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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생각하며>한 지붕 밑 초대손님

곡산 2008. 8. 4. 23:14

<살며생각하며>한 지붕 밑 초대손님

문화일보 | 기사입력 2008.08.04 17:15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의 성격을 결정한다.'
한 대학의 식품학과가 현수막에 내건 캐치프레이즈다. 어떤 음식은 성격을 차분하게 해주고 어떤 음식은 우리를 성마르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한방에서도 늘 다루던 이야기들이다.

세칭 패스트푸드라고 부르는 간이음식보다 오래 발효시키거나 뜸을 들인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이 몸에 좋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 외국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쉬쉬 하며 몰래 먹던 김치며 발효 음식들이 이즈음에 미국 사회의 큰 골칫거리인 극도 비만 예방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도 이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은 패스트푸드 등의 영향으로 영양과다 섭취로 인한 소아비만이 큰 문제로 대두되는 실정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여름철을 맞아 더 거세게 불어닥치는 다이어트 열풍은 일상적으로 적절하게 섭취하는 음식들까지도 마치 외부의 적대자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수영복 입을 몸매를 가꾸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광고를 보여주는 매스컴에서는 날씬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살 가치가 없다는 정도의 뜨거운 메시지를 거의 매일 전하고 있으니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음식들을 성분으로 분해하거나 칼로리를 합산하면서 맛없게 먹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른바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고급 레스토랑은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을 웰빙 음식이라는 이름의 메뉴에 붙이고, 모든 병마에서 구원해 줄 것만 같은 환상을 주는 특수 유기농 식품들은 두세 배의 가격을 서슴없이 호가하고 있다.

흥미 있는 일은 요즘 결혼 문제로 상담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성격 차이라든지 복잡한 가족관계 등의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음식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젊은 회사원은 맞벌이하는 아내가 다이어트와 웰빙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백화점에서 만든 식품들을 사다 먹는 것이 너무 싫어 '당신이 만든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날 저녁 된장찌개가 상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동네 음식점에서 사온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이 문제가 발단이 돼 대판 싸움을 시작해서 마침내 같이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편이 백화점 음식이 싫다고 해서 바쁜 와중에도 음식점에서 성의껏 사온 것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다니, 저런 남자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내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음식에 관심이 많으면 자기가 만들면 될 게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말없이 앉아 있던 남편은 이게 근본적으로 찌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찌개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서 그럼 찌개가 문제가 아니면 뭐냐는 것이 아내의 항변이었다.

중년 남성들이 참석하는 한 상담 집단에서는 참석자 한 사람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결혼 초에는 김치부침개가 먹고 싶다고 하면 늦은 밤이라도 마다 않고 부쳐주더니 이제는 김치부침개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온갖 구박을 다 하며 인생에 대한 비전도 없이 먹는 것만 밝힌다는 둥 별소리를 다 한다는 것이다.

다른 참석자가 아내도 나이 들면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그 남자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말라는 것이다. 자기 어머니는 지금 칠십이 넘었지만 "엄니, 엄니가 만들어준 개떡이 먹고 싶어유"라고 말만 하면 다음 날로 만들어서 이고 시골에서 올라오신다는 거다. 그렇지만 아내는 당신이 원하는 음식은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는 둥, 언제 비싼 음식 재료 살 돈이나 주어봤느냐는 둥 비난을 하면서 무성의한 밥상을 차리는 데 아주 질린다고 했다.

아예 밥을 보온밥통에 사흘치씩 해놓고는 해서 뜬내가 난다고 했더니 밥통 회사에 전화 걸어 불량품을 팔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내를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했다. 밥을 조금씩 그때그때 해 먹는 것이 무슨 돈의 문제거나 다이어트의 문제냐는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음식에 관한 정성이나 배려는 전혀 없이 자기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왜 밥은 나만 해야 하느냐고 짜증이 나 있는 아내와 그럼 누가 하느냐고 화를 내는 남편이나,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식단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아내와 무슨 밥상을 이따위로 무성의하게 차리느냐고 화가 나 있는 남편이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먹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소화가 제대로 될 리도 없다.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포옹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은 더군다나 자명한 이치다.

이 지경에 이르면 서로 일상적인 호감과 사랑을 나누는 지름길이었던 음식에 대한 생각의 왜곡이 서투른 평등주의와 다이어트, 웰빙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우리 삶을 초토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서로 의논해서 음식을 만들 순서를 정하거나 함께 소박한 음식을 준비해서 정답게 마주 앉는 부부의 사이가 나빠지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전에 만난 젊은 근로자는 불우하게 떠돌며 살았다는 이야기 끝에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비록 단칸방에 살지만 갓 결혼한 아내가 따뜻한 밥과 국이 놓인 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들어올 때면 너무나 고맙고 행복해서 눈물이 핑 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세상 없어도 설거지는 꼭 자기가 한다고 했다.

음식 때문에 일어나는 결혼 생활의 불화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집 지붕 밑에 있는 동안 행복을 책임지는 일'이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결혼을 통해 초대한 배우자나 자녀들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식과 정성이 담긴 음식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되는 계절이다.

[[우애령 / 소설가]]