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한 줌의 경고’ K-푸드 수출의 운명을 가른다-이주형의 글로벌 푸드트렌드(4)
- 이주형 전문위원
- 승인 2025.04.28 07:43
‘책임의 외주화 금지’…문제 원료 사용 브랜드도 책임
가공식품 전반 출처 추적…검역 지연·거절 가능성도
수출 경쟁력, 품질·가격 넘어 공급망 신뢰성으로 확장

태평염전에서 출발한 조용한 파문이 한국 식품 수출의 심장을 흔들고 있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이하 CBP)이 전남 신안군 태평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에 대해 ‘인도 보류 명령’(Withhold Release Order, 이하 WRO)을 발동했다. 공식 사유는 강제노동 의혹. CBP는 ‘강제노동방지법’(UFLPA)에 따라 강제노동 정황이 포착된 물품의 수입을 보류할 수 있으며, 이는 의혹만으로도 가능하다. 기업이 스스로 강제노동이 없었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해당 제품은 사실상 미국 시장에 진입할 수 없다.
물량으로만 본다면, 한국산 소금의 미국 수출 비중은 전체 수입량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 있다. 태평염전은 국내 최대 민간 천일염 생산지로 연간 1만 5천 톤 이상의 생산량을 자랑하며, 전통 식품 가공업체 중심으로 프리미엄 소금 시장에서 신뢰를 얻어왔다.
K-푸드를 대표하는 김치, 간장, 라면 등 다양한 제품의 제조 공정에서 태평염전의 소금은 그 자체로 품질의 지표로 기능해왔다. 일부 업체는 제품 라벨에 원산지를 명기하며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을 정도다.
이번 조치는 단순히 한 염전의 문제가 아니다. 태평염전 소금이 미국 시장에서 거부당하면, 이를 사용한 가공식품 전반이 연쇄적인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미국 식품안전현대화법(FSMA)의 이력추적제도에 따라, 원재료뿐 아니라 그 원재료가 포함된 최종 제품까지 KDE(핵심 데이터 요소)와 CTE(중요 추적 이벤트)를 기반으로 검토가 이뤄진다.
예를 들어, 태평염전 소금이 사용된 김치나 국물 제품은 해당 원료의 출처가 명확히 추적되지 않으면 검역에서 지연되거나 거절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단일 원료 이슈가 전체 수출망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공급망 조정은 기업의 대응 여력에 따라 차이가 크다. 국내 천일염 간의 공급처 변경은 상대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이뤄질 수 있으나, 기존 제품과 동일한 품질을 확보하려면 일정 수준의 품질 검토나 관능 테스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반면 해외산 소금을 사용할 경우, 염도, 미네랄 함량, 위생 기준 등에서 차이가 존재해 제조 공정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제품 레시피 조정이나 라벨 변경, 원산지 표기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특히 미국, 유럽 등 수출국의 식품 표시 기준을 고려하면, 해외 소금 도입은 단가 상승뿐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번 사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드러냈다. 공급망 전반의 투명성과 관리체계가 글로벌 수출의 생존 조건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WRO는 물론, 유럽연합도 공급망 실사법(CSDDD)을 통해 기업들이 사용하는 원재료의 생산·운송·가공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해당 법안은 ‘책임의 외주화 금지’를 원칙으로 삼는다. 내가 직접 고용하지 않았어도, 내가 지시하지 않았어도, 내가 사용하는 원료의 생산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책임은 최종 브랜드가 져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수출기업들은 공급망 내 인권, 환경, 경영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앞다퉈 구축하고 있다.
한국 식품 기업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이번 사태처럼 인도 보류 명령이 발동된 경우, 기업은 90일 이내에 강제노동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임금명세서, 근무시간표, 노동계약서, 현장 사진과 영상, 근로자 인터뷰 등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해야 하며, 외부 감사기관의 평가도 신뢰도 확보에 도움이 된다. 단순한 내부 진술이나 해명만으로는 미 연방기관의 검토 기준을 넘기 어렵다.
더구나 이번 사태는 우리 식품 산업의 공급망 관리 방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일부 업계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원료 공급처와 거래를 유지하면서도, 그 과정이 시스템적으로 관리되지 않거나 체계적 문서화가 미흡한 경우도 있다. 공급처에 대한 정기적인 실사나 외부 인증 없이 내부 신뢰에만 의존하는 관행도 아직 일부 남아 있다.
이러한 방식은 한때 효율성과 유연성을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원료의 출처와 관리 수준까지 포함해 투명하게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수출 경쟁력은 단순히 품질과 가격을 넘어, 공급망 전반의 신뢰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 식품 수출이 지금처럼 성장세를 이어가려면, 이제는 ESG 경영을 실질적인 수출 전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과 환경, 투명성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실사 체계를 구축하고, 정기적인 모니터링과 외부 감사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수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이 요구하는 기준이며, 수출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다.
물론 모든 기업이 당장 완벽한 시스템을 갖출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분명한 신호다. 한국 식품 산업은 지금, 세계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문턱 앞에 서 있다. 특정 기업의 위기로만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나도 크다.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어 왔던 수많은 절차와 체계를 이제는 다시 들여다볼 때다.
글로벌 무대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한국 식품의 세계화는 잠시의 성공에 그칠 뿐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