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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다시 본다

곡산 2008. 8. 8. 20:46
‘삼국지’를 다시 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1) 2008년 07월 30일(수)

▲ 삼국시대 형세도, 중앙 회색 부분이 삼국지의 격전장 형주이다(자료 : 『제갈량문화유산 답사기』)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삼국지』 열기가 무섭다. 그동안 영화제작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되던 ‘삼국지’가 시리즈물로 제작되었고, L씨의 소설은 1,000만 부 이상 나갔다고 알려지며 『삼국지』와 경영 전략과 연계하는 책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이는 『삼국지』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은 필설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통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 숱한 재해석과 평설, 외전 등을 재생산하며 동양의 문화 콘텐트로 승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정치인은 『삼국지』에서 치국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기업 CEO는 경영의 영감을 얻는다. 학생은 『삼국지』 영웅의 활약상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는 등, 성별 · 나이 · 직업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 『삼국지』의 묘미다.

특히 『삼국지』는 무용담뿐만 아니라 정치 · 군사 · 외교 · 행정은 물론 재무 · 인사 · 과학기술까지 망라하고 있다. 『삼국지』가 보여주는 천시(天時) · 지리(地利) · 인화(人和)의 중요성은 현대 경영에서도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설명도 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읽으면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투덜댄다. 이는 『삼국지』가 100여 년이라는 기간에 걸친 방대한 역사를 다루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있는 내용들을 과학적 해석으로 풀어준다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지적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여기에서는 『삼국지』에 나오는 과학을 다루면서 수학, 물리 등과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삼국지』에 숨어있는 과학을 찾아내는 것이다. 독자들이 간과했던 고고학적 발견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진실의 규명도 있으며 통속적으로 알려진 전설에 대한 분석과 반론의 제기도 있다.

중국을 삼분

유방(고조)이 건립한 한(漢)제국(기원전202년)은 고조로부터 평제까지 총 11명의 황제(총 211년)를 거쳐 왕망에게 찬탈 당했는데(기원후 8년) 이 시기를 역사상 서한 또는 전한이라 부른다. 왕망이 건립한 신(新)나라는 18년 후 한 종실인 유수(광무제)에 의해 멸망되고 다시 한실의 정권이 수립된다. 이를 역사상 동한 또는 후한이라 하며, 총 196년 동안 13명의 황제가 있었고, 헌제에 이르러 멸망하였다(기원후 220년).

전한과 후한을 비교하면, 권력의 흥망성쇠 과정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한시대 전기는 중국 역사상 매우 강성했는데 특히 한 무제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해 멀리 돈황 지역까지 점령했다. 후한은 초창기에 일시적으로 강성함을 유지했지만 곧바로 통일정부의 쇠퇴기로 들어섰다.

후한 왕실의 쇠망 요인은 황제 자신과 그를 둘러싼 외척과 환관의 권력투쟁 때문이다. 후한의 황제들은 대체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요절하거나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왕이 자손을 남기지 못해 자신의 직계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은 방계 혈족 내에서 황제를 옹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어린 나이의 가까운 황족이 황제로 추대되기 마련인데, 대체로 선황제의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황태후의 외척이 득세하고 여기에 환관이 가세하여 어린 황제로 하여금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어린 황제가 장성하여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할 때가 되면 환관들이 똘똘 뭉쳐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 일쑤였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면서 후한의 황제들은 오직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쓸 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것이 후한 통일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이다.

정통 역사적 분류에 의하면 삼국시대는 조조(曹操, 155∼220)의 아들인 조비(曹丕, 187∼226)가 황제를 지칭할 때부터 진입한다. 즉 한의 헌제(獻帝, 181∼234) 건안 25년, 곧 위 문제 황초원년(기원후 220년)으로 그 다음해에 유비(劉備, 161∼223)가 황제에 올랐으며(221년), 손권(孫權, 182∼252)이 정식적으로 황위에 오른 것은 더욱 늦다(229년). 삼국시대의 법통은 이때부터라는 것이 옳다는 설명이다.

▲ 나관중, 나관중은 정사 70퍼센트, 소설적 흥미 30퍼센트 정도를 가미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삼국지연의』를 썼다(자료 : 『본삼국지』) 
그러나 『삼국지』는 후한 말기 영제(靈帝, 156∼189)가 등극하는 168년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환제가 환관에 의해 살해된 후 영제가 등극했을 때 외척 하진(何進, ?∼189)이 대장군이 되었는데 이 때 마침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킨다. 외척 하진이 정치에 관여하는 환관들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환관에게 살해되면서 후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만다. 이 혼란기에 원소(袁紹, ?∼202), 동탁(董卓, ?∼192)을 거쳐 조조, 유비, 손권이 중국 패권을 걸고 혈투를 벌인다. 결국 조조의 아들 조비, 유비, 손권이 후한을 세 나라로 분리하여 통치하면서 후한은 멸망하고 삼국시대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반면에 학자들에 따라 삼국시대를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184년, 또는 헌제 초평 원년(190년)부터 진 무제 태강 원년(280년)로 간주하기도 한다. 184년도 많이 인정되는데 이때는 조조의 나이 30세, 손견(孫堅, 155∼192) 27세, 유비 24세로 이들이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중국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이때를 출발로 삼았으므로 총 97년간의 일이다. 『삼국지』의 주제가 되는 삼국시대는 『삼국지』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삼국시대의 중심인물들의 발흥과 쇠망까지를 담고 있어 그 제목이 어울리는 것이다.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 유비, 손권이다.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 조비가 위나라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조조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므로 조비가 아닌 조조를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다루는 데 이견이 없다.

