했다. 1970년대 말 중국 외교의 커다란 승리에도 불구하고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기까지 중국 외교는 자력갱생·민족해방·반서방 및 반미를 강조했고 외교정책결정은 국가이익보다는 이념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모택동 사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시대의 외교정책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이고 국익을 중시하며 4개 현대화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서방의 경제협력을 얻어내는 데 집중되었다.
- 덩샤오핑시대는 개방과 상호의존성의 중요성, 국제협력과 서방과의 교류를 강조했다. 1982년 개최된 제12차 중공당 전당대회는 덩샤오핑시대의 중국 외교정책을 자주독립외교정책으로 규정하고 개혁·개방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방과의 협력을 천명했다. 한편, 19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에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하여 1989년에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 1988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우쉐첸(吳學謙)은 중국 외교정책의 5가지 基調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으며 이 5가지 기조는 지금까지 개혁·개방시대 중국 외교의 지침이 되고 있다. ① 패권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유지한다. ② 정책쟁점은 사례별로 실용주의적으로 결정한다. ③ 미국 및 소련(러시아연방)과는 동맹이나 전략적 관계는 피한다. ④ 제3세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한다. ⑤ 경제·무역·과학기술에 관한 한 누구와도 협력한다. 덩샤오핑시대의 중국 외교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그러나 천안문사태에서의 무력진압으로 중국은 몇 년 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서방과 세계은행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중지되었으며 미국으로부터 인권을 개선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이러한 냉각관계는 1992년 일본의 차관공여 재개와 중국 당국의 일부 반체제 인사 석방으로 해소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관계도 복원되었다. 중국 통일문제에서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1997년 홍콩을 반환받았으며, 홍콩은 이후 50년간 기존의 경제 사회체제의 유지를 보장받았다. 중국은 이러한 홍콩반환의 경험을 타이완 문제에도 적용하여 하나의 중국이라는 전제하에 타이완이 중국과의 통일에 응하면 독자적인 군대보유와 경제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자치를 보장받는다는 一國兩制론을 통일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2. 군사
- 중국의 군대편성 특징은 군대와 중국공산당 간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의해
통솔된다. 이 군대에는 말단 부대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이 있고 연대 이상에는 정치위원이 있어 정치사상교육을 담당한다. 정규군 외에 방대한 민병이
있는데, 이는 모택동의 인민전쟁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전문가의 집단인 정규군과 인민대중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인민전쟁론의
핵심이다.
- 인민해방군은 전투부대일 뿐만 아니라 공작대, 생산대이기도 하다. 모택동은 인민해방군의 정치적 역할을 중시하였으며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당과 행정기구를 대신하여 통치조직으로서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중국군에는 원래 계급제도가 없고 사단장, 중대장 등 장교에 해당하는 지휘원과 일반 병사인 전투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紅軍·八路軍을 통하여 인민해방군의 전통을 계승한 이른바 將兵一致의 원칙에 기초를 둔 것이다.
-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군사전략을 둘러싸고 지도부 내에 심각한 이견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모택동 생존시에는 모택동의 인민전쟁론이 군부를 지배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는 참전경험에서 인해전술과 사상적 무장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보고 군비현대화와 현대적인 군의 육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숙청되었고 문화혁명기까지 린뱌오가 모택동의 인민전쟁론을 답습하여 군부를 장악했다.
- 이후 린뱌오는 군부세력을 이용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사망했다. 재래식 장비의 현대화는 뒷걸음쳤으나, 중국은 1956년부터 미사일과 원자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왔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당량의 핵무기를 보유하였다. 중국의 본격적인 군현대화사업은 1975년 덩샤오핑이 군참모장에 취임하고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한 후 4개 현대화계획 중 국방의 현대화가 강조되면서 본격화되었다.
- 덩샤오핑은 '중국의 꾸준한 경제성장에 기초하여 군의 무기 및 장비를 향상시켜 신속한 국방현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신식무기와 장비의 개발 및 도입을 지시했다. 그 결과, 중국은 최신식 무기를 개발하였고 1985년에는 15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제3세계에 수출했다. 이와 함께 중국은 방만한 군사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고령화된 다수의 군간부들을 퇴역시키고 병력수를 줄여 정예화하였다. 이러한 군정예화에 따라 1998년 현재 중국군의 병력은 287만 명이다. 중국군은 중국혁명의 동력이었으며, 인민에 대한 봉사와 국가보위의 임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중국 인민의 친근한 벗으로 인식되어 왔다.
-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에서 학생과 지식인을 학살함으로써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해방군의 이미지는 크게 퇴색하였다. 이후 중국군은 인민의 군대라기보다는 중국공산당의 무장력으로서의 역할이 주된 것으로 되고 있다. 1997년 현재 총병력 287만명으로 육군 205만명, 해군 26만명, 공군 47만명, 제2포병 9만명이다. 징병제이며 병역기간은 육군 3년, 공군 및 해군은 4년이다. 1998년 국방비는 909억元(109억달러)로 1994년 20.3%, 1995년 14.56%, 1997년 12.7%의 국방비 증가율을 기록했다.
- 군부의 실제예산은 자체 기업에서 나오는 수입금이 포함되기 때문에 실제 국방비는 국무원의 공식예산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력을 보면 육군 108개전투사단, 12개 해안국경경비사단, 15개 전투지원사단, 전차 9,600대, 헬기 1490대, 대공포 및 방공미사일을 갖추었다. 해군은 SLBM발사 잠수함 2척, 공격용 잠수함 61척, 구축,프리깃함 54척, 초계함 830척, 상륙정 55척, 해안 및 방공용 비행기 600를 갖추었고, 공군은 중단거리 폭격기 420대, 전투기 4,400대, 대공포 및 방공미사일 등을 갖추었다. 1996년 3번째 핵실험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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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개황
1) 주요 경제지표
|
2001년 |
2002년 |
GDP |
94,346.4억元 |
102,398억元 |
실질경제성장률(%) |
7.3% |
8.0% |
1인당 GDP |
7,543元 |
- |
실업률(%) |
3.6% |
4% |
물가상승률(전년동기대비) |
0.7% |
-0.8% |
화폐단위 |
人民幣(元, RMB) | |
환율 1US$ |
8.2766元(2001 연말) |
8.2773元(2002 연말) |
외환보유고 |
US$ 2,122억 |
US$ 2,864억 |
산업구조 |
1차(17.3%) 2차(49.7%) 3차(32.9%) |
- |
수출 |
US$ 2,662억(6.8%증가) |
US$ 3,256억(22.3%증가) |
수입 |
US$ 2,436억(8.2%증가) |
US$ 2,952억(21.2%증가) |
수출품 |
컴퓨터부품, 사무용기기, 의류, 신발, 완구 | |
수입품 |
반도체, 원유, 유기화학, 인쇄기기, 컴퓨터부품, 폴리에스터직물 |
2) 경제현황
가. 경제개황
-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은 천안문사태(89.6)와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 시장경제화 진전에 따른 빈부격차 확대와
부정부패 만연 등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79~1998년(20년)간 연평균 9.7%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 1979년 대외경제개방 시행 이전의 중국 경제발전 전략은 자본축적을 가속화하면서 경제성장률을 고도화하는 것이었다. 생산부문에서는 농촌인민공사, 공업부문에서는 국영기업이 위주였으며, 배분에서는 일괄구매·일괄판매(統購統鎖) 방식이 주로 행해졌고, 소비는 각종 배급증표를 이용하였다.
- 1979년 이후 착수한 경제개혁은 이러한 지난 시기 개발전략의 성과를 토대로 결함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농촌에서는
농업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여 인민공사가 해체되었고 도시의 기업도 공유제에서 다원화된 소유제 구조로 전환하여 개체소유제, 개인소유경영, 각종
경제연합체 등 다양한 소유형태로 발전하였다. 경영과 소유의 분리가 인정되었으며, 경제활동에 관여하는 의사결정권을 다원화시켰다. 또한 指令性계획
위주의 경제계획을 指導性계획으로 전환하고, 국가는 중장기 계획만 담당하여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였다. 분배의 측면에서도 국가
이익을 강조하던 것에서 집단(기업)과 개인(노동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제도로 전환되고 자유시장이 부활되었다.
- 1980년 4월에는 經濟特區가 지정되어 대외개방의 창구로 삼았다. 1984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정식 가맹하여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진행하였다. 앞으로의 중국 산업정책은 1994년 3월 國務院 제16차 상무회의에서 결정한 '1990년대 國家産業政策綱要'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정책에 의하면 1990년대의 주요과제로 ① 농촌경제의 전면적 발전, ② 기초시설 및 기초공업의 체증 문제 해결, ③ 기간산업의 가속적 발전, ④ 중국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⑤ 新高度技術産業의 가속화로 신흥산업과 신상품 개발, ⑥ 3차 산업의 계속적 발전 등을 제시하였다.
- 장기계획(10년 또는 10년 이상)
. 체제와 집행과정에서 직면하게될 불확실한 요소가 많아 개괄적
.
주요지수/발전속도/주요 과학연구항목과 건설항목을 반영
. 추진현황 | 전국농업발전강요(1956-1967) |
과학기술발전계획(1956-1967) | |
전국과학기술발전규획요강(1978-1985) | |
국민경제발전 10년계획요강(1976-1985) | |
국민경제, 사회발전 10개년계획(1991-2000년) | |
2010년 장기발전전략(1996-2010) |
- 중기계획(5개년계획)
. 경제성장률등 주요경제지수, 재정, 금융, 외환, 물자, 시장, 노동력 등 각부문의 균형
.
고정자산투자의 규모, 방향, 효율제고
. 주요상품의 생산능력 증가
. 중대형 건설프로젝트, 과학기술개발 프로젝트
. 출생율,
민생물자, 문화생활수준, 자원이용, 환경보호
. 경제 및 과학기술정책관련 주요정책과 기타부문 주요시책
. 추진현황 | 정부수립 이후 모두 9차례의 '5개년 계획' 실시 |
- 1· 5계획(제1차 5개년계획 1953-1957) | |
- 2· 5계획(제2차 5개년계획 1957-1962) | |
- 3· 5계획(제3차 5개년계획 1963-1970) | |
- 4· 5계획(제4차 5개년계획 1971-1975) | |
- 5· 5계획(제5차 5개년계획 1976-1980) | |
- 6· 5계획(제6차 5개년계획 1981-1985) | |
- 7· 5계획(제7차 5개년계획 1986-1990) | |
- 8· 5계획(제8차 5개년계획 1991-1995) | |
- 9· 5계획(제9차 5개년계획 1996-2000) | |
- 10· 5계획(제10차 5개년계획 2001-2005) |
- 10. 5 계획 기간 경제정책 운용방향
. 지속적인 고도경제성장 지향
. 경제구조조정의 지속추진
. 서부대개발
전략추진
. 과학기술의 진보 및 교육에 역점
. 전방위적인 대외개방형 경제추구
. 국민생활수준의 제고
- 중국정부는 1992년 초 國家計劃委가 '10대 경제구'를 발표하여 경제권역별 특성에 맞게 지역경제 발전전략과 산업정책을 통일적으로 수립·운용하고 산업분포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省·市·自治區를 ① 동북, ② 화북환발해(華北環渤海), ③ 양자강 삼각주, ④ 화난, ⑤ 황하 중류, ⑥ 양자강 중류, ⑦ 황하 상류, ⑧ 양자강 상류, ⑨ 新疆경제개발구, ⑩ 티베트 특별구 등으로 묶어 지역의 경제지리적 특성과 비교 우위에 맞는 산업을 육성하고 국내외 투자를 유치하고자 한다.
-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은 1999년 1월 전년말 현재 외환보유고가 1,449억 5,900만 달러로 발표하였다.
중국인민은행은 또 1998년 현재 런민삐환율이 1달러당 8.2789元으로 1년전에 비해 0.0009元이 평가절상됐다고 발표했다. 외환보유고
확대로 2000년으로 돼 있는 당초계획을 앞당겨 1996년 무역, 노무, 관광 등과 관련된 경상계정에 한해 부분적인 태환을 허용했으나 차관과
직접투자, 증권거래 등 자본계정의 원화태환은 허용하지 않는다.
- 중국은 개혁 이전에는 물가가 장기간 안정되어 있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1987년까지는 대체로 3∼5%의
안정수준을 유지했으나 이후 자오쯔양(趙紫陽)의 등장으로 경제개혁이 급속히 진전되자 1989년 천안문사건 이전까지 연 17∼18%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였다.