촉나라는 234년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이 오장원에서 사망한 뒤 국운이 쇠퇴해 기원후 263년 위나라에게 멸망당하면서 제일 먼저 사라진다. 위나라 역시 265년 조조의 참모였던 사마의(司馬懿, 179∼251)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236∼290)이 위의 원제 조환(曹奐, 246∼302)을 협박하여 선위를 받아 진나라를 세우면서 46년간의 짧은 국운을 마감하였다. 마지막으로 280년 진(晉)나라가 오나라의 손호(孫皓, 242∼283)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위, 촉, 오의 세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삼국통일은 『삼국지』의 주인공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위나라의 제후 사마염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사와 소설과의 혼합

일반적으로 『삼국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국의 정사로 진나라의 진수(陳壽, 233∼297)가 찬(撰)하고 송나라의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주석을 단 것으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도합 65권을 말한다. 진수는 촉의 이름난 학자 초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장군주부, 황문시랑 등의 낮은 벼슬을 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환관에게 아첨하지 않아 승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촉이 망하고 진나라가 서자 장화(張華, 232∼300)가 그의 재주를 아껴 역사를 쓰는 좌저작랑으로 추천했고 저작랑으로 승진했다가 평양후(平陽候)의 재상이 되었다.

진수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위나라만 정통으로 인정하여 위지에만 본기(本紀)가 있고 촉과 오는 열전(列傳)에서 다루었다. 이는 진수가 위나라로부터 선위를 받아 건립된 진나라의 관리로서 위나라를 법통으로 인식하여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진수의 『삼국지』는 한국사의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위지』 <동이전>에서 부여전, 고구려전, 옥저, 읍루, 예(濊), 삼한전(三韓傳) 등을 기록하여 우리나라 상고사와 국문학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 진수의 『삼국지』, 명나라 황실에서 정서한 진수의 『삼국지』로 한 페이지에 10줄, 한 행에 21자를 썼다(자료 : 『중국을 말한다』) 

진수의 『삼국지』에 주해를 한 배송지는 남송의 역사학자로 동진 시대에 전중장군, 사주주부 등을 맡았고 송나라 때 황제를 모시는 중서시랑이 되었으며 사주와 기주의 대중정, 태중대부 벼슬도 했다. 423∼453년 송(宋, 東晋을 멸망시킨 유유가 세운 나라로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가 아니다)의 문제(文帝)가 진수의 『삼국지』가 너무 간단한 것을 아쉽게 여겨 내용을 보충하라고 명했는데, 배송지는 원문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 사실을 보충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역사책에 주해를 붙이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책을 만들었다. 문제(文帝)는 그의 주해를 읽고 불후의 저작이라고 칭찬했는데 그가 인용한 100종이 훨씬 넘는 책들은 후세에 거의 다 사라졌지만 그의 주해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배송지의 주해를 진수의 설명보다 더 많이 활용했다.

둘째는 나관중의 『삼국지』가 나오기 전에 많이 읽힌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이다. 『삼국지평화』는 원나라 영종(英宗, 재위 1320~1323) 때에 전래되던 화본(話本)들을 바탕으로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출판업자 우(虞)씨가 간행한 책으로 원래 이름은 『전상삼국지평화』이다.

모두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림과 글로 위아래를 나누어 구성하고 있는데 『삼국지』의 10분의 1 정도의 분량으로 된 짧은 책인데다 문장이 세련되지 못하며 허황된 내용이 많지만 그동안 설화(說話)로서 전승되던 이야기들을 독서물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 번째가 원(元) · 명(明)시대의 나관중이 『삼국지평화』의 줄거리를 참조하고 진수의 『삼국지』, 배송지의 각주,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토대로 소설화한 『삼국지연의』로 등장인물이 무려 1191명이나 달할 정도의 대서사시이다. 『삼국지연의』의 현존본으로는 명나라 홍치 갑인(弘治甲寅, 1494)에 간행된 24권 240회로 된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후 『삼국지연의』가 큰 인기를 끌면서 여러 문인들에 의해 계속 속본(俗本)으로 출간되었으나, 청나라 순치 갑신(順治甲申, 1644) 때 모종강(毛宗崗)이 김인서 성탄(金人瑞 聖歎)의 비평과 서문을 쓴 원본 성탄외서(元本 聖歎外書) 120회, 『삼국지연의』 제일재자본(第一才子本)이 간행되자 이것이 『삼국지연의』의 정본(定本)이 되었고 모든 속본은 자취를 감춘다.

한국에서도 『삼국지연의』는 수많은 작가(박태원, 정비석, 박종화, 김길형,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리동혁 등 70여 종)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삼국지연의』라는 제목보다는 주로 ‘소설 『삼국지』’ 또는 ‘원본 『삼국지』’ 등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글에서 사용되는 『삼국지』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모본으로 하며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를 설명할 때는 진수의 『삼국지』라고 기록하여 혼동되지 않도록 했음을 밝혀둔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룰 때 시종 문제가 되는 것은 정사의 기록인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정사와 각색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서로 다를 때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이다. 원칙적으로 진수가 적은 『삼국지』등 중국의 정사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고 있으므로 나관중의 그것과 서로 다르게 설명된 내용이 있다면 정사에 적힌 것을 진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관중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여 소설을 전개했다면 불후의 명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앞으로 나관중의 설명이 진수나 역사적 사실과 명백하게 다른 경우, 즉 인물이 가공인물이거나 변형되었거나 각색되었을 경우, 또는 전개되는 정황이 사실과 다를 경우 정사에 기록된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여 역사적 사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한다. (계속)

이종호 과학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