이에 긴축노선으로 전환하여 1990년 소매물가 상승률이 2.1%로 안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실업이 증가하여 고용의 확대가
시급해지자 긴축정책을 종료하게 되었다. 이후의 높은 경제성장은 다시 물가의 상승을 가져와 1992년 5.4%, 1993년 13.2%, 그리고
1994년도 상반기에 19.8%까지 확대되었다.
- 중국의 고민은 앞으로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를 어떻게 적절히 조화하느냐에 있다. 중국의 노동력은 각종 기관·단체·기업에
종사하면서 고정급을 받는 취업노동자, 도시의 개별노동자, 농촌의 집단노동자와 개별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1993년 노동자 수는 6억
600만 명이고 각 구성비는 24.8%:1.8%:73.3%이다. 중국은 固定工制度를 기본으로 하는 고용제도를 시행해 왔다. 이는 정부가 노동력
배치, 직업, 임금을 결정하는 제도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영역의 확대와 자율화로 노사간의 계약형식이 도입되게 되어 과거
'쇠솥밥(鐵飯碗)'이라는 평생직장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
- 새로운 고용제의 기본방침은 공개채용, 자발적 지원, 우수인재 채용, 수습노동자의 견습기간 제도화, 수습성적에 따른 채용, 자유로운 퇴직 허용 등을 근간으로 한다. 1952년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분배원칙에 입각한 계획임금제도로 중국의 임금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경제개혁 이후 상여금 및 성과급을 지급하고, 식품가격보조와 승진에 따른 임금가산제 등으로 임금구조가 개선되었다. 임금은 個體經濟나 私營經濟에서 빠르게 상승되었다. 업종별로는 지질탐사업이 1993년의 경우 4,270위안으로 가장 높았다. 한편 평균 임금은 3,236위안이었다. 지역별로는 상해·광동·북경·천진 등 대외개방이 활발한 연해 지역이 높게 나타났다.
나. 산업구조
- 중국은 개혁 이전에는 國營商業이 主이고 집단소유제의 合作社 상업이 從이던 것이 현재는 국영상업 외에도 다양한 경영방식과 유통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중간 유통단계가 단축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가격체제를 현실화하고, 계획에 의한 가격통제를 줄여나가며 불합리한 가격체제 역시 시정하였다. 또한 농산물 가격을 자유화하여 시장경제를 위한 길을 한층 앞당기고 있다. 1993년의 사회상품소매총액을 유통기구의 경제유형별로 보면 국영인 全民所有制가 39.7%, 集體所有制가 26.3%, 個體 및 私營이 22.6%, 聯營이 0.9%, 기타 10.6%를 차지했다.
- 중국의 산업을 1·2·3차 산업으로 분류할 때 1993년 현재 GDP 구성은 21.2%:51.8 %:27.0%이며, 취업인구 구성은 57.4%:22.4 %:20.2%이다. 이는 1978년 당시의 28.4 %:48.6%:23.0%와 70.5%:17.4%:12.1%와 비교해 볼 때, 1차 산업이 줄어들고 2·3차 산업이 증가한 것이다. 지역별 산업정책은 동부지역의 경우 외국의 선진기술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전통공업을 개조하며 신흥공업을 육성하여 수출형 산업지역으로 발전시키고, 서부지역은 풍부한 자연을 이용하여 에너지공업과 원자재공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양자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① 농업
- 중국은 경제개혁에서 농업부문을 강조하였다. 1981년 생산책임제를 도입하여 개별농가의 自留地를 제외한 生産隊 소유의 토지를 請負生産制하에 분배하였다. 이에 따라 2∼3년 사이에 90% 이상의 生産大隊가 농가 생산책임제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농업자유화로 1982년 인민공사가 해체되어 과거 5만 6,000개인 인민공사는 4만 3,700개의 鄕정부와 1만 1,900개의 鎭정부로 변신하였다. 그 결과 농업생산성이 증대되어 1984년까지 연 7.8%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8년까지 농업에 대한 투자 감소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발전이 둔화되다가 1989년에 다시 1984년 수준을 회복하였고, 1993년에는 약 4억 6천 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였다.
- 농업총생산액도 1조 994억元으로서 1949년 및 1978년에 비해 33배, 7배 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생산의 부문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농작물 재배업을 제외한 임업·목축업·어업 등의 농업총생산액이 1949년 17.5%, 1978년 32.2%, 1992년에는 44.5%로 상승하여 단순 농업에서 각 부문이 모두 발전한 생산체계를 이루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농업 각 부문의 생산기지를 건립하였는데, 현재는 상품식량 기지縣 243개, 목화 기지현 72개, 기타 우량농산품 기지현 113개가 확정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벼, 밀, 기장, 고량 등이고 이 중 벼는 가장 중요한 작물로서 친링산맥과 화이허강의 연결선 남부의 고온습윤한 기후인 화중·화난지방에서 주로 재배한다.
- 벼 생산량은 1992년 1억 8,622만 톤으로 세계 1위였고 그 중요한 분포 지역은 양자강 중·하류, 화난, 윈구이 고원 등이다. 밀 역시 1억 159만 톤으로 세계 1위이며 광범위한 재배 지역을 가지나 주로 북부에서 많이 재배되며, 만리장성 이남은 겨울밀, 이북은 봄밀을 재배하고 있다. 그 외에 화북지방에서는 기장·고량·콩을 많이 생산하고 화난지방의 구릉지에서는 茶를, 그리고 세계 1위 생산량을 가지는 목화는 화중 및 화북지방에서 재배되고 있다.
- 중국을 이러한 농산물에 의한 지역구분을 해보면 대략 7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① 밀·보리와 벼 일부를 생산하며,
유목과 목축을 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② 인구밀집으로 노동력이 풍부하고 2기작이 가능한 남부 및 남동부 지역, ③ 주로 쌀과 밀의 2모작이
가능한 양자강 하류, ④ 고도가 높아 서늘한 여름을 가지면서 水稻作과 건조작물(옥수수·감자·밀)의 윤작이 이루어지는 남서부 지역, ⑤ 주로 밀을
재배하는 화북지방의 평야, ⑥ 주로 밀이나 기장·옥수수를 재배하는 황투고원, ⑦ 건조지역으로 감자와 밀·기장, 또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북동부 및
북부 지역으로 나뉜다. 현재 경지는 9,655만ha(전체 면적의 10.1%), 과수원 327만ha, 목초지 4억ha이고, 농업종사자는 4억
6,208만 명으로 1인당 농지는 1.1ha이다.
② 임 ·수산업
- 중국의 삼림은 1억 3,370만ha로서 세계 삼림면적의 3.3%로 5위를 차지하고 임목축적량은 101.4억㎥로 6위이지만 전체 면적에 비해서는 삼림이 적다. 삼림피복률 역시 13%에 불과할 뿐이고 1인당 평균 삼림보유 면적은 1.11ha로서 세계 평균의 1/8에 불과하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 지구의 대싱안링산맥, 소싱안링산맥 그리고 창바이산맥 등이 전체 축적량의 30%를 점한다. 또한 남서부 고산지대 역시 약 20%의 임목축적량을 차지하고 있다.
- 수산물 생산량은 공산혁명 이후 일시적으로 줄어들다가 1982년부터 어업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수산물 총량이 1984년 600만t으로 대폭적으로 늘어났고, 1988년에는 1천 만t, 1992년에는 1,557만t에 달하였다. 해양어류는 약 1,500여 종이 서식하고 있고 그 중 주요 경제어종은 200종이다. 수조기·참조기·갈치·오징어가 4대 경제어종이며 갈치·고등어·전갱이류의 순서로 많이 잡힌다. 담수 면적은 약 2,666만ha로 경지면적의 1/4을 웃돈다. 이 중 하천수면은 1,200만ha, 호소수면은 800만ha, 저수지 및 유수지가 670만ha이며, 이 중 양식면적은 500여 만ha이다. 이들 담수에는 민물청어·산천어·연어·금강바리 등 중국 특유의 경제어류들이 잡힌다.
③ 공업
- 중국의 공업총생산액은 1993년 4조 472억元으로 1949년의 140억 위안에 비해 289배가 증가하였다. 사회총생산액에서 공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1949년 25.1%에서 67.1%로 증가하였다. 공업총생산액에서 경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49년의 73.5%에서 47.2%로 낮아진 반면 중공업의 비중이 52.8%로 높아졌다. 공업 입지는 과거 동부 연해지대에서 내륙으로 확산하고 있다. 주요 공업지대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 화학 등이 발달한 상해·남경 중심의 동부지역, 석유, 화학, 정유, 방직 공업이 발달한 西安·蘭州를 중심으로 하는 북서부지역, 기계, 전기, 섬유, 철강 등이 발달한 북경·天津 중심의 북부지역, 자동, 차, 조선, 화학, 기계 등이 발달한 鞍山, 瀋陽, 大連 등의 북동부지역, 철강, 섬유, 기계, 차량, 제재제당 등이 발달한 무한, 廣州, 厦門, 福州 등의 중남부와 철강, 기계, 정유가 발달한 사천분지, 윈구이고원의 남서부로 나누어진다.
- 1993년 주요 생산 현황을 보면 석탄(11.4억t), 시멘트(3억 5,674만t), 면사(487만t), 면포(182억m), 자전거(4,095만 대), 재봉틀(833만 대), 텔레비전(2,885만 대) 등은 생산량에서 세계 1위이고, 강철(8,868만t), 강재(8,730만t)는 세계 2위, 화학섬유(221만t), 선박(264만t), 황산(1,320만t), 화학비료(2,016만t), 설탕(745만t) 등은 세계 3위, 탄산나트륨(455만t), 원유(1.45억t)는 5위를 기록했다. 그 동안 강조되어온 중국 공업을 보면 5차 5개년계획(1976∼80)에서는 야금, 기계, 화학이었고 6차 계획기(1981∼85)에는 식품, 방직, 의류, 건자재, 가전제품, 7차 계획기(1986∼90)에는 봉제, 완구, 의류, 가전, 일반기계, 석유화학, 8차 계획기(1991∼95)에는 기계, 전기기구, 가전, 에틸렌 등이고 9차 계획기(1996∼2000)에는 전자, 컴퓨터, 반도체, 우주, 항공 등을 주도공업으로 설정하고 있다.
다. 수출입 현황
- 1949~78년의 중국의 무역액은 큰 변화가 없이 적은 규모였다. 그 상대국도 대개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시장경제의 도입을 주축으로 하는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세계 모든 나라와의 교역이 필연적이었고 중국의 무역액은 개혁·개방 이후 크게 증가하였으며, 대상국도 비공산권으로 확대되었다. 무역액은 1978년 206억 달러에서 1993년 1,957억 달러로 늘어나 연평균 16%씩 증가하여 세계 11대 교역국이 되었다. 무역 수지에 있어서는 개방 초기에 약간의 적자를, 1981∼83년에는 균형을 이루다가 1989년까지 적자를 기록하였고, 이후 1992년까지 흑자를, 그리고 1993년에는 다시 적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 전반기 들어 위안화(元貨)의 평가절하와 전기·기계제품 수출의 폭발적인 증가로 수출이 전년 동기에 대비하여 30.2%가 늘어 484억 달러이고, 수입은 자동차와 고급 소비재의 수요감소로 전년 동기 대비 21.1% 증가에 그친 492억 달러로 무역적자가 대폭 개선되었다.
- 무역규모는 1998년 현재 3,250억 6천말 달러로 전년대비 12.1% 증가하였다. 수출 1,827억 달러(전년대비 20.6% 증가), 수입 1,423억6천만달러(2.5% 증가)로 403억 4천만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에 유입된 해외자본은 620억달러(전년대비 13% 증가)이다. 주요 무역 대상국은 홍콩, 일본, 미국, 대만, 한국 등이다, 무역의존도도 1978년 9.6%에서 1993년 37.5%로 높아져 급속한 대외개방형 경제로 탈바꿈하였다. 수출입 구조를 살펴보면 개혁·개방이 일어난 1978년 총수출액 중 초급제품이 53.5%, 공업 완제품이 46.5%를 차지했으나 점차 공업 완제품의 비중이 높아져 1993년에는 그 비율이 각각 18.2%, 81.8%를 차지하였다. 공업 완제품 내에서는 특히 경공업 제품의 증가율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 수입에서는 소득의 향상과 더불어 품목에서의 고급화 추세가 최근에 늘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1950년대 주요 무역 상대국은 주로 소련과 동유럽이 대부분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60년의 소련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1970년대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들이 증가함으로써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교역이 늘어났다. 이는 개방정책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중국은 외자 도입에 대한 초기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상호 이득이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적·행정적 개혁도 외자도입과 연계하여 이루어졌고 경제특구와 개방도시 등도 외자 도입을 위해 설정하였다. 중국의 외자도입은 국제금융기관 및 민간은행으로부터의 차관이나 合資·合作·獨資 등의 '三資企業'과 공동개발, 그리고 상업신용 등 3가지로 이루어진다.
- 1980년대 중반 이후 직접투자가 주가 되고, 차관이 보완적인 요소로 되었다. 1986년의 경우 차관은 84억 700만 달러, 직접투자는 28억 3400만 달러인 것이 1993년에는 각각 113억 500만 달러와 1,114억 3,500만 달러로 관계가 역전되었다. 1989년 이후의 경기과열을 막기 위한 '治理整頓'정책으로 둔화된 투자는 1991년부터 다시 전면적인 대외개방 정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직접투자의 도입을 국가별로 보면 홍콩·마카오·타이완 등 화교자본과 일본·미국의 투자가 대부분이다. 1979∼93년의 투자에서 홍콩·마카오가 전체의 66.7%, 타이완이 8.3%, 미국 6.6%, 일본 4.0%를 차지하였다.
- 중국의 무역과 외자 도입으로 상징되는 대외개방을 위해 중국은 지역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왔다. 1980년 심천, 珠海, 汕頭, 샤먼 등이, 그리고 1988년 海南島을 省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경제특구로 선정하였다. 1984년에는 14개의 연안 항만도시가 경제기술개발구로 설치되어 기술 집약적 제조업 위주의 외국인 투자를 유도하였다. 또한 1985년에 沿海經濟開放區를 설치하였고, 1988년에 산동반도경제개발구와 랴오둥반도경제개발구를 개방구로 선정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연해지역의 개방 확대와 상해 浦東地區를 중심으로 하는 양자강 연안 개방의 추진, 그리고 국경도시와 내륙지역의 개방 등 전방위적 지역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라. 한ㆍ중 교역동향(2002년)
- 한국측통계(무역협회)
(단위:억불, %) |
구 분 |
1998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총 액 |
184.3(-22.3) |
226(22.6) |
314.1(43.2) |
314.9(0.2) |
396.2(30%이상) |
對中 수출 |
119.4(-12.0) |
137(14.6) |
186.1(37.6) |
181.9(-1.4) |
227.7(29.6) |
對中 수입 |
64.8(-35.9) |
89(36.7) |
128.0(62.4) |
133.0(3.9) |
168.6(30.2) |
무역수지 |
54.6(52.1) |
48(-11.0) |
54.1(3.5) |
48.9(-2.8) |
55.1(21.3) |
- 중국측 통계(해관)
(단위:억불, %) |
구 분 |
1998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총 액 |
221.6(-11.6) |
250.4(17.7) |
345.0(37.8) |
359.1(4.1) |
440.7(20.7) |
對韓 수출 |
62.7(-31.3) |
78.1(24.9) |
112.9(44.6) |
125.2(10.9) |
155.0(23.8) |
對韓 수입 |
149.9(0.4) |
172.3(14.7) |
232.1(34.7) |
233.9(0.8) |
285.7(22.1) |
무역수지 |
-87.2(50.1) |
-94.2(8) |
-119(20.1) |
-108.7(-8.6) |
-130.7(-20.2) |
마. 중국의 수출입 동향(2002년)
(단위:억불, %) |
구 분 |
1998년 |
1999년 |
2000년 |
2001년 |
2002년 |
총 액 |
3,239.5(-0.4) |
3,606.5(11.3) |
4,743.0(31.5) |
5,097.7(7.5) |
6,207.9(21.8) |
수 출 |
1,837.1(0.5) |
1,949.3(6.1) |
2,492.1(27.8) |
2,661.5(6.8) |
3,255.7(22.3) |
수 입 |
1,402.4(-1.5) |
1,657.2(8.2) |
2,250.9(35.8) |
2,436.1(8.2) |
2,952.2(21.2) |
무역수지 |
434.8(7.6) |
292.1(-32.8) |
241.2(-8.9) |
225.5(-2.8) |
303.5(34.6) |
바. 중국의 10대교역국
(단위:억불, %) |
순위 |
국명 |
01년 교역액 |
2002. 1 ~ 11월 | |||
교역액 |
수출 |
수입 |
수지 | |||
총교역액 |
5,097.7 (7.5%) |
5,601.8 (21.0%) |
2,937.0 (21.6%) |
2,664.8 (20.5%) |
272.2 | |
1 |
일 본 |
877.6 (5.5%) |
918.0 (15.3%) |
436.3 (7.1%) |
481.2 (23.9%) |
-45.4 |
2 |
미 국 |
804.8 (8.1%) |
879.6 (19.6%) |
633.3 (27.0%) |
246.3 (4.0%) |
387 |
3 |
홍 콩 |
559.7 (3.7%) |
628.3 (24.2%) |
530.1 (26.2%) |
98.2 (14.6%) |
431.9 |
4 |
한 국 |
359.1 (4.1%) |
394.8 (20.7%) |
139.1 (23.2%) |
225.7 (19.5%) |
-116.6 |
5 |
대 만 |
323.4 (5.9%) |
402.7 (38.0%) |
59.0 (31.4%) |
343.7 (39.2%) |
-284.7 |
6 |
독 일 |
235.2 (19.4%) |
249.7 (16.6%) |
101.1 (14.5%) |
148.6 (18.1%) |
-47.5 |
7 |
싱가폴 |
109.3 (1.1%) |
125.4 (26.8%) |
62.9 (19.8%) |
62.5 (34.7%) |
0.4 |
8 |
영 국 |
103.1 (4.1%) |
104.3 (10.7%) |
73.5 (18.6%) |
30.8 (-4.5%) |
42.7 |
9 |
네델란드 |
87.4 (10.3%) |
96.5 (22.1%) |
82.1 (24.8%) |
14.4 (8.4%) |
68 |
10 |
프랑스 |
77.9 (1.8%) |
75.0 (6.1%) |
36.5 (9.1%) |
38.5 (3.4%) |
-2 |
* EU |
782.5(12.2%) |
432.8(16.5%) |
349.7(7.3%) |
83.1 |
2. 투자환경 및 제도
1) 외자유치정책 변화추이
가. 법규, 제도 정비
- 중국은 黨 11기 3中全會(78.12)에서 개혁, 개방을 국가정책방향으로 결정한 이래 '中外合資經營기업법'(79.7 제정, 90.4 개정), '外資기업법'(86.4), '中外合作經營기업법'(88.4) 등 외자유치관련 기본 법규를 제정하였다.
- 이어서 외국인투자자의 최대 관심사항인 법인세(기업소득세)와 관련해서는 기본법인 '外商(외국인)투자기업 및 외국기업 소득세법'(90.12)과 同 실시세칙(91.7)을 제정, 合資, 合作, 獨資企業 및 외국기업에 대한 세율을 통일하였다.
- 또한 세제개혁을 통해 외자기업에 대해서만 부과해온 '工商 통일세'를 폐지(94.1), 외자유치 촉진을 위한 일부 減, 免稅 조치를 제외하고 內, 外資기업간 과세체제를 기본적으로 단일화하였다. 장기적으로는 모든 차별이나 특혜를 철폐해 나갈 방침이다.
- '出入國 관리법'(86.2), '노동법(95.1), '外換관리조례'(96.1 제정, 97.1 개정)의 제정, 세행을 통해 외국인투자자의 출입국, 투자, 고용 등의 문제를 간소화, 법제화하고 과실송금 보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 한편 한국을 비롯, 미국, 일본 등 주요 외국정부들과 '이중과세 방지협정'과 '투자보장협정' 등을 체결, 외국인투자자의 합법적 권익 보호에 주력하고 있다.
나. 투자제한, 금지업종 축소
- 외자유입이 확대되면서 국내기업과 외자기업간의 경쟁 격화, 외자의 동부 연해지역 집중에 따른 지역간 불균형 심화, 노동집약산업 집중 투자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자 업종과 투자지역에 대한 선별적 외자유치정책으로 전환해 가고 있다.
- 이어서 1994년 발표한 '90년대 국가산업정책 요강'을 중심으로 외국인 투자 장려, 제한, 금지업종을 명문화한 '외국인투자지도목록'을 제정(95.6)하였다.
- 1998년 1월 '외국인투자 지도목록'을 개정, '국가 중점 장려산업, 제품 및 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외국기업의 설비 수입에 대한 관세, 증치세를 면제하고 투자제한, 금지업종을 축소하였다.
- 그러나 1995년 6월 공표된 '외국인투자 지도목록'과 1998년 1월 개정 목록을 비교해 보면 국내 생산능력 과잉, 산업구조 조정 등의 명분을 내세워 섬유, 전력, 석유화학, 전자, 관광업 등에 대한 투자제한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다. 대외개방지역 확대
① 경제특구
- 선진 자본, 기술, 경영기법을 도입하기 위해 설치한 자본주의의 학습장으로서 80년부터 홍콩, 대만, 마카오와 인접한 남부지역에 설치(심천, 주해, 산두, 하문 및 해남성)하기 시작하였다.
- 경제특구는 진출 외국기업에 대해 법인세(기본세율 33%a15%), 토지사용, 인프라이용, 원자재수입, 출입국 등에 폭넓은 우대조치를 부여하여 외자유치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80년대 중국경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② 연해 개방도시
- 1980년의 4개 경제특구 지정에 이어 1984년 4월에는 천진, 상해, 대련, 진황도, 연대, 청도, 연운항, 남통,
녕파, 온주, 복주, 광주, 심강, 북해 등 연해 14개 도시를 대외 개방하였다.
- 연해개방도시 중 상해와 천진은 3,000만달러, 대련은 1,000만달러, 기타도시에 대해서는 500만달러 이하 프로젝트의 외국인투자유치 자율권을 부여하는 한편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해 법인세 기본세율을 33%a24%로 감면하는 우대조치를 부여하였다.
- 또한 온주, 북해를 제외한 12개 도시에 14개의 경제기술개발구를 설치하고 외자기업에 대해 경제특구에 준하는 기업소득세, 지방소득세, 수입관세, 수출관세, 건물 부동산세 감면, 재투자우대, 과실 해외송금의 편의제공 등 우대조치를 부여하였다.
※ 경제기술개발구(총 32곳)
지정시기 | 설 치 지 역 |
1984년(14곳) | 대련, 진황도, 천진, 연대, 청도, 연운항, 남통, 상해(閔行, 虹橋, 漕河涇), 녕파, 복주, 광주, 심강 |
1992년(16곳) | 하얼빈, 장춘, 심양, 營口, 위해, 곤산, 항주, 蕭山(절강성), 온주,
福淸融橋(복건성), 東山(복건성), 惠州大亞灣, 광주 南沙, 蕪湖, 무한, 중경 |
1994년(2곳) | 북경, 우루무치 |
③ 연해 개방구
- 1985년 2월 양자강삼각주, 광동성 珠江삼각주, 복건성 하문, 장주, 천주삼각주의 61개 시, 현을 연해개방구로 지정한 데 이어 1988년 3월 요동, 산동반도와 일부 연해지역을 추가하여 총 293개 시, 현, 42만 6,000평방km(인구 2억 8,000만명)를 대외 개방하였다.
- 이후 대외개방지역을 추가 지정하여 1998년말까지 337개 시, 현의 50만평방km(인구 3억 2,000만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대외개방함으로써 전방위 개방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 광동성경제개방구 : 성 전체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주강삼각주의 광주, 심강 등 13개 시와 42개 현 지역
- 복건성경제개방구
: 하장천 삼각주 등 성 전체 면적의 1/3 지역
- 광서자치구경제개방구 : 북부만의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자치구 전체의 8% 지역
-
산동성경제개방구 : 청도, 연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산동반도 연해지역에서 반도 내륙의 제남까지 전체 면적의 40% 지역
- 강소성경제개방구
: 양자강삼각주 인근의 소주, 무석, 상주를 중심으로 한 9개 시, 40개 현
- 절강성경제개방구 : 양자강삼각주의 도시를 중심으로
전체면적의 40% 지역
- 하북성경제개방구 : 진황도, 당산, 滄州를 중심으로 한 3개 시, 2개 현으로 전체 면적의 10% 지역
-
요녕성경제개방구 : 요녕반도 끝의 대련부터 영구, 鞍山, 심양 주변까지 전체 면적의 30% 지역
④ 고신기술(첨단기술)산업 개발구
- 1988년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첨단산업의 육성을 위해 '과학기술과 교육사업의 발전에 전략적 중요성을 두고 과학기술의 진보와 노동자의 자질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목표아래 북경시에 최초로 첨단기술산업 개발실험구를 설치하였다.
- 이어서 첨단산업 발전전략(횃불계획)의 가속화를 위해 전국 26개 도시의 첨단기술개발구 지정 신청을 승인(91.3)하였으며 1992년에 25곳을 추가로 지정하였다.
⑤ 양자강 연안, 내륙 개방도시
- 양자강하류의 상해 포동신구 건설 및 중류의 삼협댐 건설착수를 계기로 내륙개발 추진을 위해 양자강연안도시와 내륙성도, 대도시를 대외개방하고 14개 연해개방도시에 준하는 우대정책 실시를 결정하였다.
- 양자강연안에서는 1992년 蕪湖, 九江, 黃石, 무한, 岳陽, 중경 등 6개 도시를 개방한데 이어 1994년에 호북성 의창과 사천성 부릉, 萬縣, 巫山, 奉節, 雲陽, 開縣, 石柱, 豊都, 武隆, 長壽, 江北 등 20개 시, 현을 '양자강 삼협경제개방구'로 지정하였다.
- 내륙지역에서는 흑룡강성 하얼빈, 길림성 장춘, 내몽고자치구 호화호특, 하북성 석가장, 산서성 태원, 안휘성 합비, 강서성 남창, 하남성 정주, 호남성 장사, 사천성 성도, 귀주성 귀양, 광서장족자치구 남녕, 운남성 곤명, 감숙성 란주, 섬서성 서안, 청해성 서녕, 신강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의 18개 성도를 개방하고, 섬서성 보계, 사천성 綿陽, 攀枝花, 귀주성 遵義, 六盤水, 흑룡강성 목단강, 佳木斯, 광서장족자치구 계림 등 대도시를 추가로 개방하였다.
⑥ 국경 개방도시
- 등소평의 南巡講話(92.1) 이후 개혁, 개방이 급속히 추진되면서 주변국가와의 국경무역 활성화를 위해 국경지역의 14개 도시를 대외 개방(92.3)하였다.
- 동북부 中-러 국경지역에서는 黑河, 王+軍 春, 綵芬河, 萬州里와 압록강의 丹東을 국경 개방도시로 지정하였고 서남부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국경지역은 광서장족자치구의 憑祥, 東興, 운남성의 宛町, 瑞麗, 河口를 개방하였다.
- 또한 서북부에서는 신강자치구의 이녕, 博樂, 塔城 등 3개 도시와 북부 내몽고자치구 국경지역에서는 二連浩特을 개방하였다.
⑦ 연해 보세구
- 1990년 6월 상해 外高橋보세구를 시작으로 2년여에 걸쳐 천진항, 심천(沙頭角, 福田, 鹽田), 대련, 張家港, 청도, 녕파(北侖), 하문, 복주(馬尾), 광주, 산두, 海口, 주해 등 연해 13개 도시에 보세구를 설치하였다.
- 보세구는 경제특구보다 자유로운 관리와 운영이 가능하다. 수출입 금지, 제한품목을 제외한 전품목의 국제시장 유통이 자유롭고 화물의 수출입에 따른 수출입 허가증과 관세가 면제되며 국내 非보세구에서 보세구로 반입되는 화물의 관세가 면제된다.
2) 외국기업의 對中투자 실태
가. 동향2000년 투자동향(2000. 1 - 11)
2000. 1 - 11 기간중 외국인 투자는 계약기준으로 크게 증가(36.3%)하고 있으나, 실행기준으로는 감소상태임(-2.3%)
- 이는 중국의 외국투자기업들이 기업구조조정으로 파트너와 최종합의를 유보하고 있는것으로 보이나, 2001년에는 중국이 WTO가입이후 투자환경이 개선되어 400억불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연도별 투자추이>
( 단위 : 억불, % ) |
|
'90 |
'91 |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2000. 11 |
건수 |
7,273 |
12,978 |
48,764 |
83,437 |
47,549 |
37,011 |
24,556 |
21,001 |
19,799 |
17,100 |
|
계약금액 |
65.9 (17.7) |
119.8 (81.8) |
581.1 (385.1) |
1,114.1 (91.7) |
826.8 (-25.8) |
912.8 (10.4) |
732.8 (-19.7) |
510.0 (-30.4) |
521.0 (2.2) |
412.4 (-20.8) |
486 (36.3) |
실투자액 |
34.9 (2.9) |
43.7 (25.2) |
110.1 (151.9) |
275.2 (149.9) |
337.7 (22.7) |
375.2 (11.1) |
417.3 (11.2) |
452.6 (8.5) |
454.6 (0.4) |
404.0 (-11.1) |
362 (-2.3) |
나. 유형별 진출실태
- 외자기업(外商투자기업 또는 三資기업)은 투자, 경영방식에 따라 합자기업, 합작기업, 독자기업으로 분류된다.
① 合資기업(Joint Venture)
- 외국기업이 중국정부의 인가를 받아 중국기업(사영기업 제외)이나 경제단체와 공동으로 자본을
출자, 설립한 유한책임회사로 경영, 위험, 손익에 대해 책임을 분담한다.
- 현금과 현물을 포함한 외국인 투자비율은 총 등록자본의 25% 이상 되어야 하고 상호 투자비율에 따라 이윤을 분배한다.
- 설립가능분야는 선진기술과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하여 기술수준 향상과 수출증대 및 기술자, 경영진 육성이 가능한 분야로 제한된다.
② 合作기업(Contract Joint Venture)
- 합작조건, 경영기간, 책임과 권한, 영업범위 등에 관한 모든 내용을 투자자
쌍방의 협의에 의해 결정하여 공동으로 경영하는 유한책임회사 성격의 기업이다.
- 일반적으로 중국측은 토지, 노동력, 공장, 설비 등 현물을 투자하고 외국측이 자금, 기술, 주요 설비, 원자재 등을 제공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③ 獨資기업(Foreign Capital Enterprise)
- 외국기업이나 경제단체, 개인 등이 단독으로 출자하여 설립한
독립법인으로 경영상 모든 관리 및 위험과 손익에 대해 투자자가 단독으로 책임을 진다.
- 설립조건은 국민경제 발전에 유리하고 선진기술, 설비를 이용하면서 생산품의 전량 또는 대부분(성별로 수출률이 다소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70%)을 수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합자기업과 합작기업은 1979~1998년간 전체 투자유치 계약액의 68.6%를 차지하는 등 와국인투자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점유비중이 합자기업은 1992년 50%a1998년 34%로, 합작기업은 1992년 23%a1998년 22%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 이에 반해 독자기업은 1979년~1998년간 투자유치 계약액이 31.4%에 머물렀으나 경영권 마찰을 우려한 외국인투자자들이 합자, 합작을 기피, 점유율이 1992년 27%a1998년 44%로 증가하고 있다.
다. 국가별 투자현황(실행기준)
(단위: 억달러) |
구분 |
2000년 |
2001년 |
총계 |
407.14 |
468.77 |
홍콩 |
154.99 |
167.17 |
일본 |
29.15 |
43.48 |
미국 |
43.83 |
44.33 |
대만 |
22.96 |
29.79 |
영국 |
11.64 |
10.51 |
독일 |
10.41 |
12.12 |
싱가폴 |
21.72 |
21.43 |
한국 |
14.89 |
21.51 |
< 자료 : 2002 중국통계연감 > |
라. 지역별 진출실태
- 외국기업의 대중투자는 중국이 개방초기에 연해지역 우선 개발정책을 추진한데 따라 경제특구와 개방도시에 편중되었으며 특히 홍콩, 대만 및 동남아 화교기업들은 출신지이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광동, 복건성 등 동남부 연해지역에 집중되었다.
-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국토의 균형개발을 위해 내륙지역에 진출하는 외국기업에 대해서는 경제특구에 상응하는 각종 우대조치를 부여하는 등 투자유인책을 도입하고 있다.
- 그러나 내륙지역의 저렴한 노동력, 지가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술인력 부족, 수송, 통신 등 인프라 미비 등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내륙에 대한 투자는 부진한 상태이다.
- 지역적으로 보면 북경, 천진, 상해시와 광동, 복건, 절강성 등 동부 연해 12개 성, 시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비중이 1990년 93.9%에서 1998년에는 87.2%로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반면 산서, 길림, 흑룡강, 안휘성 등 중부지역에 대한 투자비중은 1990년의 3.9%에서 1994년 7.9%, 1998년 점진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사천, 귀주, 운남성 등 서부지역에 대한 투자는 2~3%대의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 2001년
중국의 주요 경제지표 동향
3. 서부대개발 프로젝트
1) 개황
- 중국은 지역 불균형적 발전 전략에서 벗어나 서부대개발의 기치아래 전국적인 균형발전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중국정부는 전국적인 규모의 사회 간접자본의 구축을 우선 추진하고 있다.
가. 추진배경
- 중국정부는 3단계 발전전략을 추진, 1, 2단계인 溫飽(배불리 먹을 수 있는 단계)와 小康단계(여유있는 생활 단계)가 각각 80년대와 90년대에 달성되었다고 평가하고 3단계인 현대화 단계를 2000년대에 실현하기 위해서 서부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 동부 연해지역이 그간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여 국가재정수입의 대부분을 담당해왔으나, 현재 산업구조 조정단계에 진입, 동 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중서부지역의 막대한 시장, 숙련된 노동력 및 광산자원 등 자원개발이 필요
- 특히 서부대개발 정책을 중점 제기하고 2001년부터 시작되는 제 10차 5개년 계획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서부개발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심각한 내수부진 문제를 해결하고,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낙후한 서부지역의 생활수준 향상을 통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 동, 서부 지역간 경제력 차이(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구분 |
동부 |
서부 |
면적 |
13% |
56% |
인구 |
41% |
24% |
GDP |
65% |
15% |
연평균성장률(79~98) |
12.8% |
8.7% |
인프라 투자비율(79~98) |
60% |
20% |
사회복지 시설 |
45% |
20% |
국유기업 기술인원 |
51% |
17% |
대외무역 |
1999년 총수출액의 91%를 동부지역에 달성(광동 및 상해 지역이 전체의 약 50%차지)
| |
외자도입 |
서부는 전체도입액의 5.42%에 불과 |
- 또한 서부지역의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분별한 산림개간을 진행, 생태환경이 파괴되어 홍수(1998년의 양자강 홍수) 등 자연재해가 빈발하게 되어 서부개발을 통한 생태환경 보호 필요성이 급증하였다.
- 한편, 중국정부가 중서부개발을 거론하면서도 특히 서부개발을 강조하는 것은 중부 지역은 전통적 농업 생산지역이면서 공업수준도 일정수준에 달하여 자체발전이 가능 하다고 보나, 서부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개발을 추진하지 않으면 발전이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 주관부처(서부개발 영도소조 및 판공실)
- 서부개발 영도소조는 조장이 주룽지(朱鎔基) 총리이며 국가발전계획위 주임, 재정부장, 인민은행장, 교통부장, 농업부장 철도 부장 등 20개 부문의 지도자들로 구성
- 판공실은 국가발전계획위 주임 쩡페이옌(曾培炎)이 주임을 겸직하고 있으며 산하 조직으로는 3개팀, 즉 정책기획(서부개발 정책수립 등),환경(생태환경정책 시행 등), 경제사회발전(인프라 건설, 산업구조조정 등)팀이 있다. 2000년 3월 16일 국무원산하에 서부개발영도소조판공실을 정식설립하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다. 추진방향
- 서부개발은 3단계 국가발전전략과 결합하여 장기적인 전략으로 추진
- 개발초기(2000~2005년) : 개발계획 및 정책수립, 주요 기구수립, 홍보, 기초건설 가속화
- 대규모 개발 (2006~2015년) : 서부지역 개발능력 제고, 투자규모 확대
- 전면발전 (2015~2050년) : 서부지역의 도시화, 시장화, 국제화 수준 제고
- 중국정부는 최근 2년간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시행하면서 재원의 상당부분을 중서부 지역의 기초시설 건설 및 산업자원조사 등 방면에 투입하고 꾸준한 준비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서부대개발정책을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추진해나갈 장기발전전략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 1998~1999년 내수확대를 위해 발행한 1200억위안 상당의 국채중 상당부분이 서부 지역에 투입되었으며 1998년의 경우 서부지역에 대한 투자액이 동부보다 14% 높았다.
- 재원면에서 정부투자 외에도 신규 외자 및 연해지역 외자기업의 재투자 등 각종 투자주체의 참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한 금년에 발행할 국채 중 상당부분을 서부지역 인프라 건설에 투입하고 서부 건설에 참여하려는 일반기업에 대한 대출을 늘려 서부 건설에 참여토록 유도할 계획이다.
- 개발전략면에서 맹목적인 자원개발을 배제하고 생산능력 확대 및 경쟁우위가 있는 첨단산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서부지역은 항공 우주산업 등 하이테크 산업에 비교우위가 있으며 특히 서안은 첨단 기술 산업단지로 전망이 밝다.
- 개발형식면에서 종래의 조방형 개발로부터 지속발전 가능형으로 전환, 생태환경 건설과 연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서부지역은 중국의 식수원인 황하 및 장강상류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환경 친화적인 개발을 중시하고 경작지를 산림, 초원 등으로 환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단계별 개발계획을 수립, 우선 기초시설 건설과 생태환경 건설에 주력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 및 제품을 육성 발전시키려 한다.
- 장기적으로 서부의 자생적 발전능력제고
- 지역적 특성에 알맞는 발전전략 추진
. 운남성은 열대, 아열대의 풍부한 생물자원을 활용, 사천성은 가공공업, 섬서성은
첨단기술산업, 신강은 면화와 토마토, 천연가스 등을 개발
2) 대륙을 가로지르는 송전프로젝트
- 서부전력의 동부지역으로 송전(西電東送)
- 중국의 수자원분포는 불균형이 심한 상황이다. 수력발전으로 개발 가능한 자원 중 90%가 중국의 서남부, 중남부 및 서북지구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력발전 자원의 분포와 전력사용 분포간의 불균형은 객관적으로 수력발전의 개발과 이용을 제한하고 있다. 경제발달지역과 미발달 지역간의 상호 유리한 분야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중국국무원은 '서부 전력을 동부지역으로 송전한다는 이른바 서전동송(西電東送)' 프로젝트를 실시키로 결정하였었다. 관련 부문의 계획에 따르면 전력송전 프로젝트는 3개의 주요 송전망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① 남부송전망
- 貴州省의 烏江, 雲南省의 瀾滄江과 廣西~운남~귀주 세지역의 접경지인 南盤江, 北盤江, 紅水河의 수력발전자원 및
귀주, 운남 두 省 광산지역 화력발전소의 전기에너지를 개발하여 廣東 지역으로 송전하는 전력망 형성.
② 중부송전망
- 삼협과 金沙江 지류의 수력발전을 주로 화동지역(상해, 강소, 절강 등)으로 송전하는 전력망 형성.
③ 북부송전망
- 황하 상류의 수력발전과 山西, 內蒙古 광산지역의 화력발전을 북경, 천진, 당산 지역으로 송전하는 전력망 형성. 현재
이러한 서부지역의 전력 송전 프로젝트는 초보적인 단계지만 어느 정도 형성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11월 아래 7개의 주요 송전망 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 貴州省 洪家渡 수력발전소
. 귀주성 引子渡수력발전소
. 烏江渡 수력발전소 확충
. 天生橋-廣東 간 제3차 500KV
교류 송전선 공정
. 重慶 萬縣-삼협발전소 간 500KV선로공사
. 운남성 宣威 화력발전소
. 운남성 寶峰-루어핑 간 500
KV 교류 송전 선로 공정
- 중국정부는 전력 송전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하여 송전망 건설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2000년부터 중국국가전력공사에서 인민폐 300억을 연속 투입하여 삼협송변전 공정 및 동북~화북, 서북~화중, 화중~화북, 사천 중경~서북, 복건~화동, 산동~화북 등 7대 지역간 송전망 공사를 추진하였다. 10차 5개년 계획기간(2001~2015년간)중국정부는 남부송전망 건설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3) 남부의 수자원을 북부로 공급하는 프로젝트(南水北調)
- 중국의 수자원은 그 분포가 극히 불균형적이다. 북방은 건조, 반건조 지역에 속하며 황하, 회하 유역의 일인당 수자원은 전국 평균수준의 1/5,세계 평균수준의 1/16에 불과한 중국에서 수자원이 가장 부족한 지역이다. 이러한 북방지역의 수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50년대 이래 남부의 수자원을 북부로 공급해주는 프로젝트에 대해 조사 및 타당성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선 동부지역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방안이 제기되었으며, 80년대 중반에는 중부지역의 남북을 연결하고 그 후에 동부지역을 연결하려는 순차적인 건설방안이 제기되었다.
- 남수북조의 수자원 공급 프로젝트는 양자강을 중심으로 양자강의 상류~중류~하류로 각각 남부의 물을 북으로 끌어간다는 즉 '서부라인 공사(西線工程)'~'중부 라인공사(中線工程)'~'동부라인 공사(東線工程)'의 세 공사로 구성되어있다.
- 지난해 11월 '남수북조'공정회 좌담회에서 중국지도부가 수자원절약, 수질오염방지, 환경보호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남수북조 공정을 시행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어 단순한 수자자원 연결 차원을 넘어선 공사임을 명확히 하였다는 것도 동 프로젝트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관련 프로젝트는 단계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① 동부라인 공사
- 양자강 하류의 揚州, 江都 구역에서 13단계의 물을 끌어올리는 계단형 설비와 황하 하상의 지하도를 통해 양자강의
물을 북방의 천진 및 河北省 지역으로 물을 공급하게 된다. 동부라인공사는 주로 황하, 회하, 海河 평원 동부지역의 물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공사로
주요 간선의 길이는 1,150km에 달한다.
② 중부라인 공사
- 양자강 호북성의 丹江口 저수지의 물을 북경으로 공급하는 공사이다. 주로 북경, 천진 및 북경~광주 간 철도에
연해있는 도시들의 물 사용과 화북지역의 환경용수 및 농업용수로 사용될 전망이다. 주요 간선의 길이는 1,240km이다.
③ 서부라인 공사
- 현재 계획으로는 大渡河, 야롱강, 通天河에서 150억입방m에 달하는 물을 황하 상류로 끌어들여 주로 寧夏,
內蒙古, 陝西, 山西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4) 대륙횡단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西氣東輸)
- 중국 서부는 천연가스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으로 전국 천연가스 총자원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新疆의 타림분지 지역이 중심 저장지역으로 전국 천연가스 자원 총량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서부지역 자체에서는 이 자원에 대한 수요가 별로 크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심각한 수급의 불균형은 관련 지역의 천연가스를 경제가 발달하여 수요가 많은 동부지역으로 공급한다는 프로젝트의 현실적인 기초가 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대륙횡단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를 통해 서부지역의 천연가스 자원의 우세를 서부지역의 경제발달의 동력으로 삼고, 또한 가스를 공급받는 지역들(성,자치구,직할시 등)의 산업구조와 에너지 구조를 조정하여 경제효율을 높이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있다.
- 가스공급 주 파이프라인은 총 길이 4,200km으로, 신장 타림분지의 輪南유전에서 시작하여 庫爾勒, 甘肅省 武威, 寧夏자치구 甘塘, 陝西省 靖邊, 山西省 臨汾, 河南省 鄭州, 安徽省 定遠, 江蘇省 南京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해에 연결된다. 주간선은 가스수송규모가 연간 120억입방m가 되도록 설계되어있다. 현재 관련 공사계획은 세 단계로 나누어 있다.(주: 현재 공사진척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업체 유치 단계이다.)
① 일단계 계획
- 四川, 重慶의 가스유전에서 매년 30억 입방미터의 잉여가스를 우선 武漢으로 수송하고, 무한에서 信陽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동시에 산시~감숙~닝시하 접경 분지의 천연가스를 신양으로 수송하며, 신양에서 다시 이 가스를 상해로 재수송하는 수송망이다.
2002년에는 동 수송망의 수송능력이 40억 입방미터에 달하도록 할 계획이다.
② 이단계 계획
- 柴達木(차이따무)분지의 천연가스를 蘭州로 수송하고, 란주에서 西安까지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차이따무,
섬서~감숙~녕하 및 사천~중경 3대 가스유전이 양자강 중하류 지역의 가스공급기지화 한다. 2005년에는 80억 입방미터의 가스 수송능력을 갖추게
된다.
③ 삼단계 계획
- 타림분지의 천연가스를 동부지역으로 수송토록 한다. 이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2007년에 이르면 양자강
중하류 지역으로의 가스 공급량이 140억 입방미터에 달하며, 2010년에 이르면 190억 입방미터에 달하게 되어, 향후 30여년간 안정적인 천연
가스 공급이 이루어지게 된다. 현재 일단계 공사와 관련 파이프라인 노선이 초보적으로 확정된 상태이며 2001년에 서부 라인과 동부라인으로 나누어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며, 2004년에 관통시킬 예정이다.
- 초보적인 추산에 따르면 공사에 소요되는 강재가 174만톤, 소요되는 용접재가 5100톤, 토목 공사량이 3000만 입방미터에 달할 전망이며, 동시에 대량의 물, 목재, 공기펌프, 측량측정기기 및 자동화 설비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 관련 파이프라인 공사의 67%가 서부지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신쟝 가스유전에 대한 고정자산투자만도 인민폐 200억 이상에 이를 전망이다. 이런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 현지의 경제 발전을 가져올 뿐만아니라 재정수입 및 대량의 취업기회를 창출하게 될 것으로 중국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 관련 전문가들은 대륙횡단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는 중국의 동부와 서부지역의 에너지 구조를 개선시킬 뿐만아니라 파이프라인에 연해있는 지역의 철강, 시멘트, 기계전자, 건설 등 부문의 성장을 가져 올 것이라고 지적하고있다.
5) 삼협댐 공사
- 삼협댐 공사는 지난 1992년 4월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7기 5차회의 에서 심의를 거쳐 통과됨으로써 본격적인 추진에
들어갔다. 실제 건설 공사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1994년 12월이었다.
삼협댐 공사는 지난 50년내 중국이 시도한
프로젝트 중 그 종합적인 효과가 가장 큰 공사로 평가받고 있다. 삼협댐의 공사 총량은 2,643만 입방미터로 湖北省 宜昌市의 葛洲댐 공사의
2.5배에 해당되는 공사량이며, 현재 세계 최대 수력발전소인 브라질의 이타이푸 공사의 2배에 해당되는 양이다.
- 삼협공사의 발전기 세트는 현재 세계 최대의 발전기 세트로 발전기 한기의 용량이 70만kw에 달해 전체 공사가 완공되면 발전량은 1,820만kw에 달하게된다. 삼협댐 공사의 선박 통행을 위한 갑문은 영구적인 건축물로 상하 양방향의 5단계 연속 사다리식 갑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세계 최대의 갑문이다.
- 삼협댐공사의 댐은 西陵峽의 宜昌市 南津關에 건설하고 있는데 유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양자강 상류의 홍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荊江하단에 있는 홍수방지용 표시를 하상의 상승으로 현재 10년에 한번씩 높이고 잇는데 삼협댐이 건설되면 100년에 한번 조정하게 될 전망이다.) 연평균 발전량 847억kwh로 계획된 삼협댐은 경제가 발달하였지만 에너지가 부족한 화중, 화동 지역에 더욱 확실하고, 저렴하며 깨끗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삼협댐공사는 후뻬이성 이창에서 중경까지의 660km의 항로의 효율을 현저하게 개선할 수 있고 만톤급 의 선박이 직접 중경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통항 능력이 1,000만톤에서 5,000 만톤으로 향상되고 선박운송 코스트가 현재보다 35%~37%이상 내려갈 전망이다.
- 삼협댐공사는 총 공사기한이 17년으로 3기로 나누어 공사를 하고있다. 1기공사는 1993~1997년간으로 양자강을 가로 막는 공사였다. 2기 공사(1998~2003년)목표는 최초의 발전기세트를 설치 발전을 시작하고 갑문을 건설하여 선박들이 통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3기공사(2004~2009년)목표는 주요 공정을 모두 완성하고 26대의 수력터빈 발전기세트 모두를 가동 발전하는 것으로 이것으로 전체 공정을 끝내게 된다.
6) 북경~상해간 고속철 공사(京호高速鐵路工程)
- 중국내에서 북경~상해간을 잇는 교통망은 비교적 발달한 편이지만 운송수요와 비교 하면 운송능력이 상대적으로 모자라는 지역이기도 하다. 총연장 1,463km인 북경~상해(경호)철도는 승객/화물 운송이 가장 빈번한 중국의 주요 간선이다. 1995년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화물운송과 승객운송 밀도에 있어 전국 평균 수준의 각각 5.2배와 3.6배에 달할 정도로 운송 밀도가 높다.(주:'호'는 상해를 표시하는 글자로 水(삼수변)+戶) 80년대 중반에 이미 중국 철도부가 초보적인 구상을 제시한 바있으며,1990년에 국무원의 비준을 얻어, 시험적으로 전장 147km인 광주~심천 노선을 시속 160km인 철도로 개조하였다.
- 1992년 북경에서 개최한 '중국고속철 세미나'에서 고속철을 건설할 조건이 가장 성숙된 지역으로 북경-상해 철로로 인정하였다. 1994년 광주-심천간 준고속철이 건설되면서 중국이 자체 개발한 기관차로 구성된 실험열차가 최고 시속 183km로 달렸다. 이와 동시에 국무원은 철도부의 '경호고속철 예비 사업타당성검토서'를 비준하였다. 1998년 2월 중국의 고위층은 경호고속철을 2000년에는 기공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아직 기공하지 않은 상태임. 현재 독일 등 유럽 방식과 일본 방식 중 어느 방식을 도입할지를 검토하고 있는 단계임.)
- 경호고속철은 여객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복선 전기화철로로, 북경역에서 출발하여 천진, 제남, 서주, 蚌埠, 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어있다.(현재의 북경~상해간 철도와 대체적으로 같은 노선으로 건설될 예정) 고속철은 일반 철도보다 다소 짧은 총연장 1,300km로 26개 역을 설치하며, 역간 평균거리는 55km으로 계획하고 있다. 역의 경우 북경, 천진, 제남, 서주, 남경, 상해의 경우 기존 시설을 조금 개조하여, 기존의 간선철도와 연결을 시키는 것으로 구상하고있다.
- 북경~상해간 고속철은 토질이 대체적으로 무른 중국의 동부연해 평원지역을 지나가며, 일부 선로는 연토(軟土)지대와 하천의 수해발생 지역을 통과하는 관계로 고가교량 설치가 많아져 고가교량이 총연장의 33%, 터널이 1.3%에 달할 전망이다. 고속철 건설을 위해서는 토석 1.1억 입방미터가 소요될 전망이며, 토지작업이 필요한 면적은 약 6천ha에 달할 전망이다. 북경~상해간 고속철이 완공되면 여객운송시간이 현재의 14시간에서 6시간 이내로 대폭 단축될 것이다. 이 고속철은 중국 최초의 남북지역을 연결하는 고속철이 될 것이다.
7) 티베트 지역 연결철도 공사(西藏鐵路工程)
- 서장(티베트 西藏)지역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철도가 없는 자치구(성과 동급 행정구역)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50년대부터
탐측과 설계를 해왔으나 최종적으로는 1985년에 靑海~서장을 연결하는 철도 공사에 착수 청해성 내의 西寧~格爾木(꺼얼무)를 연결하는 1기 공정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이유로 꺼얼무에서 라싸에 이르는 노선은 건설되지 않았다. 중국정부는 서장으로 진입하는 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2001~2005년간 추진되는 제 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계획에 서장으로 진입하는 철도공정을 포함시켰다. 국가의 중심
프로젝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 중국정부는 서장으로 진입하는 철도를 1)청해~서장, 2)감숙~서장, 3)사천~서장, 4)운남~서장의 네 방향에서 검토하였으나 기존에 설치된 청해~서장선(청해성 부분만 건설되어 있음)을 연장하여 서장의 중심인 라싸로 연결하는 것이 가장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 향후 건설해야 할 철도의 길이는 1,100km에 달하고 있다.(현재 서녕~꺼얼무 간의 기존 철도도 2001년 10월까지 확대개선할 계획이다.)
- 서부대개발 정책이 추진되면서 운남성과 서장을 잇는 운남~서장선(1,594km)의 사업 타당성이 초보적으로 검토된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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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1978년 三中全會에서 '解放思想,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사상을 해방하고 사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앞을 보자)'이라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였고, 1982년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는 원칙이 천명되어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혁명 이후 지속되어온 사회주의의 자취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1980년대 초 농업은
탈집단화 또는 사영화되어 과거 인민공사에 의한 집체농업은 개별 농가에 의한 개체농업으로 전환하여 혁명 이전의 상태와 유사한 자작소농체제로
바뀌었다.
- 1984년 이후 이러한 개혁은 도시 부문까지 확대되어 국유기업이나 집체기업들이 임대되거나 주식회사로 되기도 하고 사적 소유기업도
등장하였다. 또한 도시의 노동집약적 공업화의 여파로 도시인구가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과거 중국이 취한 도시 성장 억제정책은 이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개혁 이후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 노동자들 간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 격차를 심화시켰으며 농촌 역시 다양한
사영경제활동의 결과로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농촌의 잉여노동력이 도시로 몰리고 있고, 도시와 농촌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도 다시
벌어지게 되어 離村向都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 1989년 4월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으로 야기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되어 유혈사태로 마감된 천안문사태는 군의 발포로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종결되었고 이후 리펑(李鵬) 총리와 장쩌민 총서기 등이 전면에 나섰다. 그 후 개혁의 파고(波高)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었지만 곧 1992년 덩샤오핑의 '南巡講話' 이후 다시 개방·개혁이 계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 1993년에 구성된 8기 1차 전인대에서는 장쩌민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각료 41명 중 22명을 실무형 기술관료로 바꾸는 등 세대교체를 단행하여 개혁파를 우위에 두는 보혁균형을 이루었다.1994년 8기 2차 전인대에서 안정 위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는 등 중국은 성장과 안정이라는 목표에 조화를 기울이려는 모습도 보였다. 중국은 많은 인구로 인구증가를 강경하게 억제하고 있어 '1자녀 가지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농촌의 경우에는 첫아이가 딸일 경우 노동력의 수급 문제로 1명을 더 낳을 수 있다.
- 이같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이 1963년 43명에서 1993년 18명으로 줄었다. 1993년 9월 세계은행(IBRD)의 보고서에 따르면, 절대빈곤층이 1980년 2억 2,000만 명에서 1990년 1억 명으로 크게 줄었고, 사망률도 1,000명당 56명에서 38명으로 감소하였다. 1993년에는 과도한 수리비 징수 및 관리들의 착취, 그리고 가뭄까지 겹쳐 사천성에서는 대규모 농민폭동이 발생하고 광동성, 허난성 등에서도 농민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사회불안이 일어났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회범죄도 늘어나, 이른바 六害라고 하여 매춘·포르노·인신매매·마약·도박·사기 및 살인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1998년에는 대홍수로 인한 피해도 컸다.
1. 교육
- 1982년 덩샤오핑은 '교육은 현대화를 위해, 세계를 향해,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소위 '三個面向'을 제의했는데 바로
이것이 이후 중국 교육의 개혁과 발전방향의 지표가 되었다. 1985년 '의무교육법'을 공포하여 9년제 의무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교육부를 폐지하고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과거 사회주의 인간형을 만드는 데 치중해 왔으나 개혁 ·개방 과정에서
실용적인 과학기술과 전문기술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중등교육에서 직접 기술교육을 발전시키고 고등교육에서는 문과교육의 재건, 중점대학(세칭
일류대학)의 육성, 대학의 자주성 인정, 전원 기숙사 생활에 학비면제라는 기존제도를 고치는 등의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 기본적 학제는 유치원-소학교-중등학교-고등학원(대학 포함)으로 되어 있고, 학제는 근대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6·3·3제를 받아들였다가
1951년부터 5·3·3제, 문화혁명기에 5·3·2제를, 그리고 현재는 5·4·3제를 시행 중이나 지역에 따라 그 차이가 많다. 한국의 대학에
해당하는 高等院校에는 대학, 專門學院, 專科學校 및 附設硏究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급 인재 양성의 핵심이 되고 있는 중점대학은
1954년 중국인민대학, 북경대학, 淸華대학이 지정된 이래, 1981년부터는 그 수가 96개교에 이른다. 이와 더불어 농업중학, 고등전문학교,
직업기술학교 등이 설치되어 있고, 全日制가 곤란한 학생 및 성인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있다.
- 현재 설치되어 있는 기관은 織工大學, 농민대학, 보통고등학교 통신교육부, 야간대학, 간부 專修科, 管理幹部學院, 교육학원 및
교사양성학교, 텔레비전 방송대학 등이 있다. 중국의 교과과정은 도구교과(국어·수학·외국어), 문과계(지리·역사·정치),
이과계(물리·화학·생물), 예술계(음악·미술·체육)로 구분되어 있다.
한편 중국의 문맹률은 약 25%로 알려져 있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맹률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해마다 약 100만 명의 아동들이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북경시는
1994년 9월부터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가장들에게 200위안에서 5,000위안까지 벌금을 물리기로 했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이고, 또한
1993년부터 '1+1 운동'을 전개해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를 지원하자는 움직임도 있지만 이로 인한 혜택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 한편에서는
고급스럽고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도 등장하여 교육의 질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 복지
- 중국 정부는 1993년 11월에 2000년까지 전 인구를 대상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할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사회보장 개혁은 실업수당, 의료 및 연금혜택 등 기본적인 사회복지 실현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산혁명 이후 사회주의로서의 정부가 인민들의 생계를 보장해온 '쇠솥밥(鐵飯碗)' 체계가 서구식의 제도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1951년에 노동보험 규정이 도입되었고 대약진 기간 중에는 인민공사를 통한 복지 프로그램이 시행되었으나, 문화혁명 기간에는 생산성을 강조하여 노동보험규정의 실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1978년 노동보험규정이 재개정되고 나서야 그 역할이 회복되었다.
- 1982년 노인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향상하고자 노인복지법령을 제정하여 노인 5보(五保:음식·의류·의료·주거·장례 보장)를 구성하였다. 1985년 7차 5개년 계획(1986∼90)에 처음으로 사회복지사업, 사회구제사업과 보훈사업을 개선하여 완비하려는 조항이 첨가되었다. 1993년 현재 1,000명당 의사 수는 1.55명에 불과하고 의료위생시설이나 병상 부족이 매우 심각하여 입원이 어렵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1개 병상을 2명의 환자가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자가치료 간호가 행해지고 있다. 1993년 당시 의료 위생시설수는 약 19만 3600개, 병상 수는 179만 5,000개이다.
3. 세시풍속
- 중국의 세시풍속은 음력에 따라 치르는 데 종류가 다양하다. 한국의 설날에 해당하는 春節에는 헤어진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날로, 바로 전
날인 섣달 그믐부터 폭죽을 터뜨리며 놀고 음식을 먹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밤샘을 한다. 춘절 아침에는 차례를 지내고 '꽁시(恭禧)'라는 축하인사와
세배를 한다.
이후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되는 기간 중에 사자춤과 용춤이 등장한다. 정월대보름날인 元宵節 때는 보름달을 감상하고
등불놀이를 하며 만두국을 즐겨 먹는다. 端午節에는 배를 타고 경주하는 龍船 경기를 하고, 宗子라는 별식을 먹는다. 中秋節 때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햇곡식으로 먹을 것을 장만하여 감사하는 달맞이 행사를 한다. 이때 가장 즐겨 먹는 것은 月餠으로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할 때에는 꼭
이 월병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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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문예활동을 인민에 봉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함을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창작활동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82년 중국 정부는 문예사상의 '견지와 발전'을 주장하고 작가는 4가지 기본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여
작가들의 자유화 경향을 제어하였다. 즉 허용된 자유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 내에서의 자유이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 1983년 사상과 문화의 오염을 막는다는 명분의 整風運動이 다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白華의 '吳王金戈越五劍', 徐敬再의 '굴기적시군'이 비판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劉賓雁과 王若望이 비판을 받고 당적을 잃었다. 천안문사건 이후에도 일부 작품들이 자산계급 자유화사상에 물들어 있어 당과 사회주의를 불신하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 결국 중국의 문예활동은 정치적 면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도전이 많아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의 화단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서구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면서 신사실주의, 전위예술 등의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다.
- 문화혁명 이후 서양음악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음악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정권이 지정하는 공연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행으로 인민들의 음악생활도 다채롭게 변모하였는데 특히 배우기가 쉽고 이해하기 쉬운 유행음악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최근에는 가라오케 노래방(歌廳)들이 대도시에 급증하고 있다. 또한 교향악 부문도 1980년대 중반 인민들 사이에 열풍적인 반응을 일으켜 매번 중앙악단의 공연 때 매진되는 일이 흔하였다.
- 또한 중국인은 중국 고유의 京劇을 즐기는데, 이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등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로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 원리에 의해 세련화된 예술이다. 이 역시 문화혁명 때에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문예정책과 봉건주의적 잔재를 제거한다는 목표로 많은 부분이 변질되었지만 개혁 이후에는 문화혁명기에 금지당한 내용들이 다시 상연되고 표현면에서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1. 언론
- 중국의 언론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지도사상과 당의 노선을 준수하고, 당과 인민의 관계를 결합시키며,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사실을 보도하는 하나의 심천·선동 조직이자, 여론기관으로서의 성격과 임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력 일간지들은 당 기관지이고 그 외의 매체들도 당의 직접적인 지도체계 속에 있기 때문에 중국 언론은 거의 당 기관지라고 볼 수 있다. 1993년 말 일간지는 247종이고 이 가운데 당 기관지가 172종이었다.
- 주요 신문으로는 당 중앙의 견해를 대변하며 모든 신문의 영도적 위치에 있는 《人民日報》, 학술이론과 문화·예술 등을 다루는 《光明日報》, 군 기관지인 《解放日報》, 경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經濟日報》, 상해에서 창간되어 해외에서도 구독이 가능한 《文匯報》, 관영노조인 총공회 기관지 《工人日報》와 그 외에《農民日報》, 《中國靑年報》, 《中國婦女報》, 《中國少年報》, 《中國兒童報》 등이 있다.
- 통신사는 정부의 대내외 뉴스를 국내외에 공급하는 新華通信社가 특파원 500여 명을 포함한 3,500명의 기자를 갖추고 있으며 1982년부터 국무원에 소속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홍콩의 민간통신사로 중국신문사가 있다. 신문은 당기관지 인민일보와 광명일보, 군기관지 해방군보, 인공일보, 공청단기관지 중국청년보, 영자지 차이나 데일리, 문예보, 경제일보, 경제소식, 경제참고보, 금융시보, 인민공안보, 법제일보, 인민정협보, 문애보 등이 있다. 방송은 국무원의 방송·영화·TV부(廣播電影電視部) 관할하에 중앙방송국과 지방방송국이 있다. 중앙방송국에는 3개 라디오 방송국과 3개 TV방송국이 있다. 1992년 전국적으로는 812개 방송국과 711개 송신 및 중계소, 그리고 2,452개 현(縣)·시(市) 유선방송소, 586개 TV방송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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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1978년 실용주의 노선이 구체화되면서 과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과학·기술도 경제건설을 위한 혁신적이고 개방적인 발전전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과학기술체제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그리하여 문화혁명 기간에 정지된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국과학원, 중국과학기술협회 등이
재결성되었고, 이후 8개년 과학기술발전계획(1978∼85)이 입안·발표되었다.
1986년에는 하이테크산업 발전에 관한
계획(863계획)을 1986∼2000년 과학기술발전계획으로 편입하여 실행하고 있다. 이 계획은 15년 동안 1만명 이상의 과학·연구진을 투입해
생체공학, 우주·항공, 정밀전자, 정보기술, 레이저, 로봇 및 공장자동화, 에너지, 신소재 등에 연구개발 투자를 장려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 이 외에도 1988년부터 하이테크 산업의 개발을 상품화, 산업화하려는 '횃불계획(火炬計畵)'이 세워졌고, 개발된 기술을 농촌의 향진기업(鄕鎭企業)에 보급·확산시키려는 '불씨계획(星火計畵)', 취약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려고 하는 '공관계획(功關計畵)' 등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高技術産業開發區를 27개 시에 설정하고 경제특구의 일부를 첨단산업개발구로 지정하였고, 그 중에서도 상해 浦東地區는 아시아 최대의 실리콘밸리로 육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 과학기술활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각 연구기관들도 공개경쟁을 통해 계약책임경영제를 도입하여 경쟁적 관계를 조성하고 연구원에게도 능력에
따른 임금, 인센티브 및 복지수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과학기술은 혁명 이후의 정책으로 인해 이중적 구조 문제가 내재해 있다. 즉
국방산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민수부문, 중화학공업과 경공업 간의 불균형,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과학기술의 성공 여부에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인식하여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1세기를
기술 시대로 인식, 2000년까지 기술수준을 1980년의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2020년까지는 선진국의 21세기 초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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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도
- 철도는 현 중국 교통의 골간이다. 1993년의 철도 화물수송량은 16.3억t으로 전체 화물 운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4.7%를 차지한다. 이는 1949년의 34.7%, 1980년 20.4%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운송수단 역할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낙후된 철도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은 50여 개의 간선과 70여 개의 지선을 건설하였고 8차 5개년 계획 기간에 북경∼광주, 성도∼昆明, 하얼빈∼대련 등을 대상으로 5,700km를 전철화·고속화하여 1995년까지 16.5억t 수준으로 화물수송량을 끌어올렸다.
- 현존하는 철도망의 기본 특징은 남북과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통과하는 주요 철도 중심지는 북경,
천진, 심양, 長春, 하얼빈, 濟南, 푸양, 남경, 상해, 石家莊, 太原, 鄭州, 무한, 株州, 광주, 柳州, 성도, 중경, 貴陽, 昆明,
서안, 蘭州 등이다. 이들을 각 축으로 하여 서로 남북·동서로 얽혀 있다.
지역적으로는 동북 3성(遼寧省·吉林省·黑龍江省)이 70여 개의
간선과 지선이 있으며 영업거리 역시 1.2만km로 전국의 1/4을 차지하며, 철도망 밀도도 매 100㎢당 1.51km로 전국 평균(540m)의
2배를 넘는다. 이는 러시아나 일본과의 역사적·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루어진 건설에 연원한다.
- 1980년대에 중부 및 동부 연해지역 철도건설의 핵심인 京廣線 남부의 衡陽∼광주 간 복선개통 및 북부의 大同~秦皇島 간의 전기화·복선화가 이루어졌고, 서부지대의 석탄 개발을 위한 包神線(包頭∼神木)이 건설되었으며, 그 외에 寶中線(寶鷄∼中衛), 西延線(西安∼延安) 등이 건설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철도 건설은 징주선(京九線:北京∼九龍), 津覇線(天津∼覇州), 集通線(集寧∼通遼), 侯月線(侯馬∼月山), 石長線(石門∼長沙), 合九線(合肥∼九江)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징주선은 길이 2,538km로서 약 7,000만t의 운송능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남북을 잇는 새로운 철로이다.
2. 수운
- 중국은 해안선의 길이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잘 발달된 하천이 있어서 수운 조건이 우수하다. 1993년 말 하천의 연장은 10.9만km이며, 항구는 국내 하천에 2,000여 개, 그리고 연해에 60여 개가 있다. 민용선박 보유량은 1980년의 18만 3,771척에서 1992년 말에는 37만 3,568척으로 늘어났다. 연해 주요 항구의 화물 운송량 역시 1980년의 2억 1,731만t에서 1993년 6억 7,646만t으로 늘어났다. 수운에 의한 화물운송량은 총 9억 8,000만 t으로 전체의 8.9%이고, 여객운송량은 전체의 2.9%를 차지한다.
- 주요 연해 항구를 화물 출입량의 순으로 보면, 상해, 친황다오, 대련, 광주, 녕파, 청도, 천진, 湛江 등이었고, 내수면 항구 역시 화물량 순으로 배열하면, 남경, 무한, 南通, 鎭江, 九江, 항주, 岳陽 등이다. 이러한 항구들은 양자강 수계 항로, 주장강 수계 항로, 京杭 운하 항로 및 黑龍江 松花江 항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특히 제7차 5개년 계획 기간에는 건설의 중점을 이들 항로에 두었다.
3. 도로
- 1993년 말 중국의 도로 총연장은 108.35만km이고 2000년까지 130만km로 늘리고 10개 노선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특히 경제개발이 활발한 연해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기 위해 동북 3성과 大連, 河南, 山西, 陝西 지구와 천진, 그리고 湖南·湖北 지구와 상해 간의 간선도로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체 화물수송량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49년의 12.9%에서 1993년에는 74.8%로 높아졌다. 현재 도로포장률은 약 87.6%이다.
- 동부 연해지역과 중부지역의 도로는 주로 철도 및 수상운수의 보조수단으로서 단거리 운수를 담당하고 있으나 서부에서는 도로의 상당부분이 이 지역의 간선운수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 간선도로는 약 70여 개가 되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도로의 질을 높이기 위한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최근에 건설된 중요한 도로 중 瀋大(瀋陽∼大連) 고속도로는 375km의 길이로 1일 5만 대의 통과능력을 갖추고 1990년 완공되었고, 京津唐 고속도로는 북경에서 천진까지 142km 길이로 국제 표준에 따른 전면 폐쇄노선이며 모든 교차로가 입체화되어 있다. 1일 5만 대의 통과능력으로서 1993년에 완공되어 운행되고 있고, 廣瀋고속도로는 광주~심천까지 120km의 길이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4. 항공
- 1929년에 中國航空公司가 창립된 후 1950년까지 전국의 민항은 12개 노선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162개 노선으로 늘었다.
하지만 전체 운수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낮았다. 그 후 대외개방·경제개혁으로 1993년 초에는 71개의 국제노선을 포함한 563개의
항공노선을 갖추었으며, 총 연장도 96.08만km에 이른다.
전국적으로 103개 공항을 가지고 있으며 항공기는 528대를 보유하고 있다.
화물수송량도 1980년의 8.9만t에서 1993년 69.4만t으로 늘었고 여객수송량 역시 343만 명에서 3,38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각 성
·자치구의 수도 등 주요 도시는 북경과 직통 또는 취항관계가 연결되어 있고, 상해, 광주, 무한, 항주, 하문, 桂林, 昆明, 성도, 라싸,
蘭州, 우루무치, 서안, 심양, 대련, 하얼빈 등의 대도시와 관광 중심지와의 연결이 양호한 편이다.
- 한편 1950년대 초 3개의 국제 항공노선이 있었으나 1960년대에 중국민항이 서부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아메리카로의 국제항로가 개척되었고 1980년대, 90년대에 개방과 더불어 노선이 크게 늘어났다. 주요 국제항로는 북경, 상해, 광주, 昆明, 대련, 샤먼 등의 국제공항에서 서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프랑크푸르트, 취리히, 부쿠레슈티, 아디스아바바, 쿠웨이트, 런던, 파리, 카라치, 싱가포르, 방콕, 나가사키, 마닐라, 시드니, 모스크바, 평양, 양곤 등이다. 중국은 항공운송이 장기적으로 급격한 수요 증가가 예상된다고 보고 중국민항의 관리를 지역별·노선별로 분리, 독립한다는 계획으로 株式制 도입을 고려하고 항공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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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세 이전
-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으므로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계속하여 왔다. 기록상으로는 BC 3∼BC 2세기에 燕나라의 秦開가 고조선의 요동을 정벌하였다고 적혀 있어 漢族 세력이 이곳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족의 망명인인 衛滿은 고조선의 準王을 대신하여 衛氏朝鮮을 세웠다(BC 194). 위씨조선은 漢武帝와 싸워 멸망하고 그 故土에 漢四郡이 설치되었다.
-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국가들은 중국을 통해 한문화와 불교문화를 수입하여 국가통치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었고, 특히 신라는 唐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당나라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고려의 光宗은 중국식 과거제를 채택, 실시하여 문치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연호로 사용하였으며 귀족 사회는 漢文學을 교양의 근본으로 삼았고, 승려들도 宋으로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13세기에 蒙古의 세력이 강대해져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항쟁하고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년간 완강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몽골이 세운 元나라와 화해하여 開京으로 환도하고 이후에 고려는 원나라의 駙馬國이 되었다. 원·명 교체기인 고려 말에는 親元派와 親明派가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조선 왕조를 開創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명에 대한 事大主義를 국시로 삼아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공물을 보냈다.
- 조선 유교주의자들의 통치원리는 排佛崇儒를 지도원리로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사대 경향은 더욱 심하여 갔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이 구원군을 보내와 일본 격멸에 도움을 주었다. 만주족에 의한 2번의 호란(胡亂:1627, 1636)을 당하자 조선은 굴복하여 그들이 세운 청나라를 섬겼고, 이 시기에 유럽의 과학지식과 문명이 중국을 통해 들어와 조선 학자들에게 實學 학풍이 퍼져나간 계기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간섭을 심하게 하여 대원군의 납치, 중국 관제의 실시 강요, 淸軍의 서울 주둔 등을 행하였다.
- 그러나 청일전쟁(1864∼95)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서 손을 떼고 청나라와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광복에 불타는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19년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 6·25전쟁에는 중공군이 대량투입됨으로써 한국 민족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다.
2. 현대
-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로 인해 양국은 1950년대 이후 정치적 적대관계와 경제적 단절이 계속되었다.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진 1970년대 후반 들어 간접교역의 형식으로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넘어서서 중국의 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양국 경제교류도 점차 늘어갔다.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착륙하는 사건이 나자 중국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후 비정치적인 부문에서 양국 교류가 활기를 띠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飛行情報區域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고, 1984년 3월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모국 방문과 한국인들의 중국 친지방문이 허용되었다.
-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중국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1988년 10월에 한국인들의 중국 관광금지가 해제되었다. 한국의 끈질긴 외교 교섭에도 중국은 政經分離 원칙을 고수하여 민간교류만 허용하였다. 1990년 10월에 무역대표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91년 10월과 11월에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다. 1992년 2월에 양국 무역협정이, 그리고 7월에는 투자보장협정이 발효되었다. 그해 4월에는 3차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고 8월 24일 양국은 수교의정서를 교환하고 정식 수교를 이루고 민간 차원의 교류에서 정식적 국가 간의 교류로 바뀌었다.
-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리펑 총리, 장쩌민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그 일정 중에 한·중 통상장관회의를 열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대한 세제지원과 8차 5개년 계획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첸치전(錢其針) 외교부장이 방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시애틀에서 정상회담을 가져 북한 핵문제와 다각적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 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긴밀한 협의, 한반도 비핵화 실현 지지를 논의하고 이중과세 방지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신협력양해각서를 교환했으며 산업협력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10월에는 리펑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한·중 양국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인 서울~북경 간의 직항노선이 개설되었다.
- 1995년 2월 17일 북한에 대한 경수로제공을 전담할 다국적 컨소시엄인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참여문제와 관련 불참키로 결정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역할을 스스로 제한했다.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대북한제재에는 반대했다. 중국은 1997년 4자회담 참여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8월 뉴욕 4자회담 예비회담과 12월 제네바 본회담에 참가했다.
3. 韓中교역 현황
-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달러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 달러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다. 1993년에는 90억 8,000만 달러로 늘었다. 한국은 무역수지를 보면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 5,000만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94%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 3,000 만 달러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 2,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 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 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등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제1위 투자 대상국으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 430만 달러에 달하고 있다. 투자 대상 지역은 渤海灣 주변과 동북 3성에 편중되어 있고 업종별로는 단순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이 대부분이다.
-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등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했다.
- 그러나 한중 수교(1992.8.24)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 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등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 한.중 양국은 수교후 9년여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방면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하였고, 특히 중국은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하고 개혁·개방정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이 긴요한 만큼 4자회담 참여 등을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더욱이 1998년 김대중 대통령-朱鎔基 총리간 고위급회담(4월 ASEM 정상회의), 胡錦濤 중국 부주석 방한(98.4), 김대통령 국빈방중(98.11월), 주룽지총리 방한(2000년 10월 아셈정상회의) 등으로 정치.안보분야 협력도 긴밀해지고 있는 등 양국은 그간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분야에서의 협력을 바탕으로 21세기의 공동번영을 위해 동반자관계를 계속 강화해 나갈 전망이다.
- 중국의 대한반도 3대 정책
.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유지
. 한반도 남북 양측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자주적인 평화통일 실현
. 한반도의 비핵화
- 한반도 관련 문제 발생시, 중국은 상기 원칙에 부합되면 지지, 부합되지 않으면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 정상회담 현황
. 1992. 9 노태우 대통령 방중
. 1993.11 APEC회담시(시애틀) 김영삼 대통령 - 江澤民주석
회담
. 1994. 3 김영삼 대통령 방중
. 1994.11 APEC회담시(인니 보고르) 김영삼 대통령 - 江澤民주석 회담
. 1995.11 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방한
. 1996.11 APEC(필리핀 마닐라)회담시 김영삼 대통령-江澤民주석
회담
. 1997.11 APEC(캐나다 밴쿠버)회담시 김영삼 대통령-江澤民주석 회담
. 1998.11 김대중 대통령 방중
.
1999. 9 APEC(뉴질랜드 오크랜드)회담시 김대중 대통령-江澤民주석 회담
. 2000. 9 UN새천년 정상회의(뉴욕)시 김대중대통령
- 江澤民주석 회담
. 2001.10 APEC(상해) 회담시 김대중 대통령 - 江澤民주석 회담
. 2002.10 APEC(멕시코)
회담시 김대중 대통령 - 江澤民주석 회담
4. 교역규모
- 한국 양국간 경제교류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된 1979년을 전후하여 홍콩을 통한 간접교역 방식의 소규모 상품교역에서 출발해 1992년 수교당시 64억달러였던 교역량이 고속성장을 거듭하면서 2000년에는 1992년의 5배를 육박하는 312.5억달러 규모에 달했다. 2000년말 수출 184.5억불, 수입 128억불로 미국, 일본에 이은 우리의 3대 교역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한편 중국측 통계에 따르면 우리는 일본, 미국, 홍콩에 이어 중국의 제 4위 교역상대국이다.
- 우리의 주요 교역 대상국에 대한 수출비중에 있어서도 중국은 1994년 6.5%에서 1999년 9.5%, 2000년 10.7%로까지 확대되고 무역수지 역시 1993년 이후 우리의 흑자기조가 확대추세를 지속하여 2000년 대중 무역흑자는 56.6억달러를 기록하였다. 아울러 94.5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보이고 있는 우리의 대홍콩 수출의 80% 정도가 중국으로의 수출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은 우리에게 대외 수출 견인차 역할과 함께 효자시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특히 홍콩의 중국 귀속후 우리의 대 중국/홍콩 수출은 1999년 227억달러, 2000년 292억달러로 단일국으로는 미국(376억달러)에 이은 제 2대 수출시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 韓中간 체결협정(1999년, 2000년말현재)
. 무역협정, 투자보장협정, 과학기술협정, 상사중재협정체결,융자협정, 해운협정,
보건의료협정, 체신협정, 환경협력협정, 문화교류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표준화/도량형/품질인증 협력협정, 세관협력협정, 민간항공협정, 원자력
협력협정, 어업협정 등
2000년 |
2001년 |
2002년 | |
對中 수출 |
US$ 186.1억 |
US$ 181.9억 |
US$ 227.7억 |
對中 수입 |
US$ 128억 |
US$ 133억 |
US$ 168.6억 |
- 수출품 : 전자관 및 부분품, 철강, 가죽, 컴퓨터, 반도체 ,직물
- 수입품 : 의류, 곡류, 석탄, 반도체, 컴퓨터,
수산물
- 대중진출 : 5,854건, US$ 50.1억(2001년말기준 실행액누계)
- 대중유치 : 1,848건, US$
152백만(62~2000년누계)
- 교민 : 3만여명(주중대사관추정)
- 또한 중국의 WTO 가입으로 앞으로도 대중투자의 확대와 교역이 지속 신장될 것이 확실시됨에 따라 중국시장은 우리에게 세계 어느 국가보다 더없이 매력있고 가능성 있는 시장임과 동시에 우리의 진출 역량을 최대한 집중시켜야 할 시장이 아닐 수 없다.
5. 교역품목
- 교역상품구조면에서 양국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강하게 보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중국 주요 수출상품은 화학제품을 비롯하여 전기·전자제품, 철강, 기계류, 섬유류, 비금속 광물 등이고 대중국 주요 수입상품은 천연섬유류, 농수산물, 광물성 생산물, 전자부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비교우위에 따른 수평분업의 형태도 강하게 보이고 있어 섬유류, 화학제품, 전자제품, 금속제품 등은 수출과 수입에서 동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주요 교역품목이 가공무역용 원부자재이나 최근 중국정부가 가공무역 원부자재 수입 보증금 제도 실시 및 각종 수입규제로, 중국산과 대체 가능한 품목에 대해서는 구매선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향후 중국시장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내수시장을 겨냥한 소비재의 현지생산 및 판매체제로 수출품목을 다변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중국정부는 2001년 1월 1일부로 평균 관세수준을 16.4%에서 15.3%로 인하하였다. 동 인하조치로 3,462개 품목의 관세가 조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품목의 49%에 이른다. 조정 후 광물의 관세가 3.0%, 금속이 7.4%, 화학제품이 10.6%, 임업제품이 12.3%, 기계전자전기,계측기기가 14.3%, 경공업제품이 14.8%, 건축재료가 17.8%, 농산품이 19.0%, 방직품이 21.1%, 교통도구가 24.0%이며 HS 품목수량도 7,062개에서 7,111개로 증가되었다.
6. 對中투자 실태
- 우리나라의 對중국 투자현황
1. 연도별(단위: 천미불)
연도 |
허가기준 |
실행기준 | ||
투자건수 |
투자금액 |
투자건수 |
투자금액 | |
1988 |
2 |
3,400 |
- |
- |
1989 |
12 |
9,320 |
7 |
6,360 |
1990 |
36 |
51,661 |
23 |
42,468 |
1991 |
111 |
81,353 |
69 |
42,468 |
1992 |
265 |
216,683 |
170 |
140,493 |
1993 |
616 |
597,465 |
376 |
261,653 |
1994 |
944 |
721,312 |
833 |
621,267 |
1995 |
758 |
1,064,741 |
722 |
803,708 |
1996 |
820 |
1,415,843 |
706 |
792,047 |
1997 |
1,065 |
1,391,304 |
622 |
658,802 |
1998 |
316 |
833,364 |
250 |
614,584 |
1999 |
542 |
517,855 |
453 |
329,560 |
2000 |
- |
- |
554 |
280,000 |
누계 |
5,854 |
7,259,891 |
4,807 |
4,610,000 |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2000년 6월말 현재) |
2. 업종별(단위: 건, 천미불)
구분 |
허가기준 |
실행기준 | ||
건수 |
금액 |
건수 |
금액 | |
농림어업 |
124 |
72,269 |
92 |
26.667 |
광업 |
39 |
46,015 |
25 |
12,799 |
제조업 |
5,062 |
5,809,806 |
3,959 |
3,674,748 |
건설업 |
63 |
286,944 |
39 |
168,720 |
도소매업 |
180 |
163,715 |
132 |
86,026 |
운수창고업 |
36 |
100,528 |
30 |
43,230 |
통신업 |
14 |
156,592 |
11 |
78,223 |
금융보험업 |
1 |
150 |
1 |
118 |
숙박음식점업 |
169 |
234,642 |
129 |
188,091 |
부동산, 서비스 |
164 |
387,930 |
117 |
199,720 |
기타 |
2 |
1300 |
2 |
470 |
계 |
5,853 |
7,259,891 |
4,537 |
4,478,812 |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2000년 6월말 현재) |
3. 지역별(단위 : 건, 천미불)
지역명 |
허가기준 |
투자기준 | ||
건수 |
금액 |
건수 |
금액 | |
감숙성 |
3 |
826 |
2 |
77 |
강서성 |
15 |
3,237 |
13 |
1,907 |
강소성 |
287 |
818,523 |
235 |
521,014 |
광동성 |
130 |
285,648 |
98 |
186,002 |
귀주성 |
1 |
754 |
1 |
754 |
길림성 |
695 |
307,085 |
493 |
155,944 |
복건성 |
51 |
35,047 |
37 |
25,334 |
북경시 |
321 |
561,877 |
247 |
359,577 |
사천성 |
10 |
10,582 |
10 |
7,683 |
산동성 |
1,704 |
1,918,427 |
1,403 |
1,201,127 |
산서성 |
9 |
7,287 |
5 |
2,438 |
상해시 |
174 |
613,584 |
150 |
445,824 |
섬서성 |
9 |
4,966 |
8 |
3,862 |
안휘성 |
16 |
32,118 |
8 |
10,871 |
요녕성 |
1,242 |
858,080 |
898 |
455,652 |
운남성 |
2 |
5,175 |
1 |
2,500 |
자치구 |
31 |
86,244 |
24 |
64,263 |
절강성 |
123 |
268,394 |
96 |
152,213 |
천진시 |
520 |
936,045 |
431 |
567,871 |
청해성 |
1 |
121 |
1 |
121 |
하남성 |
21 |
8,131 |
14 |
3,051 |
하북성 |
156 |
108,191 |
118 |
66,093 |
해남성 |
10 |
21,407 |
9 |
15,810 |
호남성 |
6 |
82,814 |
6 |
69,515 |
호북성 |
19 |
17,488 |
13 |
14,634 |
흑룡강성 |
298 |
267,840 |
216 |
144,675 |
누계 |
5,854 |
7,259,891 |
4,537 |
4,478,812 |
*자료원 : 한국수출입은행(2000년 6월말 현재) |
■ 한중민간경제협의회 사이트(http://korea-china.korch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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